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65화 (16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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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사실과 달라 조금 놀랍긴 했지만, 역시. 계산이 빨라. 누구 옆에서 돈맛 좀 보고 나니 평범한 의사 와이프로는 성에 안 차는 모양이지?"

유진이 턱을 살짝 기울이며 여유롭게 웃음을 흘렸다. 가시 돋친 말투. 명백한 적의(敵意). 이번에는 확실히 적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라희는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평소, 유진이 하던 그대로.

"하지만, 선우씨가 어디 고만고만한 의사도 아니고, 정회장님 아드님이니, 전문의는 아니더라도 강남 한복판 아버님 건물에 성형외과나 피부과 차려놓고 연예인 협찬이나 텔레비전 홍보하고 나면 꽤 쏠쏠찮게 벌 텐데. 임대료도 없으니 인건비와 유지비 조금을 빼면 순수입일 테고 말이야. 복병 같은 어머님께서 허락하셨다잖아? 네 수준에서는 충분히 좋은 기회 같은데 그렇게 매몰차게 차버리다니,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이성을 상실한 것인지 모르겠다."

노골적인 막말.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서 지켜보는 이목도 없으니 이제 꾹꾹 억눌러 두었던 패악질이 슬슬 고개를 치드는 모양이었다.

반응을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혀를 차며 여유를 부리를 유진을 앞에 둔 라희는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전시회장을 훑었다. 주 파티장인 1전시실의 나무 바닥 위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복작이며 서넛씩 무리를 지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오프닝 파티에 참석한 대부분이 예술계통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다들 유진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일 터.

라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언젠가 대학에서 배웠던 인사관리 강의 내용 중에, 영업직인 딜러 파트가 있었다. 영업직은 사회적인 평가가 자산이라 했었다. 상품의 가격이 비쌀수록, 사고파는 물건뿐 아니라, 누가 파는가가 중요하다는 거다.

미술 상품을 취급한다는 유진 역시 아트딜러. 특히 주 고객이 상류층인 미술 작품 경우, 그런 경향은 더 심할 듯했다. 오고 가는 금액이 고가인 만큼, 정직해서 믿을 만하고,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거래해야 할 테니까. 지금 당장 유진 같은 강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최소한 그녀가 속한 사회집단에서 평판을 달리 심어주는 계기를 만드는 일은 효과적인 공격으로 보였다.

머릿속이 팽팽 회전하는 가운데, 실내를 훑던 라희의 시선이 아까부터 유진과 라희의 미묘한 대치를 유심히 살피던 제프, 혜영, 캐서린에 머물렀다.

그래, 마침 혼자도 아니다. 든든한 아군이 셋이나 있으니까.

그럼. 도발을 시작해볼까? 라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언니는 참, 놀라운 재주를 지니셨더라고요?"

".......?"

유진의 눈이 날카롭게 치켜떠졌다. 불쾌감이 묻어나는 짙은 호기심. 속눈썹을 잔뜩 올린 채 무슨 말이 나올지 주시하는 표정. 라희는 일부러 느긋하게 보이도록, 손가락 하나를 세워 턱 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시간을 끌었다. 쏘아보는 유진의 눈에 차츰 독기가 몰렸다.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유진과 시선을 맞춘 라희는 정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쩜, 그렇게 교양있고 세련된 모습으로 상스러운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내세요? 그런 것도 어디서 따로 배우는 학원이 있나 보죠? 좀 알려주실래요? 저도 돈 좀 집어주고 배우고 싶어서요. 언니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정말 막말이 욕설보다 고급 스킬인거 같아서요. 직접적인 더러운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걸레 문 것과 같은 효과가 나잖아요?"

일부러 꾸민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유진은 갑작스러운 비아냥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순간,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방금 라희가 말한 어디 배우는 곳이 있냐느냐는 물음은 예전에 유진이 했던 말 고대로 돌려준 거다. 라희는 한국을 떠나기 전 오피스텔에서 만난 유진이 지껄였던 말을 머릿속으로 재차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언니를 봐요, 지적이고, 세련되었고, 미인이신 데다가 고혹적이기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예쁜 얼굴로 입에 걸레 문 막말을 마구해 대는 것이."

