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53화 (15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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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 먹을래?"

그가 물었다. 라희는 미국식 풍요로운 제품 진열대를 눈으로 훑었다. 사우스 햄턴 시내의 유일한 대형마트인 월밤(Waldbaum's). 미국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이 차고 넘쳤다. 각종 과일들은 생과일부터 샐러드용으로 슬라이스 되거나 한입 크기로 썰려서 다양한 용기에 담겨 있어 진열대 위를 빡빡이 채웠다. 그 뒤로 보이는 고기, 유제품, 가공식품, 채소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앞 과일 진열대를 유심히 보던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까지 여기서 있을 건데요?"

"내일?"

지금은 한낮이니, 점심 저녁 그리고 아침까지? 별장으로 돌아가 먹을 음식의 양을 어림잡아야 했다.

"내일 언제까지이요?"

"글쎄."

그는 쇼핑 카트에 버터 한 팩을 내려놓으며 애매하게 답했다. 라희는 입술 끝을 오므리다가 결론을 내렸다. 부족한 것 보다는 남는 편이 낫긴 하다. 내일 저녁 분까지 넉넉하게 챙기면 될 거 같아서 먼저 눈앞에서 유혹하는 1인용 생과일 믹스컵을 10팩 담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바흐가 불쑥, 붉은 과일팩 하나를 내밀었다.

"체리는?"

희미하게 장난기 어린 짓궂은 표정. 체리를 보자마자 기억났다. 뉴욕으로 오는 전세기 안에서........

순간 몸이 반응해 약간 뜨거운 기운이 안에서 솟구쳤다. 라희는 눈앞에 디밀어진 동글동글하고 탱탱한 체리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미간을 좁혔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 자극에도 얼굴이 촌닭처럼 화끈 달아올라 어찌할 줄 몰라 했겠지만, 이제는 멘탈이 단련되었는지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감추고 태연한 척 할 수 있을 거 같다. 라희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체리를 바라보다가, 짧게 숨을 들이켜고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올리고 대꾸했다.

"초콜릿도 필요하겠는데요?"

그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샴페인도요."

피식,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달콤하게 들려왔다.

라희는 그 뒤로 진열대를 돌아다니며 치즈, 슬라이스 햄, 샐러드용 채소 그리고 식빵을 차례로 담았다. 이 정도면 대충 두 끼 정도는 간편한 샌드위치를 해먹으면 될 거 같았다. 디저트는 과일을 곁들이고. 그다음엔 또, 뭐지?

"이거."

옆에서 가만 라희가 고민하는 것을 지켜보던 바흐는 새하얀 달걀 한 팩을 카트 안으로 넣었다. 아, 달걀이 빠져 있었구나. 햄, 치즈, 달걀은 샌드위치 필수 삼종 세트인데.

"잊을뻔 했네요."

"샌드위치?"

"네."

가만, 그다음에는 마실 음료가 필요할까? 주스? 우유? 물.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도착하자마자 차를 타고 마트로 왔으니 별장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마실건 뭐로 할까요? 주스 괜찮아요?"

"OJ."

OJ(orange juice)? 오렌지 주스? 그게 가장 무난하긴 했다. 라희는 카트에 주스를 넣었다. 샌드위치 재료 끝. 그리고 또?

"나머지 식사는 어떤 거로 할까요?"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무난하지."

그의 대답을 들은 라희는 고심했다. 둘 다 낯설어서 요리가 자신 없었다. 스테이크는 그냥 후라이팬에 올려 놓고 굽기만 하면 되려나? 파스타는? 끓인 소스에 넣고 뒤적뒤적? 조리법을 고민하면서 가만 서 있는데 그가 손을 잡아 이끌었다.

라희는 고기코너로 이동하는 그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영국에서도, 미국에 와서도 누군가와 쇼핑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마주 잡은 따뜻한 손이 기분 좋았다. 더군다나 이런 생활 흔적 물씬 풍기는 대형마트라니. 바흐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은 장소다. 이렇게 함께 있으려니 정말, 어색하지만 뭔가 솜털이 간질간질하는 것 같은 몽실몽실한 기분.

"음......."

큼지막한 고깃덩이가 팩에 담겨 새빨간 선홍색으로 줄줄이 놓여 있는 진열장으로 몸을 기울이고서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라희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카메라 효과음 소리가 나자 그가 고개를 돌려 라희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왜."

"기념이요? 마트는 처음이라서."

라희는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라희도 어쩔 수 없는 충동이었다. 고기코너라서 환하고 밝은 핑크빛 조명이 바흐의 얼굴 윤곽을 또렷하게 드러나게 했는데, 조명 색상 때문인지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부드러운 핑크빛이었다.

매끄러운 이마, 높은 코, 아래로 향한 가지런한 속눈썹 안쪽 깊은 눈매 그리고 단정한 입매. 또렷한 윤곽의 얼굴선이 꿈꾸는듯한 몽환적인 연분홍색으로 희게 반사되니까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무음 모드는 없는 걸까? 매번 이렇게 소리가 나니, 도촬이 불가능하다.

라희가 머뭇거리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자 무언가를 생각하듯 비스듬히 내린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스테이크용 고기 두 팩을 카트에 옮겨 담았다. 두껍고 동그란 모양으로 보아 부위는 안심 같았다.

그 뒤 파스타 코너로 가서 스파게티 면과 토마토소스를 담고 차례로 이동해 슬라이스 양파, 다진 마늘, 썰린 파프리카, 손질 브로콜리, 동글동글 귀여운 브뤼셀 방울 양배추(Brussels sprout)를 담아 계산대로 향했다.

