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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가까이서 몸을 밀착해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 라희는 그와 함께했던 첫날 떠올렸다. 평범한 일상에서 결코 접할 수도, 접할 일도 없었던 고급스러운 낯선 공간. 실내에 수영장이 방안에 있는 호텔. 두려웠고, 어색했고, 민망했던 그 순간들. 한숨처럼 내리뜨는 시야에 그의 긴 손가락이 들어왔다.
머뭇거리며 실내에 서 있던 그날 라희에게 시작은, 저 곧고 긴 손가락이었다. 조금 전까지 섬세한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건반을 두드리던 저 손가락은, 그날 입술 위를 스치며 덧그리듯 눌러 내리다가 서서히 끝을 세워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진 키스.
그날. 그 기억.
라희는 눈꺼풀을 나른하게 들어 올려 앞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정한 입술. 저 입술이 벌어지면서, 호텔의 계단 위. 서로 마주하고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섹스의 첫 단계는 터치라고. 그래서 그가 손가락을 세워 가늘게 떨리는 라희의 입술을 매만지다가 시작했나 보다. 그다음은 키스, 애무, 접촉, 삽입, 오르가즘. 바흐가 그날 언급했던 단어들이 흐릿하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라희는 손을 위로 뻗었다. 그의 얼굴을 향해 뻗어올라간 가는 손끝은 피부에 닿아 보드라운 뺨의 살결을 느릿하게 매만지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단정한 입술 라인에 다다랐다. 라희의 손끝이 입술을 누르듯 닿자,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고요한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생겼다. 좁혀진 짙은 눈매. 그날의 라희처럼 떨고 있지는 않다. 단지, 얕은 호흡이 조금 깊어지고 거칠어졌을뿐.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희는 가벼운 손끝을 서서히 입술 위를 맴돌며 움직였다. 얼굴 피부보다 더욱 보들보들하고 여린 감촉.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그의 입술은, 여자의 입술처럼 섹시하고 관능적이기보다는 고교 미술반에 놓여있던 흰색 조각상과 같이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선으로 또렷하고 단정하다.
그의 입술이 쓸리듯 닿는 고운 감촉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라희는 속눈썹을 들어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시선이 맞부딪쳤다. 빛조차 투과하지 못할 검고 깊은 눈동자. 지난 초여름, 미라를 따라 들어간 우연한 장소에서부터 이 새카만 검은 눈동자에 사로잡혀 버렸다.
당신을, 어찌 해야할까. 라희는 단정한 이마부터 찬찬히 바흐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몸안 뜨거운 갈증을 일으키는, 그. 생리적인 목마름이 아닌, 원초적인 갈망. 그와 함께한 이후 부터 무엇으로 이 갈증을 달래야할지 잘 알고 있다.
문득,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에 쓰여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남자가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이유, 욕망이 필요하지만 여자가 섹스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백가지 변명이 필요하다던가. 그런 시시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났다. 섹스. 몸안의 불꽃을 태워 갈망을 하얗게 재로 만들어버릴. 그런 섹스를 길들여진 육체가 갈구하고있다. 바흐와는 계약 첫날 부터 시작된 해갈은 오로지 섹스였다. 뜨겁고, 진한.
몸에서 열기가 후끈 끼쳐와, 머리끝까지 뜨거워지는 가운데, 아직 이성이 남아있는 서늘한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만약, 오빠의 사고가 없었더라면. 아니, 오빠의 사고 이후 급하고 절박했을때, 그 시점, 그 타이밍에 바흐가 나타나지 않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와 관계를 갖은 이후, 몇 번이나 비참하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시커먼 자괴감에 사로잡혀 곰곰히 생각하면서 오빠의 사고과 일련의 사건들의 추이를 씁쓸하게 곱씹어 본적이 있다.
절망. 나락. 진창. 대체로 그런 단어로 표현 가능한 암흑뿐인 상황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처럼 등장했던 바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서, 차라리 그에게 몸을 팔게되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 충주에서 평범하게 살고 계시는 부모님을 만나고 이후 뿔테를 피해 오빠가 임용준비한다는 핑계로 기거하는 노량진 원룸촌에서 너무나도 태연히, 일상의 하루하루를 쾌락으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던 오빠를 발견하고서 깨달았다.
'주제 넘었구나.'
주제넘었다. 라희에게는 오빠로 부터 시작된 불행한 사고가 일상이 발카닥 뒤집히는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오빠나, 오빠를 끔찍히 아낀 엄마는 무탈하게, 별일 없이 평온하고 안온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도한 라희는 이내 후회했다. 시리도록 뼈아픈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주제넘은 짓을 했다. 오빠의 사고는 처음부터 라희의 몫이 아닌 타인의 불행이었다. 그것을 경솔하게 자의로 떠안은 어리석은 만행에 대한 자책.
