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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미스 송."
호텔 복도에서 마주친 티파니 스위트의 담당 버틀러인 토마스가 멈춰 서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상냥한 미소를 보이는 토마스를 스쳐 저 앞 보이는 티파니 스위트로 걸어가려다가, 멈칫. 라희는 발걸음을 멈췄다.
"저. 혹시....."
"예. 말씀하십시오."
라희의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스위트룸 방문 쪽으로 향했다. 바흐가 돌아와 방 안에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낫겠지. 궁금한 표정의 토마스를 앞에 두고 잠시 망설이던 라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까 전 그렇게 갤러리에서 모습을 감춘 바흐. 뉴욕에서 함께 머문 동안 그는 호텔, 회사, 고모님 댁 이렇게밖에 움직이지 않았으니 만약, 방안이 아니라면 고모님 댁에 있을 것 같았다.
- 달깍.
천천히 스위트 룸 문을 열었다. 현관에서 보이는 거실 쪽 등은 꺼져 있었다. 마스터 조명 스위치를 눌러 모든 조명을 환히 켰다. 텅 빈 스위트룸. 라희는 바쁜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도, 식당에도, 욕실에도 그는 없었다. 이 화려하고 예쁜 스위트 룸 안에 라희는 오롯이 혼자였다.
"후...."
땅이 꺼질 듯 터져 나오는 긴 한숨. 라희는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라희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휴대전화 화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지난 주말 그를 찍은 사진과 혜영의 연락처를 제외하고는 거의 시계 용도로만 사용한 휴대폰. 손끝을 움직여 연락처 버튼을 눌렀다.
모든 연락처(2)
엄마. 혜영.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단출한 연락처 리스트. 코로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제는, 정작 이 휴대폰을 선물한 당사자의 번호가 없다는 거다. 답답하다. 그와는 영국에서부터 늘 붙어있었기에 서로 통화를 한 적이 없었다. 뉴욕에서도 마찬가지. 이럴때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바흐와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 같아서 깊은 한숨만 나왔다.
- 아까, 그 사람이지?
갤러리에서 혜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말 없이 묻는 눈빛에는 같이 뉴욕에서 지내는 사람, 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네."
라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제프가 말을 꺼냈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원래 성격이 그런건지. 하여튼 자기 절제력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더군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라희는 고개를 들어 제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프는 그런 라희를 향해 눈길을 고정하고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 못봤겠구나. 라희씨 뒤에 서 있었으니까요. 흐음."
"어, 맞아. 그, 아까 그 안경쓴 남자가 이야기 하고 있을때, 라희 네 뒤에 그 사람이 서 있었거든. 바로 말을 걸려다가 먼젓번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는데. 그...."
혜영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을 이어갈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고심하는 듯 보였다. 혜영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제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라면. 연적이 나타나 갑자기 결혼이니, 상견례니, 부모님께 인사니, 뉴욕을 찾으러 왔다는 이런 말 하는거 듣고 있으면 빡치고 피가 거꾸로 솟아 앞 뒤 안가리고 주먹부터 날릴 거 같거든요? 그런데, 그쪽 분. 처음에는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안경쓴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서 정말 무시무시하게 표정이 변하더라구요. 나중에는 안색이 흑빛이었죠. 정말 이러다 오늘 일 치르겠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요."
제프는 조금 전 일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지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갑자기 피식 가벼운 실소를 흘렸다.
"뭐, 나야 관람객이니 남자 둘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 편이라, 내심 좋은 구경 되겠다 싶었죠. 치정 라이브로 K1(이종격투기)를 볼 수 있을거 같아서 기대도 했고요."
가늘게 좁혀진 눈빛이 라희를 향했다. 제프는 입가에 가벼운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런데, 라희씨. 성격이 냉담하긴 해도 감각이 둔한 사람은 아닌가봐요. 아니면, 등 뒤에서 쏘아지는 짙은 살기를 감지했나? 하여튼 그쪽 남자가 한참 험악한 표정 짓고 있는거 보면서 다들 숨죽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라희씨가 뒤 돌아 봤죠?"
라희는 뿔테에게 이야기를 건네려다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봤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표정이 변하더라구요. 상대 남자를 한대 칠 기세로 서 있다가 막상 라희씨랑 얼굴 마주하니까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요. 그뒤는 뭐,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사고칠거 같아서 자리를 피한걸로 보였어요. 현명했죠. 어차피 라희씨가 결정할 일이었으니까. 옆에서 가만 보기에는 이유진씨도 내심 사고가 일어나길 기대하는 모양새로 도발하는 거 같던데. 여간해서 넘어가지 않더라구요."