잠시 말을 끊은 라희는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다음 할 말은 얄미운 제프가 잘 써먹던 말.

"아찔하게 매력적인 거 알아요? 언니의 진저리나는 매력이 아마도 고상한 취향의 진욱 오빠를 멀어지게 했을 테고, 버나드 씨를 홀렸나 봐요. 마치 라플레시아(Rafflesia 식충식물: 고약한 냄새가 특징)에 꼬여 드는 파리처럼 말이죠."

버나드 리체. 지난번 고모님 파티장에서 바흐와 유진이 암호처럼 중얼거린 내용의 주인공일 듯한 TGH회장에 대해서는 구글로 검색해 봤었다. 버나드에 대해서는 그저 나이 든 백인 남자라는 것밖에 알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단지 유진의 속을 박박 긁어낼 소재일 뿐이니까.

순간 쩍, 하고 유진이 쓰고 잇던 가면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 흘리던 여유로운 기색을 싹 지운 유진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미간을 팍 찡그리고서 눈매를 좁혔다.

"너, 뚫린 입이라고 아주 수챗구멍처럼 더러운 오물을 질질 잘도 뱉어내는구나?"

더 할 말이 남아 있는지 유진의 붉은 입술은 채 다물어지지 않고 파르르 떨렸다.

저쪽은 막말의 대가. 노련한 상대에게 먼저 기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상태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유진에게 뺏기면 곤란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라희는 유진이 다른 말을 하려 입술을 움직이기에 앞서 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게요. 전 아직 언니처럼 고급진 막말을 쏟아내는 스킬이 부족해서요. 언니가 전에 제게 그랬었잖아요. 여자는 진실한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가 보다고. 저, 그 말에 깊이 감명받았거든요."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현재까지 파악한 가장 치명적인 약점으로 재빨리 공격을 해야 했다. 유진을 날려버릴 결정적인 한방.

라희는 한 손을 가슴 위로 들어 마치 초등학교 학예회의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보란 듯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 위 심장 언저리를 깊숙이 눌러 짚었다.

"그래서 언니가 8년 전에 진짜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었다고 생각하니까, 막, 가슴이 울컥하는 거 있죠? 언니야말로 진정한 로맨티스트 같아서요. 지난번 진욱 오빠가, 살짝 귀띔해 주었거든요."

"...뭐?!"

유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심한 동요. 성공. 바로 걸려들었다. 라희는 살며시 웃음 띤 눈으로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때, 뱃속에 있던 태아가 오빠 아이가 아니었다면서요?"

유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마도, 유진과 바흐 둘만의 비밀이야기였겠지. 런던에서 유진에게 갑자기 따귀 맞은 그날, 바버라가 친절히도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가 속삭이듯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사적인 비밀.

라희가 갑작스레 꺼낸 말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날벼락 같을 거다. 바흐의 평소 언행을 감안해보면, 결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확신해야 할 텐데 유진은 지금 차분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상태가 아닌 듯했다.

"...........!"

치부를 들킨 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잔뜩 치켜뜬 눈동자에는 분노가 끝까지 차올라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주름이 깊게 팬 미간. 일그러진 표정. 험악하게 변한 얼굴. 유진은 긴 숨을 들이켜고서, 그대로 호흡을 멎은 듯 보였다. 이내, 고급 드레스를 휘감은 늘씬한 몸이 수치심과 분노에 물들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라희는 속으로 카운트를 시작했다. 그간 보였던 유진의 패턴으로 보아, 지금까지 용케 버텼다.

하나.

둘.

역시나 부들부들 떠는 길고 가는 손이 허공으로 번쩍 올라갔다. 예상되는 아픔. 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회다.

- 짝!

커다랗게 울려 퍼진 이질적인 소리. 동시에, 라희는 과장된 큰 몸짓으로 갤러리 바닥에 몸을 실었다.

-쿵

기울여진 몸이 나무바닥과 맞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여기에 더해 라희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아, 얏!"

순간, 갤러리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큰 소리가 난 지점을 주시했다.

정적. 갑자기 조용해진 실내.

