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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를 거닐다 집안으로 들어와 몸을 살짝 떠는 라희를 위해 그가 난방 온도를 조금 더 높이는 동안, 라희는 거실 중앙 벽에 설치된 벽난로로 다가가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벽난로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호텔에서도 스위트 룸 거실마다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긴 했지만, 그 안쪽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벽난로가 사용되는 모습은 그간 보지 못해서 그저 장식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우스 햄턴 여름 저택의 벽난로 안쪽에는 유지관리를 위해 깨끗이 청소했지만, 미처 지우지 못한 그을음 같은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창고에 장작이 있어."
바흐는 라희의 표정을 보더니 입매를 부드럽게 올리고는 바로 창고로 가서 나무가 든 상자를 두 팔로 들고 왔다. 상자 안에는 반듯하게 잘린 통나무 장작과 종이 포장된 기다란 스틱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바흐는 벽난로 옆에 설치된 철제 랙에 통나무를 차곡차곡 옮기고는 그중 2개를 집어 들어 벽난로 안쪽 스탠드에 x자로 교차해 쌓고서 종이 스틱을 올리고 긴 스타터(점화기)로 종이 스틱에 불을 붙였다. 벽난로 위쪽에 설치된 환기구를 열어두고 잠시 기다리자, 마치 마법처럼, 순식간에 불이 붙은 통나무들은 이내 후끈한 열기를 내뿜으며 활활 타올랐다.
"좋네요."
라희가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중얼거리자, 그는 벽난로 옆에 놓여 있던 촘촘한 철망 차단막으로 벽난로 앞을 가렸다. 비록 철망 너머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왜 굳이 가려 두는지 알 수 없던 라희가 옆에 앉은 그를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하는 거에요?"
"장작에서 갑자기 불똥이 튀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가 말을 하자마자, 마치 벽난로가 듣기라도 했던 듯, 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가 차단막에 막혀 안쪽에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시뻘건 불씨로 호박씨만 한 크기였다.
"필수네요."
라희가 중얼거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 타닥. 나무 타는 소리.
라희는 촘촘한 철제 스크린 너머 벽난로 속 시뻘건 불씨를 품은 장작이 타는 것을 바라보았다. 춤을 추듯 위로 솟구치는 낮은 불길. 숨쉬듯 빛깔을 달리해 타들어가는 시뻘건 불씨. 얼굴 피부 위로 쏟아지는 따스한 온기. 짙고 그윽한 나무 향으로 타오르는 벽난로가 피워내는 안온하고 아늑한 분위기.
-툭,
옆에 앉아 있던 그가 스크린을 제치고, 큰 통나무 조각 하나를 추가로 벽난로 안에 집어넣었다. 마른 장작을 만난 불꽃은 활활 높게 타올랐다.
그 뒤 두 사람은 가만 앉아 낮은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속 장작들을 바라보았다. 거실 창 너머로 보이는 밖은 어느덧 어둑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크고 조용한 거실 안,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가운데 굵은 통나무 장작은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자작자작 타올랐다.
"여름 휴양지라서, 겨울에는 아무도 찾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라희가 중얼거렸다. 사우스 햄턴 메인 스트릿에서 이곳까지 길게 외길로 이어진 메도우 레인(meadow lane)을 지나쳐 오는 동안, 규칙적으로 세워진 호화롭고 거대한 저택은 비어 있었고, 주위에는 지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겨울은 스키시즌이라서 주로 스키장이나 스파, 혹은 열대 휴양지를 가지. 고모님은 특히 스파를 좋아하시니까."
그의 대답에 라희가 눈을 들어 그를 응시하자 눈짓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바흐가 덧붙였다.
"겨울마다 내가 지내는 곳이야."
그 말을 들은 라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았다. 그의 어깨너머 식당에서 거실로 나오는 입구 앞에 놓여 있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보였다. 그저 부자들의 인테리어용 장식품으로 놓아둔 줄 알았는데, 바흐의 말을 들으니 실제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저거, 제니퍼가 연주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라희가 눈짓으로 피아노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르자 벽난로를 멀거니 보고 있던 라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살짝 입매를 올리고 말했다.
"아늑한 벽난로도 있고, 바깥은 어두운 저녁이고, 주위는 고요하고. 뭔가 필요하다 생각되지 않으세요?"
천천히 피아노 쪽으로 눈을 굴리며,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음."
