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67화 (16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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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늦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라희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혹시 바흐가 고모님께 오늘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한 건가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바흐는 뿔테의 말을 듣고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렴풋한 윤곽조차 잡히지 않았다.

라희가 잔뜩 날을 세우며 답을 기다리고 있자, 제니퍼는 대수롭지 않게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파티 이후, 우리 집에 얼굴도장 찍으러 들락날락할 줄 알았거든요. 누구처럼."

누구는 이유진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제프가 이유진을 붙박이장이라고 비꼰 이유. 지난번, 위층 브랜다의 침실에서 마치 제집인 양 태연히 있는 모습으로 볼 때, 이유진은 고모님을 뵈러 자주 들렀을 게 뻔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것도 파티도 없는 야밤에 오셨네요? 하긴, 요즘 같은 날은 파티 열기도 좀 그래요."

제니퍼의 말투는 조금 뾰족했다.

"요즘 같은 날이라뇨?"

라희가 미간을 좁히며 묻자, 제니퍼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어. 음, 알고 온 거 아니었어요? 그 일 때문에 온 줄 알았는데."

"네?"

그 일?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제니퍼는 뭔가 재빨리 생각하는 듯 눈을 재차 깜빡였다.

"아. 진짜 몰랐나 보네요. 그럼 이야기가 길어 질 거 같네요. 일단, 부모님 위층에서 주무시고 계시니까 저쪽으로 가요. 언니."

제니퍼가 손끝으로 거실 너머 복도 끝의 문을 가리켰다. 라희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협탁과 테이블 그리고 푹신한 소파가 놓인 작은 방이 나왔다. 모양새로 봐서는 거실에서 파티하다가 따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 같았다.

"편히 앉으세요. 커피? 아니면, 밤이니까 허브티?"

제니퍼는 협탁 위 놓인 인터폰을 귀에 갖다 대고는 라희를 향해 물었다.

"......커피요."

머리가 지끈거려서 카페인이 필요했다.

"커피 두 잔. 작은 방으로 가져다 주세요."

달깍, 제니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라희의 맞은 편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고서 다리를 비스듬히 꼬고 앉았다.

"진짜, 몰랐나 봐요? 그 일로 온 줄 알았는데."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괸 제니퍼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또렷한 눈매가 호기심을 담아 반짝였다.

"........?"

계속 되풀이되는 그일. 그 일이 뭘까? 라희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앉아 있자, 제니퍼는 콧등을 살짝 찡그리다가 말했다.

"지난번, 그리고 오늘 오빠네 회사 난리 난 거 진짜 몰랐어요? 완전 발칵 뒤집어졌는데."

"회사요?"

회사? 오늘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고 아까 갤러리에서 짧게 마주친 것이 다였다. 그런데 회사라고? 그럼 그일 이라는 것이 회사와 관련된 일인 걸까.

"그게..."

제니퍼가 뭔가 말하려 입을 열려던 그때. 똑똑, 하고 낮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나이 든 아주머니가 커피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히스패닉계로 보이는 뚱뚱한 여자는 이내 커피잔과 초콜릿, 쿠키, 한입 거리 빵 등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눈인사하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제니퍼는 그중 아몬드가 박힌 쿠키를 하나 집어 들고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말씀하시는 내용 들었는데, 요즘 무슨 저쪽 EU 쪽이 난리인가 보더라고요. 유로존인가? 무슨 그리스 부실이 저쩌고 하던데, 그런 거 머리아파서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유로화가 떨어졌대요. 그리고 스위스 프랑은 가격이 수직으로 상승해서 40%나 뛰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뭐라고 하는 말이 있던데."

스위스 프랑이라면, 지난 주말 바흐가 잠시 언급한 적 있다. 앞으로 조금 바빠질 거라고 하면서 이유를 설명했었는데.

"페그(peg) 시스템 폐지 말인가요?"

라희가 말하자, 제니퍼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소리쳤다.

