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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52화 (15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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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지만 눈부시게 맑은 하늘. 투명한 대기. 그리고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푸른 북대서양 바다와 선이 또렷한 육지. 한가지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귓가에 끊임없이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가 윙윙윙 들려온다는 거.

버즈 알 아랍, 맨해튼, 그리고 지금. 총 3번째. 이쯤 되면 제법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탑승 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 6인용 헬리콥터 안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 그는 휴대폰에, 라희는 창 아래 시선을 던졌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아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라희가 말하자, 이내 귀에 덮어쓴 커다란 헤드폰을 통해 바흐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햇살이 밝게 비쳐드는 토요일 아침. 평소처럼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다가 문득 입술 위로 내려앉은 낯선 감촉에 눈을 떴다. 어느 틈엔가, 잠에서 먼저 깬 그가 입술 위에 키스하는 중이었다. 먼저 깬 바흐의 입에서는 양치했는지 상쾌한 멘톨향이 향긋하게 풍겨났다.

코끝을 스치는 청량한 향에 잠에 빠져있던 정신이 확 들자, 반사적으로, 라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침부터 역한 모닝 브레스(morning breath: 아침 입 냄새)로 그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되는 짧은 키스에도 입술을 열지 않은 채 입매 끝에 힘을 주며 굳건히 버텼다.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키스를 멈추고서 뺨 위로 흐트러져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가닥 한가닥 집어 귀 뒤로 차근차근 넘겨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일어나. 아침이야."

라희는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리고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로 욕실로 뛰다시피 걸어가 숨듯이 문을 닫았다. 그 뒤, 개운하게 세수를 하고 꼼꼼한 양치질까지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바흐는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라희는 침대 테이블 위의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라희에게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에게는 늦은 아침.

"오늘은, 회사 안가세요?"

뉴욕에 머무는 동안 주말 평일 구분 없이 새벽같이 출근해 일했던 그였기에, 아무리 토요일이라 해도, 이런 아침 시간에 그가 침실에 있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 주는 괜찮아."

바흐가 시선을 비스듬히 해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대답했다. 굳이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저 휴대폰만 쥐고 있으면 늘상 업무중인 것처럼 보인다. 라희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거실로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라희를 불러 세웠다.

"나갈거니까, 준비해."

"어디로요?"

라희가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묻자, 바흐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라희가 볼 수 있게 돌렸다. 길고 곧은 손가락 사이에 들린 네모난 화면 안에는 길게 펼쳐진 바다를 앞에 둔 현대적인 건물이 보였다. 사진만 보여주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딘데요?"

라희가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

"사우스 햄턴. 모처럼의 휴일이니까."

그 뒤로 버틀러에게 짐을 맡기고 조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 룸으로 돌아오니, 현관 앞에 나란히 여행 가방들이 놓여 있었다. 이는 객실 내 손님의 짐을 알아서 챙겨주는 패킹 서비스(Packing Service)로, 체크 아웃 전 일일이 소지품을 챙기는 번거로움 없이 버틀러가 알아서 처리해 준다.

그 뒤, 바로 체크 아웃을 하고 맨해튼 헬리포트를 출발해 사우스 햄턴까지 약 40여 분의 비행이 시작되었다. 라희는 빠르게 바뀌는 창문 아래 지상 풍경을 보며 대충 지형을 가늠해 보았다.

지난번 테터보로 공항에서 탔던 것과 동일한 헬리콥터가 맨해튼의 높은 빌딩 숲을 속도를 높여 벗어나자, 빽빽한 도시 풍경이 펼쳐졌고, 거기를 좀 더 지나니 마치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한적한 교외의 주택들이 보였다. 바둑판처럼 딱딱 배열된 2층에서 3층짜리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 주택들이 길게 뻗은 곳을 통과하니, 그야말로 야생의 들판과 숲이 넓고 끝없이 펼쳐졌다.

여행중에 보았던 영국의 숲이 아담하고, 낮은 초목의 평지가 대부분이었다면, 미국의 숲과 들판은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서 한참을 지나자 마침내, 바흐가 휴대폰으로 보여준 지형과 비슷한 바다와 육지가 혼재된 긴 해안선이 보였다.

