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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를 태운 택시가 사라진 밤거리를 멀거니 바라보는 라희는 그야말로 망연자실. 넋 나간 꼴로 멈춰 서 있었다.
갤러리에서 눈을 맞추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나가던 그 마지막, 표정. 불쾌한 눈빛. 그 모습만 뇌리에서 마치 동영상처럼 또렷이 남아 계속 느린 화면으로 리플레이 되었다.
그러다 그 앞 장면으로 점차 기억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몽유병 환자처럼 풀어진 동공으로 거리를 하염없이 보고 있던 라희의 눈동자에 초점이 차츰 돌아왔다. 바흐가 갤러리에서 막 들어와 들은 대목은, 아마도 유진의 시선을 비끼기 시작한 그때. 좋은 소식이라며 뿔테를 소개한 그 장면일 것이다.
그 뒤 뿔테가 쏟아낸 뿔테 부모님을 만난일. 결혼. 허락. 교제. 그리고 라희의 집에서 부모님을 만난일까지. 오늘 뿔테가 언급한 것은 전부 바흐가 홀로 뉴욕에서 지낼 때 일어난 일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의 과거.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아......"
라희는 손을 입술에 갖대다고 신경질적으로 엄지 손톱 끝을 앞니로 잘게 깨물었다.
모마에서 뿔테 아버님을 만났던 일. 그 일은 명백히 바흐와 지낼 때의 일이었지만,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이런 결과로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왜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뿔테 아버님을 모마에서 만난 일을 그간 바흐에게 한마디 언질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손톱 끝을 깨물던 라희는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짚고 서 있다가 손가락을 세워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엉클어뜨렸다. 바보. 멍청이. 구제불능.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끔 흐지부지 내버려 두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아니, 불상사라기보다는, 변고, 혹은 사적인 비극.'
이런 일을 자초한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에 넌더리가 치밀었다. 라희의 미간이 내리 좁히면서 입술이 꽉 짓깨물어졌다.
라희는 눈을 돌려 조금 전 빠져나온 갤러리 입구를 바라보았다.
환한 조명으로 대낮처럼 불이 밝은 유리문.
저 안에 있는 사람들. 뿔테, 유진, 혜영, 제프, 캐서린, 재하, 그리고 뿔테 아버님인 민중.
그중, 혜영을 비롯한 뉴욕에서 갓 만난 지인들은 실상 라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크게 상관없었다. 이익을 목적으로 만난 관계도 아니고 단순한 친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머지 뿔테, 유진, 뿔테 아버님은 그들과는 다르다.
먼저 뿔테 아버님은, 일단 뿔테와 묶여 있는 상태니 논외로 치더라도 유진은 그야말로 라희를 향한 악의로 점철된 상대. 바스에서 만난 소피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악의가 아닌, 연인을 빼앗길 일로 지속적인 원한을 품고 계획적으로 틈이 생길 때마다 앙갚음하려고 벼르고 있다. 유진은 마음 깊은 곳에 모질게 응어리를 튼 앙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한마디로 적(敵).
그리고 지금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뿔테는 이제까지 이상하리만큼 집요한 집착과 괴이한 승부욕 그리고 강한 호감을 보였다. 처음 뿔테와의 만남 자체도 기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강제로 그의 오피스텔로 끌려갔으니.
'그래.'
라희는 갤러리 입구를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은 명백히 강간이었다.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인 수단으로 성적인 행위가 이루어졌으니까. 그럼에도 그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라희의 자존감이 밑바닥을 쳤던 이유가 가장 크고 강제 성행위 전에 이미 바흐 때문에 잔뜩 몸이 달아있었다는 심리적인 핑계도 있었지만, 사실은 뿔테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뿔테는 정중했다. 정말로, 조금 전까지 뒤에서 짓누르듯 강제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이런 사람이 형법으로 처벌 가능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일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예의 바르고 반듯하게 행동했다.
관계를 끝내고 나서 걱정스럽게 괜찮으냐고 물었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근심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본 순간 맥이 탁 풀린 기분이었다. 내심 당황스러워서 그를 피하려 화장실을 사용했고, 씻고 나오자 뿔테는 묵묵하게 배웅하겠다고 했다.
그 뒤 자취방에 갑작스레 찾아와 이어진 관계. 그때부터 매몰차게 잘라내지 못한 불찰이 컸다.
아니, 그때는 뿔테가 아니더라도 뭐든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생활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그저 충격에 휩싸여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돈에 몸을 팔았다는 자괴감, 그저 몸을 파는 여자가 된 것 같은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 방구석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그냥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끝내고 싶다는 막연한 허무감 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좌절감.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로 인해 깊어져 가는 절망을 동반한 우울감, 언제 바흐가 전화해 불러낼지도 모른다는 불안, 초조.