한동안 은근한 눈짓을 받은 그가, 졌다는 표정으로 눈을 한번 느리게 깜빡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희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어떤 거 마실래?"
"뭐 있는데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라희를 향해 바흐가 말했다.
"맥주, 와인,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흐음?"
라희가 눈썹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샴페인도 있어."
귓가에 감기는 낮은 목소리. 주위를 둘러싼 온기처럼 따뜻하고 달콤하다. 라희는 조그마한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걸로 할게요."
***
"신청곡은?"
피아노의 덮개를 열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은 그가 물었다. 라희는 피아노 상판에 팔꿈치를 짚고서 몸을 비스듬히 기대 샴페인을 기울이다가 눈동자를 허공으로 들어 올려 이리저리 움직였다.
'신청곡이라......'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피아노 곡이라면, 당연하게도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서 배경음악처럼 흐르던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이 생각났다. 그런 곡들은 분위기도 선율도 비슷해서 딱히 무슨 곡명이었는지 특정하기 어려웠고, 구분할 필요도 못 느꼈기에 머릿속에 대충 익숙한 멜로디가 스치기는 했지만, 그 곡이 무슨 곡인지 당최 알 리가 없다.
"으음. 피아노와 친하지 않아서요. 잠시만요. 좀 더 생각해 보고요."
이런 아늑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은? 중고등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배운 유명한 명곡들을 우선 떠올려보았다. 엘리제를 위하여, 이건 분위기가 낭창하고. 꿀벌의 비행. 이건 시끄럽고. 대충 쇼팽? 그런데 쇼팽은 잔잔한 멜로디가 끊임없이 빠르게 이어져서 듣고 있으면 악보 위의 음표들이 허공에 아른거리며 떠다니는 것 같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곡명을 헤집던 그때, 문득, 홈스테이 했을 때 자주 들었던 곡이 기억났다. 사라 아주머니가 좋아했던 곡. 피아노를 모르는 사라를 위해 그나마 어릴 때 잠깐 배웠다는 찰스가 정말 들어주기 민망한 서툰 피아노솜씨로 더듬거리며 연주해주곤 했는데, 솔직히 그도 인정했다시피 피아노보다는 기타 연주가 훨씬 나았다. 제목이….
기억 속 익숙한 곡명을 떠올리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Say you love me. (사랑한다 말해 봐요.)순간 눈 밑까지 뜨겁게 치미는 열기에 라희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피아노 위에 내려놓고 작게 손 부채질 하며 소파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손에 들고서, 악보를 검색했다. 피아노 연주로는 류이치 사카모토 버전이 유명한 모양으로 인기가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내 라희는 휴대폰을 가로로 뉘인 후 그에게 건넸다.
"이거요."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맨질맨질한 피아노 건반에 눈을 고정하고서 어색하게 서 있다가 그가 휴대폰을 받아들자 그제야 눈을 들었다.
낮아진 가지런한 속눈썹으로 화면 속 악보를 찬찬히 살펴보는 그를 향해, 라희는 짐짓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사라 아주머니가 즐겨 들으셨던 곡이거든요. 작고하신 남편분께서 자주 연주해 주셨대요."
실상 이 곡이 사라 아주머니를 향한 남편분의 프러포즈용 곡이었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빼버렸다. 가만 악보를 보면서 손끝을 움직여 톡톡 건반 위를 소리 없이 작게 두드려보던 그는 이내, 휴대폰을 악보대에 올려놓고서 연주를 시작했다.
도입부는 조금 느렸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새하얀 건반 위로 내려앉아 천천히 움직였다. 느리고 부드러운 선율이 방안 가득 고요한 공기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그랜드 피아노라서 그런지, 그가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검은색 안쪽 면으로 하얀 손가락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라희는 피아노 옆에 서서 그의 연주 모습을 지켜보았다. 건반을 향한 깊은 눈매, 움직일 때마다 마법 같은 선율을 피워내는 손끝은 때론 느리게, 때론 눈동자가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의 깊고 풍부한 음색으로 연주되는 Say you love me가 귓가에 감미롭게 감겨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추고, 텅 빈 머릿속은 그저 공기 중 유려하게 흘러나가는 선율 사이를 거닐었다. 저절로 작게 벌어진 입은 뭐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주 잠시간, 악보를 넘기려 선율이 딱 멈출 때는 여운처럼 남은 지속음에 간질간질 애가 타서 절로 입술이 잘근 깨물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한동안 건반 위를 빠르게 노닐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마침내, 느린 선율로 마무리한 연주가 끝났다. 건반 위에 손가락이 완전히 정지하자, 라희는 참았던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눈을 깜빡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입을 가렸던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손뼉을 마주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만약, 이 장소가 거실이 아닌, 연주회 홀이었으면 청중들로부터 당연한 환호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을 거였다. 넓은 거실 안 홀로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느껴져 민망할 정도였다.
