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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
다시 시끄러운 헬리콥터 안.
헤드폰조차 쓰지 않아 귓가를 요란스레 어지럽히는 프로펠러 회전음과 각종 기계음이 들린다. 하지만, 이 시끄러운 소리가 그다지 거슬리지 않다. 아마도 어깨를 감싼 안아 묵직하게 눌러오는 감촉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함께라서 그런 걸까. 창문 아래로 어두운 숲과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만, 무섭거나 두렵지 않다. 더 없이 안정되고 편안한 기분.
라희는 고개를 기댄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그가 시선을 느낀 듯 라희를 향해 비스듬히 눈을 내렸다. 바흐와 눈이 마주치자, 라희는 입매를 끌어올려 작게 웃어 보였다. 그도 답례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정말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건지, 어제 아침 맨해튼에서 사우스 햄턴으로 향할 때만 해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맨해튼으로 다시 돌아갈 때는 바흐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그것도 그의 품에 안기듯, 어깨에 고개를 붙이고 기댄 채로. 라희는 조금 몸을 움직여 코트 자락 안쪽 그의 가슴팍으로 깊숙이 기댔다.
빳빳한 셔츠 아래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가진 그의 품이 포근해서, 라희는 가만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는 정말 빠르게 흘렀다. 시작부터 한낮이었기에 더 짧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오가 지난 시각. 일어나자마자, 짜디짠 샌드위치로 시작된 하루. 바흐와 함께 식당을 나오자 바로 앞에 놓여있던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눈에 띄었기에, 라희는 어젯밤 들었던 곡을 다시 한번 부탁했다. 햇살 포근한 오늘 날씨와 똑 닮은, 맑은 날이 연상되는 산뜻하고 감미로운 선율이 듣고 싶었다.
라희의 요청을 들은 바흐는 선선히 피아노에 앉아 곡을 연주했다. 건반 위를 부드럽게 오가는 그의 손가락이 마법처럼 멋진 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딘지 콕 찍어 말할 수 없이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멜로디의 곡이었지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라희는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보면서 어젯밤 들었던 곡과 지금의 곡을 비교해보았다. 어제는 마치 침묵이라는 여백을 채우듯 느리게 흐르는 곡이었다면, 오늘은 좀 더 빠르고 경쾌했다. 마치 밝은 햇살 쏟아지고 청명한 바람이 부는 푸릇푸릇한 여름날의 가벼운 산책 같았다.
오 분 남짓한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라희를 향해 그가 궁금해하던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답을 말했다.
"어제는 하프템포(half tempo: 1/2의 빠르기) 였어. 지금 들은 템포가 원곡이고. 이전 신청곡이 빠른 듯한 곡이었기에."
"무슨 곡이에요? 곡명이 궁금해요."
라희의 물음에, 그는 대꾸 없이 입매만 슬그머니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쉽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자작곡인가요?"
"아니."
그는 더이상 묻지 말라는 듯, 라희의 정수리 위로 손가락을 얹고 가볍게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라희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뭔가 곡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 추가적인 질문을 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바로 입술을 뜨겁게 덮쳐오는 진하고 농밀한 키스에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넘나드는 감미로운 감각에 빠져든 사이, 자연스레 살과 살이 맞대어졌고, 지독한 쾌락과 열락속에 사르르 녹아버릴 듯이 젖은 살이 섞여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가 훌쩍 저너머 수평선 아래로 아득히 가라앉아버렸다.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질 무렵, 라희가 지친 몸을 씻는 사이, 그가 주방에서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작은 방울토마토 같은 싹 양배추와 큼지막하게 깍둑썰기한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토마토 스파게티는 걸쭉하고 묵직하면서도 새콤달콤 맛있었다. 양파와 마늘은 씹히는 감촉도 느낄 수 없이 잘게 다져 샛빨간 소스에 녹아있어서, 스파게티를 포크 끝에 감아 한입 후루룩 흡입하면 감칠맛 나는 양파 특유의 단맛과 마늘의 진한 풍미가 혀를 즐겁게 했다.
식후 디저트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까지 먹고 나서, 바흐는 이내 뒷정리를 시작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내내 얻어먹기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던 라희가 나서며 말하자, 싱크대 아래 식기세척기 안으로 지저분한 음식 접시를 차곡차곡 가져다 넣던 바흐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이렇게 세척기 돌려놓으면, 내일 관리 업체에서 와서 알아서 정리할 거야."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라희는 이내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장실 문을 활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자연스레 미간을 찡그렸다. 겨우 포장만 뜯다시피한 음식재료들이 남아 있었는데, 어제 그가 말했던 말들을 종합해본 결과 이곳 별장은 여름 전용이었다. 북적이는 여름이 아닌, 한적한 겨울이면 바흐 외에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다. 고로 남은 음식물은 이대로 두면 썩고 부패할 테고, 떠나기 전에 빨리 정리해야 했다.
"남은 식재료들은 어떡하죠?"
"호텔에서 먹을 게 아니라면, 유통기한이 짧은 것은 전부 버리고 가야겠지."