그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안은 채로 무릎을 세우고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 위에 앉아 오빠 일과 바흐와 일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배가 고프면 그냥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었을 뿐 욕구라는 것이 도무지 생기지 않아 시든 풀처럼 나날이 누렇게 떠서 바싹 말라가던 그때.
뿔테가 손을 내밀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고요한 물에 동동 떠있다가 누군가 던진 작은 조약돌이 남긴 파흔 위에 휩쓸리는 작은 지푸라기처럼, 그렇게 이리저리 떠다녔다.
'뿔테를 좋아했던가?'
스스로에게 묻던 라희는 이내 미간을 좁혔다.
일단, 호감은 있었다. 아무리 자존감이 땅바닥에 곤두박질쳐 무력했어도 아무런 호감도 없는 상대와 몸을 섞을 수는 없다. 안보면 보고 싶고 뭐든지 같이 함께하고 싶은 그런 적극적인 감정이 아니라. 다가온 그가 어색하고 거북하지 않은 정도의 수동적 호감. 라희에게 뿔테는 그저 나쁘지 않다는 정도의 딱 그만큼의 상대였다. 당시는 호감이 있는 상대였기에, 매몰차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성격 탓이겠지.'
라희는 자조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어릴 때부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성격 강한 오빠에게 억눌리듯 살아서 싫은 내색 하지 못하고 숨죽이던 버릇이 굳어진 성격.
라희는 눈을 질끈 감고 윌버리 하우스에서 다리 위 커다란 짐승을 앞두던 그때를 떠올렸다. 처음 실감한 죽음의 공포. 그날 이후 결심한 일. 죽기 직전, 온통 후회뿐인 삶을 살지 않겠다고.
'과거는 바꿀 수 없어.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미래는 있는 힘껏 바꿔보려 노력할 거야.'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라희는 환한 등 밝힌 갤러리 유리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결자해지.
이제, 내일을 향한 꼬인 매듭을 풀어 정리할 시간이었다.
***
바흐의 뒤를 따라 갤러리를 뛰쳐나갔던 라희는 실내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모두의 시선을 깨끗이 무시하고서 뿔테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
"자기?"
뿔테가 의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올리며 물었다. 라희는 그런 그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가죠."
"어디로?"
라희는 턱 끝을 치켜들어 저 앞에서 유진과 대화 중인 뿔테 아버님을 가리켰다.
"아버님께로요."
손목을 붙잡고 앞서 걷는 라희를 따라 뿔테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걸었다. 유진은 이내 둘을 발견하고서 대화를 멈추고 입가를 늘여 웃어 보였다.
"라희씨. 참 잘 어울리는 거 알아요? 두 사람요."
유진은 라희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빛과 달리 교양있고 사교적인 말투로 말을 마쳤다. 뿔테 아버지답게, 키와 등치가 똑 닮은 민중은 바로 앞에 멈춰선 라희와 유진을 번갈아 보면서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유진씨와 라희양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세상은 정말 좁군요."
"그렇지요? 회장님. 저는 이렇게 우연한 만남으로 인연이 닿는 일을 몇 번 겪어보면 정말 운명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답니다. 이 두 사람처럼요. 운명처럼 만나야 할 사람들이니 이 뉴욕 한복판에서 서로를 마주한 것 아니겠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뿔테와 바흐를 두고 저울질한다며 만면에 조소를 가득 담은 채 비꼬던 유진이었는데, 민중을 앞두고서는 두 사람이 마치 천생연분인 양 포장하며 살살거려 말하는 꼴을 보니 어쩐지 우스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인 강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일까? 대신 약자에게는 가차 없다던 제프의 평가가 뇌리에 떠올랐다. 라희는 유진에게 항상 약자였지만, 이렇듯 굳건한 강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이성이 남아 있는 이상 단둘이 있을 때처럼 품위를 잃고 광분해 날뛰거나,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성싶었다.
"그 운명에 대해서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앞에 가만 서 있던 라희가 갑자기 입을 열자, 유진의 눈매 끝이 가늘게 좁혀졌다. 라희를 바라보는 민중의 눈빛에도 희미한 호기심이 어렸다. 라희는 잡고 있던 뿔테의 손목을 놓아주고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물론 여기 계신 두 분 모두 짐작하셨던 일이고, 알고 계신 일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여기. 정선우 씨와."
