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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63화 (16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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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라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미간을 조금 찡그리는 척하다가 입매를 살짝 올렸다.

"제안이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다지 머리에 남는 내용은 아니었나 봐요."

제프는 뻔뻔한 웃음기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요? 이런. 다시 한 번 기억을 상기시켜 줄까요?"

"해봐요."

라희의 대답에 제프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5억. 이제 기억나요?"

"푸."

라희가 입매를 늘어뜨리며 보란 듯 바람 빠진 실소를 흘리자 제프가 약간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쪽. 여자친구 없죠?"

질문을 받은 제프는 시큰둥하게 눈동자를 두어번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는 없죠. 비공식적이라면 뭐."

"없을 만 하네요. 길어야 삼 개월이라고 했나요?"

으흠, 제프는 입술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긍정했다. 라희는 속눈썹을 일부러 아래로 내리떠서 벽에 걸린 그림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 그림들요. 전부 완판된 거 알죠?"

"그럼요. 혜영 누님이 주말 동안 귀가 따갑게 자랑을 해대서 아주 잘 알고 있죠."

어서 말을 해보라는 듯, 삐뚜름한 시선을 보내는 제프를 향해 라희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선점된 그림을 가지려 아무리 가격 제시해봤자,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일 텐데요?"

라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야, 그림은 계약으로 팔렸으니 취소하고 싶다면, 위약금 물고 더 높은 가격을 부르면 되죠. 상대가 사람이라면 흡족케할 금액을 제시해서 마음을 움직이면 될 일이고요. 내가 가진 건 보다시피 돈뿐인데다가, 말했잖아요? 그렇게 한 사람에게 매여 있다가는 언제 배신당할지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그 쪽에게도 백업이 있는 편이 이득이에요. 그러니 불러봐요. 얼마를 원해요?"

제프는 싱글 웃으며 물었다.

"말했잖아요? 그쪽 외모가 취향이 아니라고. 그리고 삼 개월이 아니라, 삼분도 옆에서 버티기 힘들거든요. 말귀 못 알아 듣는 남자 딱 질색이라서요. 평소 싫은 내색 못하는 내가 이럴 정도니 그쪽이 여자친구가 없을 수밖에요."

라희는 제프 향해 싸늘히 말했다. 입술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라희는 그대로 제프를 지나쳐 전시실 출구로 보폭을 늘리며 걸어나갔다. 이내 뒤따르는 제프의 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슬쩍 돌려 짜증스럽게 말했다.

"왜 따라오는데요."

"그쪽 따라가는 거 아닌데요. 그리고 싫은 내색 엄청 잘하거든요? 그쪽."

제프는 1전시실에서 혜영과 함께 서서 이야기 나누고 있는 캐서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라희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려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 그러네요. 실례했어요. 매가 고파서 누님께 맞으러 가는 지도 모르고. 멋대로 착각했네요."

제프는 빙글 소리 없이 가볍게 입매를 올릴 뿐이었다.

1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캐서린이 먼저 라희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말을 건넸다.

"주말동안 무슨 좋은 일 있었니? 표정이 변했다. 얘."

"그래요?"

"응. 얼굴이 펴서 생기가 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야. 혜영이가 좋아하는 비련미는 이제 풍기지 않네. 대신 나나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활기찬 분위기라서 마음에 들어. 참, 우리 그이 본적 없지?"

캐서린의 남편을 만난 적은 없었다. 라희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캐서린은 손목을 위로 시계를 힐끗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서 입매를 한껏 끌어올려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곧 올 시간이야. 퇴근하고 들르기로 했거든. 놀라지 마. 엄청 잘생겼어."

"어휴, 주책은. 누나, 매형보다 내가 더 잘생겼거든?"

옆에 서 있던 제프가 못마땅한 어투로 끼어들자, 캐서린은 가차 없이 팔꿈치로 제프를 깊게 쿡 찔렀다.

"이런 심해 어류 상판과 비교도 되지 않게 멋지니까. 기대해. 저쪽에 걸린 한 200퍼센트 미화된 재하씨 자화상보다도 훨씬 나아."

"그래, 좋겠다. 미남 남편 둬서."