"맞아요! 그거, 그거. 하여튼, 그거 때문에 지금 금융가가 난리가 났대요. 막 도이치뱅크(Deutsche Bank:독일계은행)하고, 바클레이즈(Barclays: 영국계은행)가 엄청난 손실을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월스트릿 중소 헤지펀드 회사도 줄줄이 도산하고 그랬다던데. 오빠네는 조금 많이 손해를 봤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들었거든요? 근데, 오늘 일이 터진 거에요."

제니퍼는 말을 하다 말고, 목이 막힌 듯 켁켁거렸다. 라희는 커피잔을 건네며 제니퍼의 다음 말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흐읍, 커피잔을 받아 쿠키로 막혔던 목을 축인 제니퍼가 말을 이었다.

"휴. 그게. 오빠네 회사 딜러 중 한 명이 착오를 일으켜서 대량 주문 실수를 냈대요. 그래서 손실이 장난 아니었다고 하던데요. 모르긴 몰라도, 진욱 오빠가 오늘 손실분 복구하려면 한동안 엄청 고생할 거라고 아빠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난 언니가 그 일 때문에 여기 온 줄 알았는데? 진욱 오빠 의기소침해 있으니까 엄마 만나서 조언 들려고. 아니에요?"

아니. 전혀 몰랐다. 알 수도 없었고. 어두운 표정으로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는 라희의 안색을 살피던 제니퍼가 말을 이었다.

"엄마 말로는, 오늘 직원 실수야 어쩔 수 없지만, 그전 손실은 오빠가 그동안 파티에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너무 두문불출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두문불출? 지난 연말부터 바흐는 라희와 줄곧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라고? 라희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제니퍼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맨해튼의 모든 최신과 비밀 정보는 파티 도중에 오가거든요. 문서, 팩스, 이메일, 전화통화 등의 흔적이 남는 매체들은 나중에 감사에 적발될 우려가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부정보나 은밀한 소문은 파티 중에 소수의 지인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오가요. 그래서, 금융 쪽 사람들은 모두들 악착같이 맨해튼 월스트릿에 사무실을 차리고 붙어 있는 거죠. 다들 우리 집 파티 같은 곳에 참석해서 정보를 전해들으려고 인맥 형성에 열을 올리고요. 사실, 이번 스위스 사태도 알만한 사람은 연초에 다 알고 있었다고 해요. 아빠는 설마 오빠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대요."

"....."

"그래서 엄마는 오빠 짝으로 유진 언니 쪽을 지지하고 있죠. 유진언니는 사교적이기도 하고 이쪽 문화에 익숙하니까요. 작년 여름 엄마가 위독하셨을 때도, 엄마의 가장 큰 근심은 진욱 오빠였어요. 오빠야 워낙 사교성이 없어서 엄마가 혹시 어떻게 되고 나면 끈 떨어진 연처럼 맨해튼에서 겉돌 텐데 그때 그나마 유진 언니와 묶어두면 걱정 없다 생각하신 거죠. 유진 언니는 이쪽 동네에서 인기도 있고, 또 사람들 불러 모아 파티 주최와 사교 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간 오래 봐오기도 했고, 진욱 오빠에게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타입이죠."

처음, 이유진과 마주한 곳 역시 나영의 생일 파티장이었다. 그때 바흐와 함께 동행한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잘 어울려서 쉽사리 그 두 사람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었지. 그때를 회상하는 라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물론, 유진 언니의 행실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라이프 파트너로서는 무리가 없다 생각하신 거에요."

지금 제니퍼가 한 말은, 고모님 역시 소문을 알고 있었다는 암시였다. 하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으니, 비밀 정보가 오가는 파티장의 본진격인 고모님 댁에서 모르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난 언니가 오빠에게 도움되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 들으러 온 줄로만 알았거든요."

라희는 눈을 깜빡였다. 조언? 바흐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한 조언을 들으란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유진같이 될 수 있는 거지? 처음부터 스타트 라인이 다른데. 예일대를 졸업하고 성공한 여자도, 영어에 능통한 사교적인 여자도 아니다.

라희가 잔뜩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본 제니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맞다. 그럼 언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 늦은 시각에."