그날, 오빠가 채권추심을 당하던 폭력적인 장소에서 뛰쳐나와 정신없이 고수입 아르바이트를 검색할 게 아니라, 충주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오빠가 처한 상황을 즉각 알렸어야했다. 하나 빠짐없이, 똑똑히 보았던 사실대로.
라희가 자라오면서 진저리치던 오빠일이 아닌, 사랑하는 엄마의 소중한 아들의 일이니까. 주제넘게 오빠의 빚을 대신 갚아볼거라고 동동거리며 초조하게 방도를 찾아 헤맬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알리고서 조용히 일이 해결 될때까지 숨죽이며 지켜봐야 했었다.
그 행동만이, 당초 이모든 사건에서 라희가 맡은 역할이었다. 고작, 파트타임 아르바이트가 경력과 수입의 전부였던 평범한 대학생인 라희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도, 규모도 아니니까. 오빠와 부모님이 알아서 해결할 일.
라희가 취한 태도는 주제넘고, 건방지다못해 방자했다. 라희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여대생답게 돈이 부족하다고 엄마가 하소연하면 방 보증금을 빼서 주고, 더 부족하다 호소하면, 학자금 대출을 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네면서 애달아 하는 태도만 슬쩍 비추어 주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럼, 바흐와 계약할 일도, 뿔테와 엮일 일도 그들을 둘러싼 여자들이 더러운 창녀 취급하는 일도 없었겠지. 지금의 오빠처럼,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심적 부담 따윈 하나 없이 홀가분하게 살았을 거다. 가끔 명절에 얼굴 마주 보면 걱정하는 척, 입으로만 한마디씩 가식적인 위로의 말 건네면서.
'그래.'
라희는 자신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는 곧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지금, 나는 당신과 섹스를 할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거야. 그나마 수백 가지 변명거리가 널려 있으니 다행이지.'
뇌리에 잔상처럼 맴도는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의 곁에 머무르는 건가요?
어제 들었던 제프의 물음에 대한 정확한 대답. 유진에게 복수한다는 핑계로 머뭇거리며 회피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솔직하게 답할 수 있을 거 같다.
'좋아하니까. 그를.'
하지만. 라희는 눈을 느리게 감고서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그의 곁에 머물 수는 없다. 명백히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니까. 평범이랄까, 보통과는 거리가 아주 먼 관계. 뒤틀리고, 뒤엉켜버린.
'난, 당신에게 몸을 팔았지. 당신은 돈으로 몸을 샀고.'
사실. 차가운 현실. 묵직한 팩트. 바흐와의 관계는 달리 뭐라 변명도 불가능한 매춘 그 자체다. 화대를 건네받고, 일 년간 몸을 팔기로 약정했었다. 아무리, 후에 이유진의 돈으로 계약이 끝났다고 해도, 바흐에게 처음부터 창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라희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번져나갔다. 고로, 바흐 옆에 함께 한다면. 계약 내용을 모르는 타인들에 의해 비아냥거리듯 창녀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뭐라 반박할 수가 없다. 사실을 속이는 행위는 기만이니까. 스스로도 속지 않는 비루한 거짓말 따윈 입에 올리기 싫다.
창녀. 그러고 보면, 예전 뿔테가 이야기한 내용 중에 창녀가 언급된 부분이 있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냉담한 연인에게, 정열적인 엘로이즈가 편지로 이렇게 고백했다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후가 되어 세상에 군림하느니 차라리 당신의 창녀가 되고 싶다고.
아마도, 평생 귀족으로만 살았던 엘로이즈는 실제 창녀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거다. 그랬더라면, 저런 경솔한 말 따위는 뱉지 않았을 테니까. 싸늘한 타인의 조소와 냉소에 영혼이 갉아 먹히고, 정신이 삭아지는 모멸감과 비참한 자괴감, 눈에서 핏발이 서는 환감을 결코 실제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했겠지.
라희는 앞에 서 있는 바흐를 향해 입술을 더듬던 손가락을 세워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의 다물린 틈으로 서서히 비집어 넣었다. 이내 부드럽게 입안으로 쑤욱 들어가자, 손끝에 닿는 젖은 속살의 촉촉한 촉감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손가락을 세워 딱딱한 잇새로 밀어 넣자 슬며시 다가온 혀. 손끝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말캉한 감촉. 살갗을 스치며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
라희가 손가락 끝을 구부려 아랫니에 걸고서, 물컹거리는 혀의 밑 부분을 건드리자, 그가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짜릿한 감각. 동시에 손등과 이어진 살갗을 타고 저릿저릿한 열감이 뻗쳐나갔다.