다음 말을 하려 막상 입을 열려니 입술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꼭 해야 했다. 뿔테의 아버지인 민중이 자리한 지금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할 때였다. 라희는 다시한번 깊게 숨을 들이쉬고서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내뱉었다.
"육체적으로 깊은 관계였어요. 작년 여름에 우연하게 성관계를 가졌죠."
선언이었다. 여성으로서 낯부끄러운 치부의 공개선언. 순간, 라희를 향해 쏘아지는 유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라희가 직설적으로 뱉은 당돌한 말에, 민중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말을 꺼냈다.
"허어. 그렇군요. 둘다 혈기 왕성한 20대니. 하지만, 요즘 세상에 사랑하는 연인끼리 관계를 갖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고.."
라희는 민중의 말을 자르며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충분히 이상한 일이에요. 아버님. 제게 선우씨는, 연인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당시 만나고 있던 사람은 선우씨가 아니라 조금전 갤러리에서 나간 키 큰 남자였어요. 한진욱씨요."
라희의 입에서 바흐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진의 미간이 잔뜩 몰리면서 속눈썹이 날카롭게 치떠졌다.
"음.."
라희의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긴 민중은 섣부른 말 대신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전에 유진에게 들었다. 뿔테의 아버지 민중은 바흐가 계약해 살고 있던 오피스텔의 건물주. 당연히, 자신의 건물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는 바흐를 모를리가 없었다.
"그것 참."
민중은 짧은 말을 흘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뿔테는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생각을 고르는 듯한 표정의 라희를 내려다보며 무슨 말이 흘러 나올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진욱씨를 만나고 내려오던 엘리베이터였어요. 당시, 큰 다툼이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었죠."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실제 사실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바흐는 그 누구에게도 라희와 계약한 내용을 발설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두 사람외 유일하게 계약에 관해 알고 있는 이는, 계약서를 작성했던 변호사. 변호사는 고객의 기밀 유지 의무가 있으니 말할리 만무하고. 이점에 착안한 라희는 적당히 계약 내용을 연인관계로 바꿔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20층에서 선우씨가 타 더군요. 별 관심 없이 앞을 보고 1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우씨가 갑자기 절 구석으로 몰며 끌어안았어요. 소리치지 못하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고요. 다시 엘리베이터는 20층으로 향했어요. 그뒤 선우씨 오피스텔로 끌려갔었죠. 그리고 거기, 현관에서 서서 관계를 가졌고요."
거기까지 들은 민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민중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아들인 뿔테를 노려보았다. 뿔테는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말은, 우리 애가……."
노기어린 낮은 음성. 라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네. 강간이었어요."
강간이라는 말에, 민중의 눈이 부릅떠졌다.
"선우야. 말해봐라. 방금 라희양이 한 말이 사실이냐?"
"........."
뿔테의 시선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아무런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쏘아보는 민중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분노와 흥분을 억누르느라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는 민중을 힐끗 본 유진이 붉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전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이네요. 라희씨.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왜 그 당시 신고를 바로 하지 않고 후에는 같이 어울려 다녔느냐에요."
민중의 핏발선 눈이 라희를 향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지는 곧은 시선. 라희는 겉보기에 청순하고 순수해 보인다는 스스로에 대한 외모 평가를 뇌리에 떠올렸다. 바로 눈을 아래로 살짝 내리뜨고서 입술을 망설이듯 살짝 깨물고서는 다시 눈을 들어 민중에 시선을 맞췄다가, 고개를 돌려 어찌할 줄 몰라하며 서 있는 뿔테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엄청난 고민 끝에 내린 결론같이 보이도록.
"그게.."
라희는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숨을 짧게 내쉬고 말했다.
"선우씨가 착해서요. 그런 일을 충동적으로 저질렀지만, 행실이 반듯해서 평소 그럴만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일이 있은 후 선우씨가 곧바로 사과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신고는 차마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저 역시 성경험이 처음은 아니어서 그날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요."
라희가 내뱉은 말이 조금 의외였는지 잔뜩 일그러졌던 민중의 표정이 잠시 흐트러졌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착하다는 말에 불쾌해하겠는가. 거기다, 강간범으로 몰릴뻔한 상황인데도 착하고 반듯해서 용서해주었다는데. 민중은 여전히 노기 띤 얼굴이었지만, 황소처럼 격하게 몰아쉬던 숨소리는 점차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조금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저기, 선우씨."
라희가 작게 부르자, 뿔테는 아래로 향한 눈을 옆으로 곁눈질해 라희를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제가 먼저 연락한 적 있었나요?"
"........."