"술은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카트 안에 담긴 체리 팩을 보며 라희가 묻자, 그가 살풋 미소 띤 눈매로 가만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글쎄?"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 장난스럽게 놀리는 목소리.

"괜찮아요. 저는 초콜릿도 샴페인도 전혀, 필요 없으니까."

짐짓, 뾰로통한 목소리로 무심한 척 대꾸하자, 움찔.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한쪽 팔로 허리를 감싸 자신을 향해 가볍게 끌어안은 바흐가 고개를 낮춰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주류는 셀러(cellar:저장고)에 있어."

얕은 숨결과 함께 은은한 체향이 훅 코안으로 끼쳐왔다. 라희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몇 번 빠르게 깜빡여 아래로 뜨고는, 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초콜릿은요?"

귓가에 머물던 입술이 느릿하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닿을 듯, 말 듯. 얕은 숨결이 뺨 위로 흩어졌다. 작은 입술 근처에 가까이 다가온 단정한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가면서 살짝 잠긴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독히도 유혹적인.

"굳이, 필요 있을까."

눈 아래 보이는 단정한 입술을 향해 라희가 먼저 턱을 내밀었다. 쪽. 짧게 맞닿아진 입술은 언제나 그렇듯 따뜻하고 보드랍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가만 라희를 바라보았다. 안쪽이 잔뜩 죄여 드는 기분.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묘한 갈증.

후끈,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달아올랐다. 맞닿아 떨어진 입술 위가 진하고 달게 타들어가는 것 같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라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슬그머니 턱을 움직여 얼굴을 비꼈다. 순간, 라희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리를 감싼 팔이 단단히 죄어왔다. 묵직한 팔로 허리가 조여들자 아찔하게 숨이 막혀왔다. 그때였다.

"엣, 에헴."

어느새 차례가 되었는지, 두 사람을 앞에 둔 계산대 판매원이 정신 차리라는 듯한 헛기침 소리를 냈다.

"음음. 254$입니다. 현금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카드?"

스르륵,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풀어지면서 바흐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완료했다. 그는 짧은 숨을 내쉬고 계산대 끝쪽에 놓인 종이가방 가득 담긴 식료품을 두 팔에 안아 들고서, 라희에게 눈짓하며 주차장으로향했다.

"여기는 미국 드라마세트장 같아요."

라희가 탄 노란색 스포츠카가 부드럽게 도로 위를 지났다. 밝은 거리 위로 부서지는 햇살 때문인지 깔끔한 거리는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한적한 아스팔트 도로 양옆으로는 깨끗한 흰색과 아이보리톤의 1층짜리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주륵 늘어서 있다. 런던이나 뉴욕이나 소도시로 가면 갈수록 발견하게 되는 묘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거리에 오가는 사람 중 대부분이 백인이라는 거다. 유색인종은 대도시에 주로 보였다.

구름조차 하나 없이 맑게 갠 청명한 푸른 하늘, 잘 정돈된 찬란한 거리, 액세서리나 팬시용품을 취급하는 소품 가게라고 착각해도 손색없을 만큼 깔끔하고 예쁜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 한적하게 지나는 백인들.

그 가운데 길게 뻗은 대로 위를 유유히 미끄러지는 샛노란 스포츠카. 비록 기온은 차갑지만, 조각처럼 또렷한 윤곽의 미남이 정면을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다. 차가 움직임에 따라 바람에 산들 휘날리는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깊은 눈매를 위를 간지럽힌다.

"......."

라희는 한 손으로 뺨 위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연신 귀 뒤로 넘기면서, 다른 한쪽 팔은 창틀에 기대어 가볍게 턱을 괴고서 운전 중인 바흐를 감상했다. 생각해보니,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본 것은 오늘 처음이었다.

'저렇게 단정한 자세로 전방을 주시하면서 운전하는구나.'

라희의 낮아진 눈빛이 그에게 멈춰 머물렀다. 고급스러운 휴양지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완벽하게 예쁜 사우스 햄튼의 거리만큼이나 평범한 일상과 괴리되어 보이는 그다.

"왜."

신호등에 멈춰 서자,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흘깃 눈짓하며 물었다. 라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몇 번이나 물어본 거 알아요? 왜. 왜. 이렇게요."

바른 자세로 핸들을 잡고 앞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미간을 좁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조금."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그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 달라서."

라희는 나른하게 내리뜬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비스듬히 그를 향해 고정하고서, 뺨 위를 스치는 찬 바람을 맞았다.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리저리 휘날려도 그대로 고개를 고정하고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머릿속 가득, 눈 안 가득, 지금의 모습을 새겨두고 싶어서.

차츰 운전 중인 그의 주위로 스치는 풍경이 점차 황량한 자연의 모습으로 바뀌다가 이내, 먼바다가 배경처럼 길게 펼쳐져 보였다.

"…. 아름답네요."

라희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라희에게 눈으로 물었다. 라희는 턱을 들어 저 먼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겨울 바다요. 호젓하니 고요해요."

.........누구처럼요.

침묵으로 삼킨 뒷말은 마음속 깊이 가두었다. 라희의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번잡한 여름과 달리 고즈넉하지."

"어. 저기네요."

라희가 팔을 길게 뻗어 앞에 보이는 에오그르 별장을 가리키며 과장된 목소리로 크게 외치자, 그는 의아한지 미묘하게 가늘어진 눈매로 턱을 비스듬히 기울이다 핸들을 돌리며 답했다.

"그래. 도착했군."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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