딱딱한 잇새에 끼워진 손가락이 뭉근하게 위아래로 눌린다. 입안에 들어간 손끝을 말캉한 혀끝으로 휘감아 안쪽으로 쪽 빨아내는 짜릿한 감촉. 등줄기를 타고 내달리는 쾌감은 아래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훅, 끼쳐 오르는 열감. 손가락을 빨리면서, 눈이 질끈 감긴다. 열기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붉은 입술을 자기도 모르게 꾹 깨물었다.
가늘게 눈을 겨우 뜬 라희는 그의 입안을 헤집던 손가락을 밖으로 꺼내 타액에 젖은 손끝을 제 입술 가운데 세우고서 길게 내민 붉은 혀로 길게 핥아냈다. 바로 앞, 조금 풀어진 검은 눈동자가 그런 라희를 낮게 응시했다. 서로의 열띤 숨소리로 귓가가 어지럽다.
둥글게 오므린 붉은 입술로 손가락을 쪽 빨아낸 라희는 제 입술을 혀끝으로 적셔 축인 후, 꿈꾸는 듯, 나른하게 가늘어진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턱을 들어 시선을 마주하면서, 한쪽 팔을 뻗어 바흐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발꿈치를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서로가 깊게 밀착되는 가슴, 그 아래 느껴지는 묵직한 그의 육체.
미동도 않고 가만있던 입술 위로 뜨겁고 붉은 입술이 다가가 닿았다. 거친 숨결을 흐트러트리는 입이 살짝 벌어지고, 그 사이, 젖은 혀와 혀가 만나 깊게 얽혔다. 진하고 농밀한 키스. 입안으로 퍼져 들어오는 그의 은은한 체향.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 부드럽게 감겨들었다가 맞비벼지다가 서로를 갈구하듯, 탐하듯, 격렬하게 빨아들이는 혀끝의 짜릿한 감각.
주변 공기를 뜨겁게 달구는 농도 짙은 키스가 깊게 이어지면서, 목구멍으로 달디단 타액이 흘러들고 혀가 거세게 뒤엉킨다. 동시에, 밀착된 두 육체가 욕망으로 확 달아올랐다.
서로가 피워내는 열기가 견딜 수 없이 뜨겁다. 옷감 위로 맞댄 허벅지 가운데를 찌를 듯이 솟아난 단단한 남성이 느껴졌다. 마치 섹스처럼, 혀가 서로의 속살을 비비며 드나들자 점차 머릿속까지 아찔해질 정도의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하.....아...."
이윽고, 입술을 뗀 라희가 살풋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끝이 가늘어진 눈매가 유혹적으로 휘었다. 라희는 촉촉한 입술을 달싹여 속삭이듯 말했다.
"키스는 했으니, 이제 애무 차례네요."
타액으로 젖은 분홍빛 입술을 조금 벌리고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바흐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옅게 웃어 보이고는, 그의 목을 감싸 안았던 팔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스치듯, 얇은 셔츠를 걸친 등줄기를 손바닥으로 훑어내리다가 바지에 닿자, 뒤에서부터 앞으로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툭, 그가 입고 있던 바지의 버클이 풀렸다. 그 가운데 터질 듯 솟아있는 남성의 윤곽이 보였다. 천천히, 손바닥으로 팬티 위를 누르듯 쓰다듬어 훑어낸 라희는 몸을 아래로 기울였다.
-엘로이즈 같은 자신감은 없지만.
묵직한 육체가 흥분으로 떠는 가느다란 떨림을 느끼면서, 팬티를 아래로 끌어내리자, 우뚝 솟아있는 뜨거운 남성이 드러났다. 핏줄까지 돋아나 울퉁거리는 묵직한 기둥을 내려다보던 라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둥을 덮은 보들보들한 살갗이 뿜어내는 뜨끈한 온기. 매끄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속살의 뭉툭한 끝. 팽팽하게 달아올라 깊게 갈라진 틈.
라희는 천천히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뾰족하게 세운 붉은 혀끝으로 뭉툭한 살덩이의 갈라진 끝을 톡, 스치듯 건드렸다. 혀끝에 닿는 뜨거운 체온. 그는 움찔하며 억누른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다시 날름 혀를 내밀었다. 분홍빛 팽팽한 속살을 둥글게 휘감으며 축축하게 타액으로 적시다가, 곧게 솟은 기둥의 도톰하게 튀어나온 아랫부분을 혀끝으로 지긋이 누르며 길게 핥아내려가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마침내 뿌리에 다달아 혀끝을 세워 간질이며 더운 숨을 내뿜자, 그가 몸을 잘게 떨었다. 라희는 나른하게 풀린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한손으로 피아노를 짚고서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위로 향했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의 창녀니까.
라희는 꺼떡대며 부풀어 있는 곧은 남성을 향해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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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7회, 60회에 나왔던 대사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