제니퍼는 갑자기 생각난 듯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라희는 눈을 껌뻑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제니퍼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한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지금 바흐는 고모님 댁에 있지 않다. 아니, 오늘 밤 아예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뒤돌아서 종적을 감춰 버린 바흐. 지금 소재는 알길 없지만, 제니퍼는 사촌 동생이니 최소한 그의 연락처는 갖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뭐라고 핑계를 둘러야 할까. 같은 또래라면 동감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 라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진욱씨가 아까전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제 폰이 갑자기 먹통이라서요.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진욱씨와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전화번호를 도통 모르겠는 거에요. 저장만 해 놓았지 따로 외워두지도 적어두지도 않았거든요. 걸려온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걸 수도 없는 상태에요. 거기다 진욱씨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친구분과 만나기로 한 장소도 기억나지 않아서요. 막막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 오게 되었죠."

갑작스레 지어내 어색한 변명이었지만, 제니퍼는 개의치 않았다.

"헤에, 보기보다 빈틈이 많네요. 뭐, 저도 기억 못 하니까 그 마음 이해해요. 좋아요, 그럼. 휴대폰 가지고 와서 적어 줄게요."

잠시 방을 나간 제니퍼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한 손에는 번호가 적힌 메모를 들고 돌아왔다.

메모를 라희에게 건네며, 제니퍼가 활짝 웃었다.

"자요. 언니. 나중에 또 이런 일 없게 머릿속에 외워두세요. 그리고 다행인 줄 아세요. 오늘 일찍 부모님이 잠자리에 드셔서 내가 먼저 연락받아서 망정이지, 만약 엄마나 아빠 만났으면 한 시간은 붙들려 있어야 했을 거에요."

"고마워요. 제니퍼. 덕분에 살았네요."

인사를 건네고서 방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뒤돌아서는 라희를 향해 제니퍼가 말했다.

"리즈와 어제 만났거든요. 지금 뉴욕 와 있는 거 알죠? 리즈가 언니 되게 좋게 봤더라고요. 언제 한번 시간 내서 봐요. 우리 세 명. 여자들끼리만요."

라희는 말없이 옅게 웃음 지었다.

***

택시를 타고 그대로 호텔로 돌아온 라희는 바흐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귓가에 가져다 댄 수화기에서는 모바일 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바흐가 폰을 꺼놓다니. 난감했다.

라희는 두어 번 더 다이얼을 눌러보다가, 전화기를 내려놓고서 소파로 걸어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소파에 고개를 뒤로 기댔다.

피곤했다. 정말로. 오늘 저녁부터 휘몰아치듯 겪어낸 일은 몹시 힘에 부쳤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 스트레스. 육체적인 타격. 거기다 지친 몸을 이끌고 고모님네 집까지 찾아갔었는데, 정작 바흐는 없었다. 대신 제니퍼가 건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막상 폰이 꺼져 있다니.

"하."

입에서 바람 빠진 실소가 흘러나왔다. 대체, 왜. 이렇게 꼬여버렸을까. 라희는 피곤한 눈가를 손끝으로 꾹꾹 눌러 지압했다. 머리가 무겁고 하루종일 분주히 돌아다닌 몸은 찝찝했다. 거기다 밤은 이미 자정으로 향하고 있는데 바흐는 기척은커녕 흔적조차 없다.

라희는 소파에 깊숙이 머리를 기대고서, 피곤한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아....."

긴 한숨이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라희는 힘겹게 눈을 뜨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맑아야 하는데 온통 무겁고 지끈거려 도통 집중할 수가 없다.

라희의 눈동자가 옆으로 기울여져 저쪽 침실을 향했다. 들어가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이고 푹 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언제 바흐가 돌아올지 모르니.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일단 씻기라도 할까.'

어차피 씻어야 하기도 했으니 샤워보다는 차라리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나면 머리가 맑아질까 싶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라희는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흰색 욕조 안에 들어갔다. 작게 웅크리고 앉아서 무릎을 세워 얼굴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제니퍼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바흐는 회사에서 엄청난 손실을 봤고, 마침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갤러리에 와 뿔테가 한 말을 들었다.

어머님이 허락하셨다는 말로 시작한 뿔테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딱 오해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마치, 뿔테와 라희가 미래를 약속했는데 어머님이 반대를 해서 틀어졌다는 것으로 들리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바흐는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라면......"

