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55화 (15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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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했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무시무시한 정적 속에서 식사를 겨우 마치고, 그릇을 차곡차곡 쌓아 정리한 후 거실로 나와 테라스로 연결된 통 창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 파도치는 백사장 저 너머 푸른 물결이 잘게 반사되어 희게 빛난다. 지금 집안 분위기만큼이나 적막감이 맴도는 겨울 바다.

라희는 힐긋, 바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소파에 앉아 여느 때처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 위를 빠르게 스치는 어지러운 그래프와 도표들의 모양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늘상 들여다보는 경제 리포트나, 애널리스트 보고서일성싶었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게 쳐진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드넓게 펼쳐진 새하얀 백사장은 갈매기만 드문드문 보일뿐. 아무도 없다. 주변은 온통 황량한 풍경.

한참이나,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 눈부시게 물결치는 수평선을 건너다보고 있어도 답답한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어느덧 황금빛 태양은 수평선에 닿았다. 조금은 익숙해졌다 생각한 바흐의 침묵은 방 안 공기를 짓누르고 무겁게 압박해왔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다. 바흐의 나이쯤 되면, 아픈 사랑, 시시한 사랑, 그저 그런 사랑, 열정적인 사랑 등 이런저런 연애를 한 두 번 겪었을 거라는 거.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이상, 많은 사람을 만날 테고, 영화나 순정만화처럼 서로가 처음일 수는 없다는 것쯤은. 그리고 이젠 라희 역시 훗날 만날 다른 사람에게 처음일 수가 없었다.

"........"

라희는 창밖을 건너다보던 시선을 내려 창틀을 멍하니 응시했다. 휴양지 맨션 관리업체에서 정기적으로 청소해 먼지 하나 없는 흰색 창틀을 가만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기억 속 아른거리는 바흐 지갑 속 스냅사진이 떠올랐다. 우연히 집어들어 봤을 때. 그때는 몰랐다. 귀퉁이 낡은 스냅사진을 봤을 때 왜 가슴이 시렸는지. 지금보다 더 풋풋한 모습으로 태양처럼 환하게 웃고 있던 사진 속 그녀. 라희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지금은, 알 것 같다.

명백한 질투. 지금 머릿속 가득 찬 감정이 질투라는 것쯤은. 그것도 형체도 실체도 없는 과거의 이유진에게. 오늘 라희에게는 처음일 수밖에 없는 바흐의 생활 속 일상을 당연한 듯 누렸을 그녀. 함께 사는 동안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먹고, 시간을 보냈을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그. 함께 웃고 있는 둘만의 추억이 담긴 사진.

'나는, 고작.'

라희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가 혼자 담긴 사진을 몇 장 찍는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는데.'

거기까지 떠올리자,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마음을 탁 틔워줄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복잡한 생각이 회전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차게 얼려버릴 쌀쌀한 겨울바람이.

"요 앞 바닷가에 산책 좀 갔다 올게요."

라희는 코트를 집어들고서 휴대폰을 유심히 집중해 읽고 있던 그를 향해 말했다. 라희의 말이 들리자마자, 바흐는 휴대폰 화면을 팟 하고 검게 꺼트리고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지."

현관 앞 옷장에서 긴 코트를 꺼내 걸쳐입은 그의 손을 잡고, 저택을 나섰다. 겨울이라 누렇게 말라버린 들풀 사이로, 오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사이, 나무로 된 좁은 판자길이 백사장까지 쭉 뻗어 있었다.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가면 딱 맞을 판자길 위를 손을 잡고 걸었다. 신발 밑창에 눌리는 넓적한 나무판자는 삐걱거리며 메마른 소리를 냈다. 판자 귀퉁이마다 뭉그러진 모양새는 짠 바람에 쩔고, 습기와 염도에 낡고 부스러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판자길을 벗어나니 드넓은 해안의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맑은 날씨니만큼, 바다는 잔잔했지만, 아무것도 막힐 게 없는 탁 트인 북대서양에서부터 넘실대는 파도는 높았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밀려 들어와 백사장 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라희는 앞으로 걸었다. 발밑에서 부드럽게 파이면서 눌리는 모래의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진다. 뺨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의 싸늘함 가운데 맞잡은 손을 통해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바흐도 묵묵히 보조를 맞춰 걸으며 옆에 머물렀다. 낮은 태양이 만들어낸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얀 모래사장 위에 길게 뻗어졌다.

한참을 걷다가, 라희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옆에 있던 그도 가만 멈춰 섰다.

"노을이네요."

한 손을 이마에 살짝 짚어 차양을 만든 라희는 수평선 너머에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응."

그도 고개를 돌려 수평선 아래로 침몰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과 바다를 온통 오렌지빛으로 발갛게 물들이던 일몰을 바라보던 라희의 눈길이 서서히 이동해 바흐의 옆모습으로 미끄러졌다. 눈길이 머물렀다. 황량한 겨울 바다처럼, 혹은 어스름이 내려앉은 사막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남자.

'아아..'