"....그, 그러니까. 그 사람. 굉장히 화나보였어. 그러데, 좀 분위기가 뭐랄까. 막 활화산 처럼 마구 내뿜는 화가 아니라, 진짜 차갑게 화난 느낌? 아. 뭐랄까. 하튼, 표현력이 부족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여튼, 성격 원래 조용한 사람이 한번 화나면 굉장히 무섭잖아. 비슷한 느낌이었어."
혜영이 덧붙였다. 제프는 가벼운 턱짓으로 라희를 뺨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로서는, 뭐, 지난번 파티에서 본 치정극의 결말을 본거 같아서 후련한긴 한데. 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평소처럼 빙긋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뺨, 괜찮아졌으면 어서 뒤따라 가봐요. 오해라면, 가서 풀어야죠. 그 남자, 좋아하죠? 많이. "
갑자기 찔린 정곡. 덜컹. 순간,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울렸다. 라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네."
"뭐, 그러니 첨부터 귀국을 한다 만다 그랬겠죠. 그런데, 그쪽 남자. 한번 삐치면 뒤끝 오래갈 거 같아보이는데, 가서 안되면. 알죠? 자리는 비어있어요."
제프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허벅지 위를 손바닥을 탁탁 가볍게 쳤다. 그러자 혜영이 옆에서 팔꿈치로 제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쪽 남편과 이야기 중인 캐서린을 대신한 행동으로 보였다.
".....가볼게요."
그길로 일행에게 인사를 마친 라희는 곧바로 갤러리를 빠져나와 급히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스위트 룸 어디에도 바흐는 없었다.
'혹시......'
바흐가 전화를 걸어 전화벨이 울릴까 싶은 마음에 라희는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서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쥐죽은 듯 고용한 방안.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휴대폰을 쥐고 있어서인지 손바닥이 뜨끈하고 손끝이 욱신거렸다. 열어 놓은 현관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고, 휴대폰은 잠잠하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리저리 방안을 배회하는 눈동자 속으로 창문 너머 밝은 맨해튼의 야경이 비쳐 들어왔다.
라희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황금빛 조명으로 훤히 밝은 5번가. 맨해튼 중심가라 그런지 밤 10시가 넘는 시각임에도, 길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사이 좋게 활짝 웃으며 거니는 연인들. 가족들, 친구들.
한참을 멀거니 거리를 내다보던 라희는 고개를 돌려 소파 팔걸이 위에 걸쳐 올려둔 검은색 코트를 보고 있다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코트를 걸쳐 입은 라희는 짧은 호흡을 내 쉬었다.
"........"
남의 집에 방문하기에는 매우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바깥을 보고 있으려니 그렇게 심각하게 늦은 시간은 아닌 거 같다는 심리적인 핑계를 방패 삼아 용기를 냈다.
멈칫, 현관을 나서려던 라희는 그 자리에 서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막상 나서려니 줄곧 꼬이고 엉킨 일들을 곱씹어 생각하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왔다. 동시에, 아까 맞았던 뺨에도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아......"
라희는 뺨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오늘 저녁은 진짜 끝없는 악몽 같았다. 아마, 깨어날 수 있겠지. 곧.
***
"방문 약속을 하셨습니까?"
훤칠한 제복을 입은 젊은 도어맨은 라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이는 라희 또래의 백인. 지난번 보았던 지긋한 도어맨과 다르니 아마도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아닐까? 지역 특성 때문인지, 유색인종이 아닌 백인이었다. 라희가 조용히 고개를 젓자, 그는 라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짧게 말했다.
"일단, 에오르그씨 댁에 연락을 넣어 보지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최소한 수상하거나 미심쩍은 인물로 보이지는 않은 모양.
두꺼운 유리 현관 문안으로 들어간 도어맨은 벽에 설치된 인터폰으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했다. 바깥에서 안쪽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라희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이, 바깥으로 다시 나온 도어맨은 정중히 현관문을 열었다.
"올라오시랍니다. 오른쪽 엘리베이터입니다."
알고 있다. 지난번 방문 때 봤으니까.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쯤은. 라희는 휘황찬란한 대리석 복도를 걸어가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안에 올라탄 라희는 12층 버튼을 꾹 손끝으로 힘주어 눌렀다.
-땡.
이내, 밀폐된 좁은 공간 내부의 조용한 정적을 가르고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려 퍼졌다.
오늘로서 두 번째 방문. 지난번에는 바흐와 함께 왔지만, 이번에는 혼자다.
라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들어 엘리베이터 문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면 보이는 것은 바로 현관이다. 지난번처럼 둥근 계단을 걸어 올라가 고모님을 뵈어야 하나? 바흐가 있겠지? 그에게 첫 마디를 무어라 꺼내야 할까.
생각을 거듭하자 머릿속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러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양옆으로 스르르 열리는 문 앞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작은 키, 긴 갈색 머리, 혼혈임이 분명한 생김새.
"생각보다 늦게 오셨네요? 언니."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제니퍼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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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