"와. 비교가 안 되네요."
감동으로 한껏 들떠 올라 높은 목소리로 라희가 빠르게 입술을 움직여 말하자, 그가 눈을 들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누구와?"
"찰스요. 찰스도 이 곡을 몇 번이나 피아노로 연주했었거든요."
"........"
바흐는 눈을 들어 악보대 위의 휴대폰 화면을 직시하면서 눈매를 가늘게 좁히다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라희가 그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그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초견이니까, 몇 번 더 연주해보면 조금 더 매끄러워질 거야."
라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초견이 무슨 뜻이에요?"
"처음 보는 악보를 바로 연주하는 거."
"아."
중고교 때 취미로 드문드문 바이올린을 익혔을 뿐이라, 전문적인 음악용어는 낯설었다. 거실은 이제 실내를 가득 메우던 선율 대신 조용한 정적이 감돌았다. 피아노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라희는 샴페인 잔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초견이 아닌 곡을 들을 수 있을까요?"
-챙.
가볍게 맞부딪치는 샴페인 잔의 맑은 유리 소리. 좁고 긴 잔을 기울여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그는 피아노 위쪽에 잔을 세웠다. 연주에 앞서 양손을 맞대 손가락의 마디를 지그시 눌러 매만졌다.
혀끝에 맴도는 톡 쏘면서도 달짝지근한 샴페인의 맛을 음미하며 손가락 사이 잔을 둥글게 빙 돌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바흐는 이내 건반에 손을 가볍게 올리고서 연주를 시작했다.
느리게 시작된 선율은 굉장히 세련되고 편안한 음이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로맨틱하고, 감미로운 멜로디. 지금 거실의 분위기와 딱 들어맞는 안락하고 포근한 느낌. 마치, 햇살 밝은 오후에 새파란 하늘 위 뭉게구름 몽실몽실한 푸른 잔디밭을 천천히 산책하는 느낌의 맑고 투명한 곡이었다.
어쩐지 가만 숨죽이고 감상하고 있으려니, 미술관에서 작품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미술 교과서에서 언뜻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양산 쓴 여인>이 생각났다. 한동안 뇌리에 잔상처럼 남아 대학교 도서관 예술 코너의 작가별 화집에서 찾아내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곤 했던 끌로드 모네의 작품. 총 3점으로, 모두 푸른 하늘 아래 잔디밭 위 하얀 양산을 쓴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그린 시기는 달랐지만, 동일한 대상을 그린 그림. 모네의 아내 카미유.
바흐가 연주하는 곡을 들으면서, 머릿속에서는 내내 모네의 그림을 떠올렸다. 대상을 향한 화가의 따스하고 아련한 시선처럼, 미묘하게 비슷한 느낌.
이윽고, 고요한 침묵이라는 수면 위 흩뿌려지는 물방울의 잔잔한 파동처럼 실내를 조용히 물결치게 하던 선율이 그쳤다.
라희는 차분히 멜로디가 남긴 여운을 음미했다. 앞서 통통 튀는 감각으로 내달리던 강약의 멜로디와는 다른, 시종일관 감미로웠고, 느리면서 따스한 감성의 곡이었기에 더욱 긴 여운이 남았다. 꼭, 그와 똑 닮은 분위기의 곡이었다.
"무슨 곡이에요?"
라희가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큰 그가 우뚝 앞에 서면서, 지금껏 건반 위를 나릿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라희의 뺨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면서, 윤곽이 또렷한 턱이 귓가에 와 닿았다. 얕은 숨결이 귓속을 간지럽힌다. 속삭이듯, 그가 입술을 열었다.
"글쎄."
-탁.
귓속으로 흘러드는 촉촉하고 달콤한 음성에 홀리듯, 라희는 손가락 끝에 끼워 들고 있던 샴페인 글라스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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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84회에 나왔었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