머릿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탄식처럼. 옆에 우뚝 서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 똑똑히 자각할 수 있었다.

단지 과거일 뿐인 사진 속 이유진이 미치도록 부러웠던 이유.

'.....좋아하는구나. 내가."

라희는 자연스레 이어지는 다음 단어에 희미한 미소를 흘려보냈다.

'그를.'

어쩔 수 없는 긍정으로, 깔끔하게 인정하고 나니. 그간 마음 답답하고 뒤숭숭했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조금 평온해진 기분으로, 라희는 바로 앞에 서서 일몰에 시선을 멀거니 고정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탁 트인 광경 속 일몰과 함께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낯익었다.

'일몰이라…….'

기억을 더듬느라 눈동자를 허공에 들어 가만히 굴리던 라희는 이내 맞잡은 손에 힘을 꼭 주어 그를 바짝 붙잡았다. 손에 느껴지는 악력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거."

"......?"

라희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아냈어요."

"무슨..?"

바흐는 미간을 좁히며 나직하게 물었다. 라희는 커다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라희의 표정을 살폈다.

"선셋이요. 예전에, 사막에서 했던 말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느라 눈매가 가늘어지는 그를 향해 라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

"One day,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어느 날, 나는 마흔 네 번의 일몰을 보았지.)어스름이지는 사막의 한가운데서 그가 벌겋게 가라앉는 태양를 보며 중얼거렸던, 그 말.

그는 묵묵히 라희를 바라보았다. 아래로 좁혀진 어두운 검은 눈동자는 묘한 이채를 띠고 있었다. 석양이 반사되어 마치 테두리에 금박을 입힌 새카만 흑요석 같다.

"어린왕자. 6장. 맞죠?"

숙제를 확인받는 모범 학생처럼,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려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래."

그는 석양의 음영이 낮게 드리워진 눈매로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라희는 손에 잡힌 묵직한 손을 바짝 다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매를 올려 밝게 웃어 보였다.

"몇 번이나 검색해서 겨우 찾아냈거든요. 그러니 꼭 대답해 주세요."

".....무엇을?"

어느 날 호텔 방에서,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던 그를 보면서 불현듯 사막에서 그가 했던 말이 희미하게 떠올라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했었다. 단서는 일몰(sunset)과 44회(forty-four times). 그것조차 44인지 43인지 헷갈렸기에 이리저리 검색한 결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덕분에 초등학교 때 학교 권장도서 리스트에 등재되어 겨우 숙제하듯 읽은 어린 왕자를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리고 일하는 그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업무에 방해될 거 같아서 당시에는 묻지 못했지만, 내내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책 속에 나왔던 제법 긴 문장이라, 틀리지 않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재빨리 문장을 나열해본 라희는 행여 잊을세라 단숨에 말을 뱉었다.

"on the day of the forty-four sunsets, Were you so sad, then?"

(마흔네 번의 일몰을 보았던 날, 당신은 그렇게도 슬펐나요?)침묵.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소설 속 어린 왕자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라희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유심히 내려다보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서 멈춰 있다가, 그를 향해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쪽.

가벼운 입맞춤. 바닷바람에 차가워졌지만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

심장까지 파고들듯, 가늘어진 깊은 눈매로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고는,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Are you sad, now?"

(지금은 슬픈가요?)

그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다. 깊은 눈매 안쪽 아래로 낮춰진 가지런한 속눈썹이 바로 가까이에서 보였다.

-쪽.

좀 전과 같은 가벼운 입맞춤. 서늘한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다가와 맞닿은 입술. 등 뒤로 둘리는 팔.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 그에게 몸이 밀착되면서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지고 바깥 기온과 확연히 다른 온도의 뜨거운 숨결이 가득 흘러들었다.

더운 숨결이 공기 중으로 연기처럼 흩어지는 가운데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들어와 혀끝을 훑는 촉촉한 혀. 입안을 가득 적시고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뜨끈한 타액.

서로가 서로의 입술을 찾으면서 벌어진 입이 깊게 맞물렸다. 맞닿은 혀와 혀가 아프도록 엉키면서 바닷바람에 시달린 차가운 뺨이 맞비벼진다. 미끈한 혓바닥과 혓바닥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다가 온몸에 열기를 피워냈다. 은밀한 근육이 조여들면서, 몸이 달아오른다. 온몸에 나른하게 퍼져드는 후끈한 쾌감.

"하아..."

질고 진한 키스. 마침내 입술이 떼어졌다. 싸늘한 바닷바람이 뜨끈하게 젖은 입술 위를 차게 스치고 지났다.

나른한 한숨 흘리며, 몽롱하게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라희를 향해, 바흐는 수묵화처럼 번져나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서 답했다.

"Never."

(전혀.)

가볍게 어깨를 감싸 안아 품에 끌어안고서, 맞잡은 작은 손에 누르듯 힘을 주어 쥔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제 들어갈까?"

귓가에 닿은 달콤한 음성.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라희가 열기로 들떠 붉어진 뺨을 감추듯, 작은 소리로 답했다.

"....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4회에 저말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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