라희는 바흐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함께 런던에서 뉴욕까지 같이 지낸 바흐가 실은 이유진과 결혼까지 약속했고, 이유진이 나타나 곧 상견례를 하자고 말한 것을 들었다면.

'무슨 소리냐고, 어찌 된 영문인지 가서 따졌겠지.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그럴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리를 피해 나가버렸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까. 생각에 잠긴 라희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한가지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관계.

처음 오천만 원의 계약이 끝난 이후 바흐와의 관계는 확실히 정해 놓은 것도, 정해진 것도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바흐가 바스의 어학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사라 집에서 머물렀으며, 떠밀리듯 간 윌버리 하우스에서 죽을뻔한 일을 겪고 난 뒤 이유진에게 매인 2억 원을 갚아주었다는 말을 했을 뿐.

그 뒤로 런던 그리고 뉴욕. 여태껏 한 달여 동안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연인들이라면 응당 해야 할, 사귀자던가, 사랑한다든가, 좋아한다든가, 나아가 결혼하자는 말까지. 바흐는 그 어떤 말도 없었다.

'어떤 사이지? 바흐와.......'

문득, 유진과 오피스텔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무슨 사이냐고 물었었지. 뿔테와.

-선우와는 무슨 사이에요? 나영이에게서 듣자 하니 선우가 쫓아다니고 있다고 했다던데. 애인?

그때의 대답.

-폰 번호도 모르는 관계요.

피식, 라희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어렸다. 바흐와 라희도 딱 그 관계였다. 폰 번호도 모르는 관계. 나중에 라희의 원룸에 찾아와 몰래 전화번호를 알아낸 뿔테처럼, 라희도 고모님 댁에 찾아가 제니퍼에서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순간, 라희는 등줄기를 타고 쭉 흐르는 소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묘한 일치감. 단지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라희는 지금 뿔테가 했던 모든 행동을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희가 바흐를 따라 두바이로 훌쩍 사라져 버린 동안, 뿔테는 자취방 현관문 앞에 노란색 포스트잇을 수십 장 붙이며 기다렸다.

똑같다.

지금 바흐가 이렇듯 훌쩍 모습을 감춘 지금 라희는 이 넓은 호텔방에서 바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있다.

그다음에는?

아득한 물음. 욕실 수증기가 차오른 벽을 멀거니 바라보던 뇌리에 뿔테와 아웃백에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건너편 테이블의 커플을 보며 뿔테가 중얼거렸던 말.

".....알고 있을걸.”

“......무엇을요?”

“상대방이 호감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뿔테는 라희를 보며 말을 건넸었다.

“자기도 알고 있지?”

“어떤 거요.”

“내가 필사적이라는 거.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뿔테의 필사적인 노력은 오늘 갤러리에서 끝났다. 애당초 자신에게 크게 호감이 없는 상대를 향해 그렇듯 애태우며 노력했다는 것이 뿔테의 불찰이었다.

라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낮췄다. 한국에 있는 동안, 라희 역시 뿔테에게 사귀자는 말도,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당시, 뿔테에게 유일하게 원했던 것은 그저,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거. 그것뿐.

그래. 그것뿐이었다.

만약, 그 상태에서 뿔테에게 다른 연인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 연인과 미래를 약속했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답을 알고 있기에 미리 터져 나오는 조소. 라희는 싸늘히 웃었다.

'당연히 내버려 두거나 보내 줬겠지.'

라희는 뿔테를 데리고 미래를 계획한 적이 없었다. 뿔테와 결혼한다거나, 나중에 가족을 이룬 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였다.

오늘 바흐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뒤돌아 나가버린 것은.

라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듯.

딱, 그 정도의 관계.

딱 그만큼의 감정. 호감.

'그것도 모르고.'

화끈. 얼굴에 열기가 뻗쳐올라 왔다. 아까 저녁, 갤러리에서 남편 자랑하는 캐서린을 보면서 혹여 나중에라도 바흐에게 푹 빠져 그녀와 같이 될까 봐 얼굴을 붉혔던 일이 민망하고 낯뜨거워졌다. 마치 자기최면에 걸리듯, 남편을 흠모하는 캐서린에게 자신을 투사하면서, 그 대상으로 바흐를 떠올렸지. 정작, 떡 줄 사람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다니.