라희에게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이 전부였지만, 뉴욕주는 생각보다 넓었다. 육지에 바다를 낀 롱아일랜드를 비행하는 헬리콥터는 한참을 날아갔다. 이윽고, 바게뜨 빵 모양으로 생겨서 양옆이 바다인 길고 좁은 지형을 비행하던 헬리콥터가 바다 한가운데 한일자로 뻗어있는 지형쪽으로 점차 고도를 낮추며 다가갔다.

인적 없이 드문드문 거대한 저택들만 섬처럼 세워진 황량한 가운데 왕복 2차선의 나 있었는데, 가운데 주황선이 그려져 있어 한국에서나 보던 국도와 닮아있었다. 그런 길이 뻗어 나간 허허벌판 같은 바닷가 옆에, H라고 쓰인 헬리포트가 보였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리콥터 조종사는 바흐와 라희를 내려주고는 냉큼 이륙해 다시 하늘을 날았다. 맑은 푸른 하늘 위로 붕 떠오른 헬리콥터를 향해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혀 바라보던 것도 잠시, 바흐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가지. 저쪽, 택시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어."

택시는 짐을 싣고 5분여를 달렸다. 한국의 지방 도로 같은 길의 양옆으로는 지푸라기처럼 마른 황량한 들풀이 빽빽이 돋아나 있고 저 멀리 희게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다. 굳이 눈에 바다가 보이지 않았더라도 코끝을 스치는 바다 특유의 냄새와 습기로 이곳이 해안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나 봐요."

라희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봐도 도통 찾을 수 없는 창밖을 건너다보며 중얼거렸다.

"여름 휴양지라서. 겨울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아."

그제야 납득이 갔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양옆으로 바다인 지형이라, 여름에는 꽤나 근사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택시는 국도 옆으로 뻗어난 좁은 길에 진입하더니, 이내 커다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저 안쪽 큰 저택 건물과도 꽤 멀리 떨어진 거리. 저기까지 걸어가야 하는 걸까 생각하는데, 마치 마법처럼 대문이 활짝 열렸다. 택시 기사는 큰 저택의 현관 앞에 여행용 트렁크와 라희를 내려주고서, 바흐가 건넨 후한 요금에 매우 만족해하며 떠났다.

"이곳은 어디예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벌판에 서 있는 거대한 저택.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건물 안팎은 깔끔해 보였다. 바흐는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카드키 같은 리모컨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자, 저택의 현관문이 달깍 하고 열렸다. 조금 전 대문도 저런 식으로 열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고모님 별장."

그는 짐을 두 손 가득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가 몸을 돌려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라희도 뒤를 따라 남아 있는 핸드백과 자질구레한 짐이 든 쇼핑백을 손에 들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거대한 저택 내부는 내로라하는 백만장자의 은신처답게,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 총 8개의 침실, 9개의 욕실, 거대한 식당, 넓은 키친. 그저 장소만 다를 뿐, 맨해튼 팬트 하우스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모양새에 라희는 더이상 놀라지 않았다. 대충 짐을 한쪽 구석에 세워 놓은 라희는 뭔가에 이끌리듯, 거실의 전면 창을 향해 다가갔다.

탁 트인 거실 창문 너머로는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가 보였다. 투명하리만치 새파란 물결 넘실대는 북대서양의 파도가 해안가로 밀려들어오면 그대로 백사장에 잘게 부서지며 촘촘한 레이스같은 흰 물결을 남긴다. 쉴새 없이 밀려들어왔다가 쓸러나가 다시 파도가 들이쳐 오면서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촘촘한 하얀색 그물들은 모양을 달리하면 현란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유혹했다.

과연, 백만장자의 휴양지라는 명성답게 집 바로 앞 펼쳐진 짧은 초목지대를 지나면 눈부신 하얀 백사장와 망망대해 같은 겨울바다가 막힘 없이 뻗어있다.

"멋지네요."

라희가 창밖을 건너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어느 틈에 가까이 다가온 바흐가 라희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금 집 안에 통조림 밖에 없어. 일단 장부터 봐야해. 나가지."

"그럼 택시를 불러야하지 않아요?"

