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60화 (16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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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담요처럼 감싸는 묵직한 체온. 뺨 아래 느껴지는 보드랍고 기분 좋은 살결. 그의 품 안이다. 팔베개를 베고서, 그와 함께 침대에 길게 누워 있다. 알몸에 닿는 뽀송뽀송한 시트의 감촉이 피부에 감긴다.

부지불식간에, 라희는 고개를 조금 비틀어 움직여 그의 팔 안쪽 살결과 닿아있는 볼을 살짝 부볐다. 부드럽다.

피부와 닿는 살갗. 은은한 향.

그의 몸에서 기분 좋은 체취가 풍겨 나와 콧속 가득 스몄다. 사락. 고개가 움직이면서 머리카락이 쓸리는 소리가 귓가를 달콤하게 간지럽힌다. 전신에 닿는 맨질맨질 보드라운 따스한 체온. 좋다.

라희는 바흐의 품 안에 얼굴을 묻고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코를 타고 몸 안 깊이 배어드는 은은한 체향.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온 더운 숨결이 그의 품 안에 갇혀서 옅게 흩어지며 뺨을 간질였다.

언제쯤일까. 가볍게 감긴 눈두덩이 위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맑은 날. 어젯밤부터 거의 동터 올 때까지 밤을 잊고 살을 섞고 있었으니, 아침은 지났을 테고.

"......."

라희는 나른하게 감겨 있던 눈을 떴다. 투명한 햇살이 새하얀 침실에 쏟아져 들어와 벽에 반사되는 환한 한낮. 라희는 속눈썹을 한껏 위로 들어 바흐의 얼굴을 살폈다.

바흐 역시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서 얕은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 있었다. 언제 봐도 잘생겼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얼굴.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평소처럼 덤덤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단정한 입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라희는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려 다물려 잠든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 어떤 소리조차 나지 않는 스치는 키스였다. 입술과 입술만 잠시 닿아다가 곧 떨어진.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부드러운 감촉이 남았다. 입술 위에 감미롭게 남아 있는 감각을 음미하면서, 라희는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새근새근 잠든 바흐를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언제였더라. 그가 잠든 모습을 처음 봤을 때가.'

아래로 향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기억을 헤집다 보니, 문뜩 생각났다. 두바이 사막의 외딴 리조트였다. 이른 아침에 테라스로 나가 야외 선베드에서 잠들어 있는 바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땐 고열로 몸이 아팠을 때였는데. 그 후로도 드물게 잠든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하기까지 하다.

바흐는 깊은 잠을 자는지, 가지런한 속눈썹을 눈 아래 길게 늘어뜨리고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무슨 꿈을 꾸는 걸까.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면, 꿈조차 꿀 수 없이 깊이 잠들기 때문에 마치 불시의 정전 같은 숙면일 텐데.

라희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내렸다. 잠든 모습만 익숙해 진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침대에서 벌거벗고 맨살을 맞대는 것이 자연스럽다. 두 사람 다 완벽한 알몸.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바흐의 품. 포근하게 휘감기는 피부. 서로가 맞닿은 살결을 통해서 따스한 체온이,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으레 간직한 미세히 약동하는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다.

'어제는 스테이크였으니까. 오늘 첫 끼는 가벼운 샌드위치?'

라희는 1층 냉장고 속에 넣어둔 샌드위치 재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님과 살다가, 대학 진학 후 바로 기숙사에서 살아서인지 그다지 자취기간이 길지 않아 요리는 영 자신 없었지만, 그나마 샌드위치는 쉬운 편이니까 그럭저럭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간 몇 번 해먹어보기도 했고.

'그러고보면 늘 얻어먹기만 했었지.'

처음은 베이글 샌드위치, 그 뒤로는 호텔과 전문 레스토랑, 어제는 스테이크까지. 거의 반 년간, 바흐에게 무언가를 준 기억은 없다. 한심할 정도로 항상 받기만 했던 관계.

".......!"

1층 주방으로 향하기 위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는데,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디."

잠에 잠긴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잡은 손바닥은 그의 몸쪽으로 라희를 끌어당겼다. 다시금 밀착되는 살결. 가슴과 맞댄 묵직한 체온이 느껴진다.

".....화장실요."

라희는 최대한 입을 적게 벌려 재빨리 중얼거렸다.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식당으로 가려고 했지 화장실을 가려던 것은 아닌데, 아침이라서 입을 벌려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대충 간결한 핑계를 댔다.

"으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흐의 평평한 미간은 조금 좁혀졌다. 감은 눈두덩이 살풋 찡그려진다. 이내 그가 눈을 떴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아직 미몽에 취해있는 듯 흐릿했다. 커다란 창이 침대 너머로 트여 있어 훤히 비쳐드는 햇살 때문인지, 반쯤 내려뜬 새카만 눈동자는 깊고 투명해 보였다. 그가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이자, 풀렸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품에 가둔 라희를 향해 내려뜬 눈이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희미한 기운이 어렸다.