혜영 역시 툴툴거리며 핀잔을 주었음에도, 캐서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자신의 남편인 크리스토퍼가 얼마나 잘생기고 어찌나 자상한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라희는 제프로부터 매형이 캐서린에게 꽤 오랜 시간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었기에, 그녀의 스스럼 없는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눈을 반짝이며 남편 자랑을 늘어놓는 캐서린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 시작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 캐서린은 그야말로 남편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제프가 지난번 언급한 내용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캐서린과 라희의 성격유형이 비슷하다던.

'그럼 설마 나도?'

화끈, 갑자기 얼굴에 더운 기운이 스쳤다. 만약, 제프가 두 사람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렸다면. 아마도 지금 이 모습이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 될 거 같아서, 순간 낯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솟구쳤다.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희가 조금 어색하게 얼굴을 붉히자, 캐서린은 문뜩 말을 멈추고서 손을 들어 멋쩍은 듯 입을 가렸다.

"어머, 내가 또. 나도 모르게 오버해서 남편자랑에 몰두했었나 보네."

"남편이 그렇게 좋니? 증상이 이 정도면 약이 필요할 지경이다. 얘."

혜영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제프가 어느새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각각 손에 들고 와 덧붙였다.

"세디티브(sedative:진정제)와 트랜퀄라이저(tranquilizer: 안정제). 어떤 거로 줄까, 누나?"

캐서린은 제프 손에 든 레드와인을 채가며 혜영을 향해 오만하게 미소 지었다.

"니가 결혼 전이라 그래. 아줌마들 만나면 맨날 남편이야기, 자식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아직 자식이 없으니,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니? 너도 듣기 억울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아 봐. 입만 열었다 하면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질 거니까."

"그점은 동의할 수 없어. 누나."

화이트 와인잔을 기울이던 제프가 뾰족하게 끼어들었다.

"누나와 매형이 조금 특이한 케이스지. 성급하게도 결혼식과 함께 이별하는 커플도 심심찮게 보일뿐더러, 결혼 5년 뒤, 길게 버티면 10년 뒤에 애정이 식어서 헤어지지 못해 살다가 다른 이성이 눈에 들어오면 결혼생활 정리하는 게 이쪽 패턴이라고. 그러니 다들 재혼은 기본이고 삼혼, 사혼, 심하면 기네스북에 오를 기세로 맹렬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거지."

"관심과 지조가 없어서 그래."

캐서린이 차갑게 대꾸하자 제프는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맨해튼 평균이 재혼인 거 보면, 그건 아니라고 봐. 오히려 누나와 매형도 좀 더 지켜봐야 한달까."

"너, 그러다 사람들 앞에서 모냥 빠지게 맞는다. 죽도록."

캐서린이 주먹을 말아쥐고 경고하자, 제프는 한 손바닥을 앞으로 펼쳐 보이고는 악의가 전혀 없다는 포즈를 취했다.

"네네."

"요게, 천사 같은 매형의 하늘 높은 은덕을 악담으로 갚으려고."

마치 톰과 제리 같이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라희는 왜 제프가 왜 좀 전 혜영의 결혼에 대해 식장에 들어가 예식이 마치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는 둥, 백업이 필수라는 둥 회의적으로 지껄였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저쪽 평균이 재혼이라잖은가. 라희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어머, 혜영씨."

어깨 뒤에서 꾸민듯한 억양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티격태격하던 제프와 캐서린이 라희의 어깨너머를 힐끔거렸고, 순간 제프의 입매가 비틀어져 늘어지는 것을 본 라희는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유진은 라희의 뒤쪽에 서 있었다.

"어머! 유진 씨. 그렇지 않아도 아까 전까지 갤러리에 계시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찾아보던 중이었는데. 밖에 나가셨군요."

혜영이 반갑게 이야기를 건넸다. 뒤통수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굳이 이런 곳에서 껄끄러운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앞을 보며 무시하고 있는데, 마치 의도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유진이 높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꼭 소개시켜 드릴 중요한 분이계셔서요."

유진의 눈짓을 받았는지, 혜영은 구석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재하를 향해 손짓했다. 이내 주위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재하가 혜영이 서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라희는 그대로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다른 전시실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진로를 방해하려는 듯, 재하를 향해 한발 앞서 걸어 나온 유진의 모습이 바로 앞에 보였고 그뒤 를 이어 모습을 드러낸 신형을 보고 숨을 짧게 들이켰다. 낯익은 얼굴. 키가 크고 풍채 좋은 중년 남자.