그를 올려다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라희를 향해, 바흐는 정수리를 손끝으로 흐트러트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그를 따라 현관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 맨션의 측면으로 돌자, 푸른색 셔터문이 내려진 차고가 나왔다. 아까처럼 리모콘 카드키를 띡, 누르자 자동 셔터가 서서히 위로 들렸고 안쪽에 주차되어있는 차량 두대가 눈에 보였다. 한대는 귀여운 청개구리를 닮은 동글동글한 노란색 스포츠카였고 다른 한대는 비슷한 느낌으로 튼튼하게 생긴 흰색 SUV였다. 둘다 근사한 외관의 미끈하게 빠진 외제차였기에 라희는 눈매를 좁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둘 다 포르쉐라서, 어떤 것으로 탈래?"

차고 안쪽 선반에 놓인 열쇠를 꺼내들면서 그가 물었다. 지금 바흐가 선택권을 주는 건가? 과묵한 그에게 질문을 하면, 대답은 충실히 한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런 선택권이라니. 왠지 생소한 느낌이었다. 라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노란 스포츠카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저거요."

귀국하면, 언제 다시 이런 차를 타보겠는가.

"자."

바흐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라희가 차안으로 몸을 미끄러뜨리며 탑승하자, 그는 이내 운전대를 잡았다. 고급스러운 스포츠카의 차량 내부는 생각보다 비좁았다. 라희는 뒤의 좁은 공간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따로 트렁크 공간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서, 아마도 장을 보면 저 뒷좌석 같은 공간에 짐을 실어야 할 듯 보였다.

그가 키를 꽂아넣어 가볍게 돌리자, 후방에서 경쾌한 엔진음이 들림과 동시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면서 차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열린 차고 문밖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스포츠카는 대문을 벗어나 좁은 국도 길을 달려갔다. 라희는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눈부신 해안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바흐에게 물었다.

"이거, 위는 안 열리나요?"

영화에서 보면, 이런 스포츠카들은 대부분 오픈형이던데. 지금 타고 있는 차는 비좁고 답답한 실내였다. 이런 인적 드문 탁 트인 도로에서 오픈카를 타고 그 누구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슝하니 달리는 것도 상당히 멋질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추울 텐데."

바흐가 핸들을 직진 방향으로 바로 붙잡고서 짧게 답했다.

"괜찮아요."

"음."

그가 버튼을 누르고나서 서서히 차량 속도를 낮추자 이내, 맨 뒤의 트렁크를 덮고 있던 공간이 열리고 급겹한 찬바람이 불어닥쳐 매섭게 휘몰아쳤다. 뒤로 들린 덮개가 후미로 젖혀지면서, 라희의 바로 위를 덮고 있던 천정이 뒷좌석 쪽으로 들어가고 그 위로 트렁크 쪽에 머물렀던 뚜껑이 돌아와 내리덮었다. 자동차 속도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뺨에 닿는 찬 바닷바람이 얼얼했다.

"만족해?"

그가 묻자, 라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다가 팔꿈치를 창틀에 기대고서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네. 아주 좋아요."

처음 타보는 스포츠카였지만, 왜 사람들이 뚜껑 없는 차를 선망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탁 트인 공간이 주는 아찔한 해방감. 곧게 뻗은 길가 양옆으로 훤히 드러난 바다풍경에 마음까지 뻥 뚫리는 기분. 추운 날씨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라희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시선이 사라지자, 고개를 바로 돌려 그의 높고 매끈한 옆모습을 홀린듯 바라보던 라희는, 문득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휴대폰을 들었다. 한 손으로 그를 향해 휴대폰을 들어올려 고정시키고 화면 가운데 포커스를 맞췄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소리를 들은 그의 모습. 다시, -찰칵.

".......?"

의아해하는 표정.

-찰칵.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누른 라희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밝게 말했다.

"기념으로요."

그에게서 휴대폰을 받은 이후, 처음 찍어본 사진.

어쩐지 멋쩍어진 라희는 고개를 휙 돌려 푸른 북대서양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길게 뻗은 수평선, 갈매기들만이 오가는 한가로운 한낮의 평화로운 바다 풍경은 마치, 이 시간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먼 수평선 너머로 눈매를 좁히던 라희는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머리를 비우고,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자고. 이토록 눈부신 그를, 시간을, 풍경을.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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