당연히 대답할 수 없을 거였다. 그 뒤에 이어질 질문 모두. 라희는 계속해서 물었다.
"선우씨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은요?"
"........."
"선우씨가 사는 집에 방문하거나, 직장에 찾아간 일은요?"
"........"
뿔테는 평소 활발하게 이야기하던 모습과 달리, 이글이글 화가 난 아버지를 앞에 두자 독 안에 든 쥐처럼 심리적으로 잔뜩 위축된 상태였다. 라희는 입을 다물고 미간을 내리 좁혔다가 민중을 향해 눈을 들었다. 어차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뿔테를 라희쪽에서 어찌 제어할 수는 없다. 이 상태로 내버려 두면, 그전처럼 라희의 말을 무시할 것이 뻔했다.
어찌해야 뿔테를 제어할 수 있을까 골몰하다가 지난번 필경재에서 뿔테가 유난히 아버지께 공손하게 대했던 사실과, 깐깐한 뿔테 어머님조차도 아버님의 질책에 바로 순종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라희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 내 일은, 가족에게 맡기면 될 터. 집안 전체가 공경하는 뿔테 아버님이 이 일의 적격자였다.
민중과 눈이 마주친 라희는 눈을 다소곳하게 내려뜨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그날 인사드리러 간 날도 저는 그런 자리인 줄 모르고 갔었어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진욱씨와 크게 다투고서 제 감정이 뭔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상태에서 선우씨가 적극적으로 다가오니까, 갑자기 뭔지 모르겠는 거에요. 하지만, 결국 진욱씨와 다시 화해했고요. 그래서 당연하게도 인사드린 날 다음날부터 선우씨와는 일체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희는 뿔테를 흘깃 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이렇게 선우씨를 갤러리에서 만나서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지난번 현대 미술관에서 아버님을 뵈었을 때 저희 관계가 끝났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닌 것 같아서 미뤘는데, 오늘 어쩔 수 없이 껄끄러운 말씀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민중의 표정에 불쾌함이 가득 스쳤다. 뿔테는 아래로 향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불편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의에 의한 불행은 오빠 일로도 충분했다. 뿔테를 비참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뒤틀리고 비틀리고 엇나갔던 이쪽 운명을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서니까. 라희는 조심스럽게 민중의 안색을 살피며 덧붙였다.
"선우씨와, 저. 지난 가을에 그렇게 짧게 끝난 관계에요. 그러니 어머님께 이런 일로 심려끼쳐드리기도 가당찮구요. 아버님. 선우씨와 저 다시 만날 운명이 아니에요. "
민중은 쐐기를 박아 온점을 찍는 듯한 라희의 말을 들은 민중은 천천히 숨을 억눌러 내쉬면서 입을 진중하게 열었다.
"우리 선우가 라희양에게 큰 실례를 끼친것 같군요. 못난놈을 둔 아비된 도리로서 대신 사과합니다."
라희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그 모습을 가만 살피던 민중은 마침내 참을만큼 참았다는 듯, 험악하게 얼굴을 굳히고서 뿔테를 향해 노기땐 음성으로 낮게 소리쳤다.
"이만 가자. 선우. 따라와라."
먼저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 갤러리를 나서는 풍채 좋은 민중의 뒤를 뿔테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따라 걸었다. 앞으로 걸어가면서 라희쪽을 바라보았지만, 라희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에서야 말했지만, 실은 오래전에 마무리했어야할 관계였다. 아마도 작년 가을, 얼떨결에 인사드리러 간. 그날. 가족들 앞에서 끝냈어야할 인연.
해야할 일을 미뤄두었다 한 것이라 생각해도, 계속 마음 한구석이 돌을 얹은 듯 무거웠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어 하지 않은 태생적 우유부단함 때문일거다.
아래로 내리뜬 라희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떠졌다. 정신을 차려야했다. 계속 이렇듯 영양가 없는 감상에 빠져 시간을 허비할 여유는 없었다. 뿔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한 사람의 일이 마음속에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있으니까. 저기, 저 갤러리 유리문을 젖히고 나간 바흐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뿔테를 해결했으니, 이제 저 먼 맨해튼의 길거리 속으로 택시를 타고 사라진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했다. 그때였다.
"제법인데?"
귓가를 찔러오는 뾰족하고 냉소적인 목소리. 라희는 고개를 돌려 눈매를 올리고 서 있는 유진을 쏘아보았다.
깜빡 잊을 뻔 했다. 이유진.
뿔테 다음 암초는 너.
"덕분에요. 언니."
라희는 싸늘하게 말하며 한쪽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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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