유진은 재하를 보며 입매를 올리고서 소개를 시작했다.

"이쪽은 제가 말씀드린, 런던 왕립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이번 뉴욕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시한 유재하 작가님이세요. 그리고 이분은, 재하씨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정민중 회장님이세요. 그리고."

유진은 우아하게 턱을 뒤로 비틀어 라희의 옆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바로, 창백하게 굳어 있는 라희와 시선이 맞부짖친 유진은 눈매를 날카롭게 빛냈다. 그리고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붉은 입술 한쪽을 비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드님이신 정선우씨에요."

정선우. 이름을 듣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멈춰버린 듯 했다.

'뿔테? 그가, 왜 여기에.'

이제 어쩔거냐, 떠 보는 듯한 유진의 가늘어진 시선. 그런 유진을 똑바로 쏘아보다가 시선을 거둔 라희의 고개가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천천히 옆으로 비틀어졌다.

라희가 굳어 서 있는 두어 걸음 앞쪽으로 유진의 소개말을 듣고 한걸음, 앞으로 나와 재하와 웃으며 악수하고 있는 키 큰 남자. 낯익은 얼굴. 곱상하고 지적인 분위기. 그리고 검은색 뿔테 안경.

"뵙게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재하와 악수를 마친 뿔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라희를 똑바로 직시했다. 마치 처음 부터 그러고 있었다는 듯이. 욱씬. 심장이 옥죄여든다. 가슴이 조이듯 뻐근하게 아파왔다. 그럼, 좀전에 뒷덜미로 따갑께 쏟아지던 시선의 주인공은 유진이 아니었단 말인가.

"흐음."

라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뿔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제프의 눈매 끝이 살풋 가늘어졌다.

"라희야."

키카 큰 뿔테가 위에서 라희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흠칫.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 선우씨."

라희는 크게 뜨여진 눈을 뿔테에게 고정한 채 달싹이며 입술을 작게 벌렸다. 낮은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와 흩어졌다. 그때, 재하와 민중의 사교적인 인사말을 듣고 있던 유진이 입매를 가늘게 끌어올리며 라희쪽을 눈짓하며 말을 건넸다.

"아, 맞다. 라희씨, 반가워요. 여기서도 뵙네요."

"라희양."

민중이 라희를 발견하고서 반갑게 인사했다. 라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두분 말씀 잠시 나누고 계세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여유로운 표정과 느긋한 발걸음으로 라희앞에 다가온 유진이 멈춰 섰다. 얼어붙은 듯 뿔테에 고정 되어있던 눈동자가 뿔테 옆에 서 있는 유진을 향했다.

"어? 서로 아는 사이니? 라희야."

혜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때, 무언가 더 말을 건네려던 헤영을 제프가 눈짓하며 붙잡았다. 혜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희와 함께 서 있는 유진 그리고 뿔테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악취미인데요. 이유진 씨."

라희가 싸늘히 말하며 눈을 치켜떠 쳐다보자 유진은 냉소를 보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고. 업무상 아버님께서 머무시는 호텔에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선우씨가 받아서 말이야. 그렇죠? 선우씨."

"네. 그랬죠."

뿔테가 라희를 내려다보며 짧게 대답했다. 바로, 유진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지난번 모마에서 아버님과 마주쳤다면서? 그 소식을 듣고 선우씨가 이곳에 왔다고 하던데. 따지고 보면, 네 쪽에서 미리 예상했어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종적을 감춘 애인이 뉴욕에 있다고 확인되면, 어느 남자건 필사적으로 찾으러 올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 라희 네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다고 전해 들어서 말이지."

유진의 시선은 라희를 싸늘히 노려보다가 천천히 어깨너머로 향했다. 라희는 시선을 비낀 그녀를 더욱 노려보았다. 뿔테는 유진이 말을 마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우리 교제 허락하셨어."

"네?!"

라희가 날카롭게 되묻자, 뿔테는 눈매를 내리 좁히며 라희를 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역시, 유진과 마찬가지로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 살짝 비킨 채였다.

"이제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거든. 안쪽에 계신 아버지는 인사드린 첫날부터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 어머니가 한동안 반대가 심하셨지. 자기가 떠나 있는 동안, 전에 인사드리러 찾아뵈었을 때 그 자리에서 실수 하셨다는 거 드디어 인정하셨어."