가지고 가서 먹을 거냐는 그의 표정에 라희는 남아 있는 과일 팩을 가리켰다. 과욕을 부려서인지,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저것만요."
바흐는 이내 싱크대 선반에서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나와서 냉장고에서 꺼낸 과일 팩을 담아 라희에게 건넸다. 라희가 그것을 들고 있는 사이, 바흐는 거실과 주방에 어지러이 널려 있던 쓰레기들을 품목별로 옮겨 담기 시작했다.
샴페인 병과 술병은 술병대로, 오렌지 주스 패트는 과일이 담겨 있던 플라스틱 용기와 한데 모아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먹다가 만 식빵과 남은 달걀, 채소 등은 따로 싱크대 아래 분쇄기에 넣고서 스위치를 올렸다.
"미국은 분리수거 하지 않잖아요?"
그동안 뉴욕에서 지낸 얕은 경험으로 라희가 확인하듯 묻자, 그가 가지런히 놓인 검은색 봉지에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습관이라서."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확인하고서 라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방 챙겨서 나가지."
그렇게 늦은 저녁, 짐을 챙겨 콜택시를 타고 나와 헬리콥터에 올랐다. 바흐는 당연한 듯 그의 맞은편에 앉으려는 라희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의 옆에 앉게 했다. 이내 헬리콥터가 밤하늘을 날아 맨해튼으로 향하자, 그가 휴대폰 스케줄러를 확인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은 늦게까지 회의가 있어. 저녁 시간이 지나서 끝날 거야."
머리에 쓴 헤드폰으로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내일? 내일은 혜영과 약속한 월요일이다.
"월요일은 오후 늦게 소호에서 칵테일파티가 있어서 괜찮아요."
"칵테일 파티?"
바흐는 조금 의외라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네. 아는 언니 약혼자분께서 이번에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오프닝 파티에 초대받았거든요."
순간, 그의 짙은 눈빛이 라희를 향해 따갑게 쏟아졌다. 라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말을 시작했다. 런던 민박집에서 혜영을 만난 일과, 그녀의 도움을 받아 사라 아주머니 집에 홈스테이를 하게 된 경위. 그리고 뉴욕에 와서 우연히 센트럴파크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 이야기까지.
시끄러운 헬리콥터 소음 속에서 머리에 끼고 있는 헤드폰을 통해 또렷이 들릴 수 있도록 주의 깊게 발음하며 보통보다 약간 느린 속도로 천천히 말을 하는 동안, 그는 가만 들으며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럼, 지난번 미스터 조와는."
고모님의 집에서 제프를 지칭하는 바흐의 말에, 라희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제프요? 혜영 언니의 절친한 친구인 캐서린 언니 동생일 뿐이에요."
"흐음."
잠시 미간을 내리 좁히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바흐는 라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 L 갤러리라면, 소호에서 꽤 유명하고 마침 나도 아는 곳이니, 될 수 있으면 시간 내볼게."
"바쁘실 텐데, 그럴…."
마치 습관처럼, 거절의 말을 뱉던 라희는 이내 자신을 곧게 쏘아보는 바흐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자, 아차 하는 생각이 확 밀려들었다. 가뜩이나 바쁜 일정에서 일부러 배려하느라 말을 꺼낸 것일 텐데, 이렇듯 별거 아닌 것처럼 거절하면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을 거 같았다. 라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고쳐서이었다.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고모님 댁을 제외하고는, 칵테일파티가 처음이라서 조금 걱정되었거든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지. 라희의 말을 들은 그는 조금 굳었던 표정을 풀고서 어깨에 쥔 손에 힘을 주어 라희를 꽉 끌어안았다. 라희는 헤드폰을 벗고서, 고개를 그를 향해 기울여 기댔다. 코끝에 가득 스미는 그의 체향과 기대고 있는 묵직한 육체의 품이 든든해서 기분 좋았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라희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덧, 칠흑 같았던 헬리콥터 아래로, 문명을 상징하는 가로등 빛이 하나 둘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뉴욕주 교외지역의 전경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자, 마치 고만고만한 평지 한가운데 우뚝 솟은 높은 산맥처럼, 별세계 같은 빽빽한 고층빌딩 숲이 뿜어내는 찬란한 야경이 일렁일렁 너울지며 펼쳐졌다. 저 멀리 건너다보이는 익숙한 풍경. 맨해튼.
"어디로 가나요?"
고개를 든 라희가 묻자, 바흐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당분간은 다시 세인트 리지스에서 묵어야겠지."
당분간, 이라는 단어를 듣고서 저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졌나 보다. 라희의 가라앉은 안색을 가만 살피던 바흐가 입을 열었다.
"왜."
그의 나직한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라희는 입매를 길게 끌어올려 밝게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바흐의 눈길을 마주하자, 지금은 머릿속 복잡하고 어지러운 생각들을 모두 저 멀리 보이지 않도록 제쳐놓고서 이대로. 잠시만,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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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진하진님 생일 축하드려요 ^_^원고료쿠폰 그리고 후원쿠폰 투척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