허리에 닿아, 등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은 천천히 살결을 쓰다듬어 내리며 아래로 향했다. 맨 살을 더듬어 내려 둥근 엉덩이의 곡선을 매만지다가 천천히, 그 아래 허벅지 안쪽의 은밀한 곳에 닿았다. 수풀 속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매만지는 손끝이 습한 속살을 스치며 지분거린다. 그러다 불쑥, 뒤쪽으로 움직였다.

"어느 쪽? 여기?"

움찔. 갑자기 손가락이 깊이 들어가 꽉 오므려진 둥근 살에 닿은 감촉. 라희는 순간 몸을 크게 뒤틀었다. 무슨 악취미람. 몸을 재차 움직여보았지만, 그의 팔에 단단히 갇혀 있었다.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고작.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후, 짧은 숨을 내쉬며 팔을 아래로 뻗었다.

"아니요."

손바닥 안에 뜨끈한 것이 잡혔다. 불끈 치솟아있다. 아까부터 빳빳하게 서 있던 굵은 살덩이를 손으로 둥글게 감싸 쥐었다.

"이거요."

미간을 살짝 찡그린 그의 입가에 가벼운 장난기가 스쳤다.

"아까처럼, 키스하면 놓아주지."

'뭐야. 깨어 있었던 걸까. 어쩜, 그렇게 태연하게 잠든 척 한 거지.'

라희는 못이긴 척, 턱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물론 입술은 꾹 다문 채였다. 이제 놓아주면 좋으련만. 라희가 기다리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바흐는 눈을 껌뻑이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입술 말고."

흠칫. 손에 쥐고 있던 묵직한 살덩이가 꺼덕이며 움직였다. 뜨끈한 남성에서 화들짝 손을 뗀 라희가 눈을 위로 올려 바흐를 쳐다보자, 그는 장난기 어린 눈매로 아래를 눈짓하며 입매를 올렸다.

"먼저 해줄까?"

은근하게 감겨드는 나직한 목소리. 그 말에 머뭇거리던 라희는 작게 숨을 들이켜고서 몸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

그에게 진한 키스를 마친 라희는 곧바로 1층에 내려와 옷을 챙겨입고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주방에 모습을 드러낸 바흐는 언제나처럼 말끔히 차려입은 채였다. 그는 2층에서 사라진 라희를 찾다가 아래로 내려온 듯한 모양새였는데, 막상 식당에서 프라이팬에 담겨있던 달걀 후라이를 식빵 위에 얹고 있는 라희를 발견하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흠."

그는 옆으로 다가와서 라희 옆에 섰다. 그가 지켜 보고 있어서인지, 완성된 샌드위치를 반으로 가르는 칼을 든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라희는 눈을 딱 감고, 한번에 썰어 접시 위로 올렸다.

"드세요."

탁. 라희는 식탁에 앉은 바흐 앞에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나름대로 정성을 쏟아 열심히 만들기는 했지만, 모양새는 어설펐다. 식빵의 안쪽에 발라 구운 버터는 약간 탔다. 안쪽으로는 햄, 치즈, 달걀후라이를 차례로 얹고 주방 소스 칸에 있던 케찹을 별생각 없이 듬뿍 뿌렸는데, 그게 문제였다. 슬라이스 채소를 얹은 후 마지막으로 식빵으로 덮어 꾹 눌러 마무리했는데 채소 아래 가득 고여있던 케찹이 찍 눌리면서 주위로 지저분하게 튀었다.

반듯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흐트러진 모양새였지만, 더는 잘 만들 자신이 없었다. 라희는 반으로 갈린 토스트를 앞에 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잘 먹을게."

바흐는 나이프로 샌드위치를 한 조각 잘라 포크로 찍어 입에 먹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오렌지 주스를 잔에 따라 그의 앞에 놓아주면서 힐끔 표정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아서 안심되었다.

"맛있어요?"

맞은편에 앉아 샌드위치를 손에든 라희가 확인하듯 묻자 그는 오렌지 주스를 기울여 마시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입에 넣은 순간. 라희는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혀끝에 맴도는 짠맛. 그것도 아주 강렬한. 라희가 만든 샌드위치는 정말 짰다.

벌컥벌컥. 손에 든 오렌지 주스 컵을 단숨에 기울여 마시면서, 무엇 때문인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와 같게 만들었는데. 달군 프라이팬에 버터를 넣어 토스트를 튀기듯 굽고, 버터로 햄을 볶고, 달걀후라이를 만들고 치즈를 얹었다. 그리고 케첩을 붓고 슬라이스 채소를 얹었을 뿐인데. 대체 왜?

-탁.

오렌지 주스 잔을 내려놓고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바흐는 어느덧 잘린 한 조각을 다 먹고 나머지 한 조각을 자르고 있었다.

"저...."