뿔테는 눈매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진짜 전혀 몰랐어. 자기가 그 다음 날 형수랑 따로 만난 사실. 그리고 형수가 멋대로 오해해서 상처 주는 말한 거. 정말, 하늘에 맹세코 추호도 몰랐어. 알았다면 그날 자기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거야. 그랬더라면, 우리 이렇게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돌아가서 충주 부모님 모시고 정식으로 상견례 하자. 아버님, 어머님 모두 날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

인사, 그리고 상견례? 이건, 지난가을 악몽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뿔테가 꺼낸 성급한 말을 들은 라희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선우씨. 우리..."

라희가 꺼낸 말을 끊으며 선우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괜찮아. 지난 일은. 자기가 이렇게 미국에 있다는 것도 충주 어머님이 지난번에 알려주셨었는데 어느 도시인지는 모르겠다 하셔서 막막했었어. 그런데 이번 달 초에 아버지가 뉴욕에서 자기 만났다고 알려주셨고. 그 길로 뉴욕에 와서 자기를 찾으려고 했는데 마침 유진 선배 전화가 호텔로 걸려와서, 여기 오게 된 거야. 나, 그날 자기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믿어."

난감했다. 복잡한 머리가 으깨지는 듯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말로 이해시켜야 하는가. 라희가 미간을 내리 좁히며 뿔테가 꺼낸 말을 정정하며 조목조목 대꾸해 반박하려하는데, 갑자기 주위를 둘러싼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상한 느낌은 뭘까.

라희는 눈을 들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줄곧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자신을 향해 진득한 시선을 보내는 거로 생각했는데, 라희 앞쪽에 서 있는 혜영과 제프, 그리고 캐서린이 모두 라희의 어깨너머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역시 뿔테와 유진의 초점도 라희의 어깨너머에 맞춰져 있었다. 뒤쪽은 갤러리 입구였다. 혹시, 퇴근 후 갤러리로 온다던 캐서린의 남편이라도 모습을 드러낸 걸까. 하지만.....

그때였다. 순간 싸한 느낌이 팍 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불길한 느낌이 쭉 뻗쳐올라 왔다. 불현듯 솟구쳐 오르는 어떤 예감. 아주, 섬뜩한.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갑자기 팟, 하고 머리속에 떠오른 사실. 퍼뜩, 정신을 차린 라희가 급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라희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마치 고장 나 부서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

거기. 그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당황한 표정으로. 갤러리 입구 앞에 굳어 서 있는 바흐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던 걸까.

"어머. 욱."

유진은 마치, 지금에서야 바흐를 발견했다는 듯 입매를 올리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 정말 몰랐는데. 마침 잘됐어. 여기, 정식으로 꼭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

유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뿔테를 향해 눈짓을 흘리며 말했다. 바흐는 그대로 우뚝 멈춰 서서 이리저리 서늘한 검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를 향해 날카로운 미소를 흘리는 유진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곧게 쏘아보는 뿔테,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흥미로워하는 제프, 그리고 얼어붙은 눈동자로 미동도 없이 응시하고 있는 라희.

"아마 구면일 거야, 정선우 씨. 지난해 나영 생일파티에서 서로 얼굴 봤었잖아? 기억나?"

유진이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숨죽인 라희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그는 멈칫, 하면서 다가오려 하는 듯 하다가, 무언가 불쾌한 듯, 갑자기 눈매를 팍 좁히더니 몸을 휙 돌려 갤러리 입구 문을 밀어젖히고 나가버렸다. 그 순간, 이성이 뚝 끊어졌다. 암전. 눈 앞이 캄캄했다.

"바....., 진욱씨!"

문앞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본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바흐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다급하게 뒤쫓아 나갔다. 무거운 유리문을 젖히고 갤러리 입구를 나와 빠르게 좌우로 고개를 돌려 어스름이 내려앉은 도시의 밤거리에서 바흐를 찾아 헤맸다. 그때, 저 앞쪽, 길가에 멈춰선 택시에 올라타는 바흐가 똑똑히 보였다. 눈이 부릅뜨였다.

"진욱씨!"

날카롭게 갈라져 터져나오는 목소리. 라희가 그쪽으로 달려가며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굳게 문 닫힌 택시는 이내 출발해 가로등 밝은 환한 거리 속으로 멀어져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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