갤러리 안의 수십 개의 눈이 씩씩거리며 서 있는 유진과 바닥에 널브러져 한 손으로 뺨을 감싼 라희에게 쏠렸다.

"괜찮아?"

"어머, 세상에! 괜찮니? 라희야!"

"세상에!"

조금 떨어져 서 있던 제프, 혜영, 캐서린이 재빨리 다가와 쓰러져있는 라희를 에워싸고 부축해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요!"

잔뜩 화가 난 캐서린이 유진을 향해 높게 소리치자, 스스로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 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캐서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직시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유진을 주목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재하 조차도 입을 다물고 유진을 응시했다.

"아, 아니.........."

주위의 시선을 감지한 유진이 두리번거리다 당황해 머뭇거리는 사이, 라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국어가 아닌, 의도적인 영어로.

"저는 단지 TGH회장과 언니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요."

(I just tell her that she and Bernard from TGH are a perfect match.)TGH회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매를 가늘게 좁힌 유진이 죽일듯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가운데 라희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였다. 주위에 똑똑히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오랜 연인이었잖아요. 얼마 전에 유진 언니가 버나드의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안타까워서..."

라희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사람들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다들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옆에 서 있는 일행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유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 재빨리 말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갑작스런 폭로. 제프와 엘리자베스는 유진과 버나드의 관계를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방금 라희의 말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두루뭉술하게 떠돌던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음이 라희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유진은 순간 놀라 황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그것 참, 안된 일이네요."

눈치빠른 제프가 유진을 향해 뾰족하게 말을 꺼냈다. 역시, 영어로.

"요즘 버나드 회장이 40살 차이 나는 젊은 모델과 공공연한 밀회를 즐긴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렇게 불안한 관계에서 아이라도 하나 있으면 마음이 든든할 텐데요. "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유진의 표정이 이번에는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연인의 변덕으로 마음이 심란해도 그렇지, 걱정해서 일부러 위로의 말을 건넨 사람에게 따귀라니."

제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 상식 이하의 터무니없는 행동이로군요. 뭐, 딱 그 쪽에게 어울리는 짓이긴 하지만요."

경멸 찬 눈초리로 유진을 곧게 쏘아보는 제프. 그러자 옆에 있던 캐서린이 나섰다.

"라희에게 사과하시죠, 이유진 씨."

캐서린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다그쳤다.

"유산 후 마음이 심란해도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지요. 세상에,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따귀라뇨.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정말 막돼먹었네요."

혜영이 옆에서 사납게 쏘아보며 거들었다. 라희가 유산의 시기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에, 유진은 지금 최근에 버나드의 아이를 유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다른 남자가..소문이.."

"예전부터…. 루머가.."

"갤러리도... 차려준거라던데.."

뒷말은 흐렸지만,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말소리가 오가면서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일제히 유진을 향해 쏘아졌다.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크게 악쓰는 소리. 유진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실성한 사람처럼 바락바락 악을 내지르다가 주먹을 말아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찢어발길 듯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라희를 노려본 유진은 몸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유진이 빠져나간 유리문을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뚝 끊겼던 대화 소리가 다시 갤러리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담. 무례하기 그지없구나. 하라는 사과는 안 하고 저리 내빼다니."

캐서린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나야 이번 전시회 계약건으로 만난 사인데. 미인인데다가, 정말 멀쩡해 보였거든. 사람 저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이상한 여자야."

혜영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저분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니 당황해서 그랬겠죠. 이제 이 좁은 동네에 소문이 쫙 퍼질 테니 어지간한 멘탈이 아니고서야 한동안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겠군요."

유진이 사라진 갤러리 유리문을 향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린 제프가 냉소적으로 정리했다. 쯧쯧, 낮게 혀를 차던 캐서린은 고개를 돌려 라희의 뺨을 매만지며 유심히 살폈다.

"그나저나, 어휴, 볼이 빨갛다 얘."

"진짜 무식하게 풀스윙을 날렸네요."

"어휴, 괜찮니?"

재차 쏟아지는 염려스러운 질문에 라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작게 끄덕이며 한껏 처량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뺨이 얼얼하지만, 걱정 마세요. 곧 괜찮아질 거에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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