라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가염버터."

그의 말을 듣자, 이 모든 상황이 일시에 이해가 갔다. 버터 때문이었다. 애초에 소금기가 가미된 가염버터를 듬뿍 녹여 빵을 굽고, 짭짤한 햄을 볶고, 소금 간을 한 달걀후라이를 만들었다. 거기다가 짠 치즈까지 넣고서, 짭짤한 케찹까지 듬뿍 얹었으니, 맛이 무시무시하게 짤 수밖에. 동시에, 어제 그가 스테이크를 구웠을 때에 올리브유를 사용했던 것이 생각났다.

"괜찮아. 카트에 내가 담았으니까."

그가 안심하라는 듯 말하며 가볍게 입매를 올렸다.

"이런 용도는 아니었지만. 맛있어."

태연한 척 차분한 표정으로 덤덤히 말을 하고 있음에도 짠맛을 견디기는 못내 어려웠는지, 묵묵한 표정으로 오렌지 주스를 기울여 마시는 바흐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비장미(悲壯美)가 느껴져 갑자기 피식, 속에서 가벼운 웃음이 치솟았다.

"아,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가 식사를 멈추고 라희를 바라보았다. 잠잠한 눈으로 가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집은, 곧 마련할 수 있을 거야. 제임스와 만나서 조율하면 되니까."

집? 아. 생각났다. 그가 전에 지낼 곳을 찾아본다고 했었다. 순간 라희의 미간이 좁혀졌다. 가만, 제임스와 조율한다면, 그 말뜻은.

제임스의 집? 그렇다면, 어제 걸려 왔던 전화는 집 문제 때문이었을까. 전화 내용을 들으니 뉴욕에 온 듯 했는데. 제임스는 뉴욕에 펜트하우스가 있다고 했다. 런던에서 제임스와 바흐가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알려주었던 금액. 1억 달러.

설마, 마련할 집이 그 집? One 57인가 한다던. 라희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바흐가 고모네 집이 아닌, 따로 외떨어져 지낼 곳을 장만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라희가 한 말을 들어주려 한 것이라면 이제 조만간 뉴욕을 떠날 텐데, 그런 엄청난 액수의 거처는 필요 없었다. 차라리 호텔의 스위트룸이 비용면에서는 싸게 치는 셈이었다.

"아니에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라희가 단호히 말을 이었다.

"줄곧 호텔에서 지내다 보니, 호텔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가만 라희를 응시하는 그를 향해 라희는 앞에 놓인 샌드위치 접시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밝게 미소 지어 말했다.

"혹시, 매끼 이런 형편없는 음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가 하는 공포스러운 고민도 필요없고요."

"설득력있군."

바흐는 입매를 옅게 올렸다. 역시, 예의상 접시를 깨끗이 비우기는 했지만 먹기는 고역스러웠던 거다. 라희가 앞에 남은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바흐가 입을 열었다.

"그간."

어쩐지 생각에 잠긴 조금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한동안. 조금 더 바빠질지도 몰라. 이번 달 초순부터 CHF 페그제 FX 문제가 조금 생겨서."

그가 말한 FX는, 당연하게도 국내 걸그룹 이름이 아니라, 외환거래(FX: foreign exchange)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뿔테 친구들과 만난자리에서 바흐가 이쪽을 거래하고 있다고 듣기도 했었고, 대학에서 대강 배우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CHF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라희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있자, 바흐는 눈매를 좁히며 말을 고르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스위스는 영국의 파운드화와 마찬가지로 유로를 쓰고 있지 않아. 스위스 통화를 프랑이라고 하는데 약어는 CHF(Confoederatio Helvetica franc)야. 스위스 중앙은행은 유로와 자국 통화인 프랑의 균형을 맞춰야하기때문에 지난 3년간 고정환율을 고수해왔지. 페그제(Peg System)라고, 고정으로 최저 환율을 유지했어. 그러다가, 이번에 불시에 고정환율을 폐지한거야. 전부터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이지.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여파가 내게도 미치고 있고. 채권과 환율 쪽에 갑자기 터진 일을 수습하려면 시일이 걸릴수 밖에 없는 사안이지."

바흐가 자신의 일 이야기를 꺼낸적은 처음이었기에 라희는 그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했다. 대충 외환거래에 유료와 스위스 프랑의 환율차이로 복잡한 문제가 생긴듯 했다.

"귀가가 늦어질지도 몰라."

라희가 대강 수긍하는 표정을 짓자, 바흐는 앉아있던 식탁에서 일어나 라희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무슨 영문인줄 몰라 라희가 자리에서 일어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순간, 그가 양팔로 라희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고마워."

그의 품에 꽉 끌어안긴 채 서 있는 정수리 위로 달콤한 저음이 속삭였다. 몸을 감싼 은은한 체향과 함께 감미롭게 귓가에 감겨들어서 눈이 저절로 느릿하게 감겼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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