"하!"

어이없는 실소가 크게 터졌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옆에서 좋아한다는 티를 팍팍 내고 붙어 있는 모습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오늘 똑똑히 봤지 않는가. 일방적인 집착과 애정의 결말을. 거기다 당사자이기까지 했다. 딱 봐도 끝이 보이는 관계.

더군다나, 오늘 제니퍼가 말해주었다시피 모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바흐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상대는 이유진 같은 여자다.

맨해튼 금융가의 파티에 같이 참석하고, 인맥을 쌓고, 홈 파티를 주최할 수 있는 사교적인 능력과 스펙을 가진 파트너. 그게 꼭, 이유진일 필요는 없겠지. 두 사람은 이미 끝났으니까.

하지만, 이유진 같은 스펙과 능력을 갖춘 여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 보였다. 바흐는 여자라면 모두가 열광하는 조건을 두루 갖춘 젊은 남자고 여기는 전 세계의 심장부, 맨해튼이니까.

'....그런데 난 이 맨해튼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길고 길었던 목욕을 마치고, 전신의 물기를 닦은 후 젖은 머리를 완벽히 말리고 욕실에서 걸어 나온 라희는 곧장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닫힌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옷장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이 눈에 보였다. 옷장의 구석에 놓인 여행가방. 바흐가 사준 거다. 라희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옷장에 걸려 있는 코트 두벌. 역시 바흐가 사준 거다. 그리고 고모님 댁에 갈 때 입었던 드레스와 구두. 바흐가 사준 거다. 옆에서 조용히 머물러준 대가로.

짧은 숨을 내쉰 라희는 침대 옆 인터폰을 손에 쥐었다. 버튼을 누르자, 이내 건너편에서 기척이 들렸다.

"여보세요. 토마스?"

"예. 미스 송. 말씀하십시오."

세인트 리지스의 24시간 버틀러 서비스. 이럴 때 쓰다니.

"옷가지를 담을 수 있는 쇼핑백을 가져다주시겠어요? 수량 넉넉하게 5장 정도요. 늦은 시간인데 죄송해요."

라희가 미안한 듯 말하자, 토마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즉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토마스를 기다리는 동안, 라희는 휴대폰 앱을 실행시켰다. 국적기와 외항사 비행기를 검색해 본 결과, 좌석이 남아 있었다. 망설임 없이 예매 버튼을 누르고 나서 조금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토마스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세인트 리지스 로고가 박힌 커다란 종이백에 바흐와 관련 없는 물건을 모조리 옮겨 담았다. 이내 커다란 쇼핑백 2개가 찼다. 거의 비워진 여행가방과 위에 걸린 옷가지들은 옷장에 그대로 남겨두고서, 라희는 침실 창가에 놓인 하얀색 테이블로 향했다. 투명한 유리가 깔린 테이블 위에 두고 갈 것들을 차곡차곡 올려놓았다.

황금빛 아이폰.

바흐의 카드.

그리고 쓰고 남은 현찰.

바흐가 건넨 돈은 만 달러로 백 달러 지폐 100장이었다. 남은 돈은 총 98장. 9천 800달러. 라희는 그동안 200달러 남짓 썼다. 한국 돈 이십만 원이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기에, 마저 채워둘까 생각해 보았지만, 수중에 가진 돈은 영국에서 쓰고 남은 파운드화뿐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라희는 다시 인터폰을 들어 토마스를 호출했다.

토마스가 환전해 다 준 300달러를 손에 든 라희는 다시 테이블로 다가가 돈을 채워 넣었다.

100달러짜리 100장.

처음 그가 준 돈 그대로.

돈을 채워 넣고 손에 남은 100달러는 공항까지 교통비로 쓰면 딱 맞았다.

"안녕."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나서기 전, 라희는 텅 빈 어두운 방을 향해, 낮게 중얼거려보았다. 티파니 스위트 룸. 쇼윈도 너머 아스라이 반짝이는 티파니 보석처럼, 예쁜 놀이동산. 안녕.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1. 나 챕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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