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51화 (151/214)

151

어스름이 진하게 내려앉은 맨해튼 5번가의 거리는 화려한 조명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서울의 밤거리가 알록달록 각기 다른 색의 향연이었다면, 이쪽은 통일된 옐로우 계통의 조명이 그라데이션만 달리해 거리를 밝히고 있다.

특히, 오늘은 금요일 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1월의 생동감과 활기찬 약동이 통통 튀는 뉴욕 도심의 밤거리. 작년 이맘때 이곳을 거닐게 될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래서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걸까.

황금빛 색과 눈부신 조명 그리고 분주한 분위기에 취해 홀린 듯 거리를 걷다가 건물 사이로 불어온 쌀쌀한 겨울 밤바람이 몸을 휘감으며 지나치자, 라희는 코트 자락을 단단히 여며 앞을 보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미스 송."

세인트 레지스 정문을 지키는 호텔 도어맨이 얼굴을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벌써 1월 중순. 이곳에 머문 지도 한 달 가까이 되어가서인지, 실내를 걷다가 마주치는 직원들의 얼굴들이 모두 낯익다. 대부분 눈을 마주치면, 미스 송이라고 점잖게 성을 부르며 인사하곤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수를 누른 라희는 한층 한층 숫자를 달리해 변하는 전광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흐 덕에 뉴욕의 심장부에 위치한 유서깊고 고풍스러운 세인트 레지스의 디자이너 스위트를 각각 로테이션해서 묵었다. 이런 팔자에 없을 사치스러운 경험을 실컷 만끽하다 보니, 이제 앞으로 어느 도시에 있건, 어느 나라에 있건 어지간한 방은 눈에도 차지 않을성싶다.

"슬슬 퇴장할 시간일까."

호텔 방으로 들어와, 밀라노 스위트의 거실의 불을 환히 켠 라희가 내부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꿈같고 화려한 놀이동산에서 퇴장.

실상, 뉴욕에 바흐를 따라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결말은 예상했던 바다. 바스에 머물다 한국으로 귀국할 것을,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 있는 이 도시까지 굳이 방문한 이유는 다름 아닌 이유진 때문. 그녀에게 억울하게 따귀를 맞은 복수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시일이 지난 지금, 원래의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했다. 그럼에도, 며칠 전 파티장에서 처참하리만치 초라하게 홀로 남겨진 이유진을 뒤로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사념들로 갈래갈래 나누어진 생각들 때문에 어지러웠고, 마음은 커다란 바위를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아마도....

라희는 소파에 털썩, 앉아 몸을 기대고서 하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세인트 레지스 스위트의 천장은 마치 비어있는 흰색 칠판 같아서 난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풀어놓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눈매를 좁히고 생각에 잠기려니, 천장 위로 지난 브랜다의 집에서 바흐와 유진이 함께 있던 장면이 낡은 활동사진처럼 선하게 보이는 듯 하다. 애원하듯 매달리는 유진. 차갑고, 싸늘하게 쳐다보던 바흐의 시선. 냉담한 말투. 냉정한 태도.

일말의 정중함과 예의도 비치지 않는 서늘한 눈빛. 차라리, 이유진이 완벽한 타인이었더라면 그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았을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어찌보면, 속 시원하고 고소할 장면이 왜 이리 먹먹하게 느껴지는 걸까. 라희는 천장에 각인처럼 새겨져 보이는 두사람의 잔상을 외면하기 위해 시선을 낮춰 눈동자를 굴렸다. 흔들리는 눈빛이 방안 이곳 저곳을 배회했다.

바흐가 연인이었던 유진에게 그토록, 냉혹하고 야멸찬 태도를 취했다는 거.

그 순간 만큼은, 라희는 복수를 완성한 자신의 입장이 아닌, 이유진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렸다.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가정.

'내가 만약......'

그리고 마음 속으로 찾아든 자연스러운 결론.

'나역시 그리 될 수 있다. 언제까지고 이유진의 처지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결혼까지 생각한 오랜 연인인 두 사람도 결국 갈라섰다. 고작, 반년? 라희는 바흐를 만난 시기를 가늠해보았다. 미라가 워킹 홀리데이 간다고 들떠 있던 초여름, 막 대학교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6월 말. 그리고 지금은 해가 바뀐 1월. 중간 영국에 홀로 지낸 두달과, 그가 뉴욕으로 가버린 기간을 제하고 나면, 실지 만난 기간은 한손에 꼽을 정도의 반년도 안되는 시간이다.

'게다가....'

짧은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낮춰 바닥을 바라보는 잠잠한 갈색 눈동자가 차츰 좁혀졌다. 뇌리속으로 제프가 오늘 던졌던 질문들이 머릿속으로 어지럽게 둥둥 떠다녔다. 라희는 하나하나 진실된 대답을 해보기로 했다.

-평범한 관계는 아닌가 봐요?

그렇다. 보통과는 거리가 먼 관계. 자연스레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시작한 관계가 아닌, 돈을 매개로한 계약관계다.

-설마, 진짜 돈 때문에 만나는 거에요?

처음에는 어쩔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가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다. 토탈 2억. 1억은 위약금이었고, 받은 1억 중에 6천만원으로 빚을 제하고 나니 수중에 남았던 돈은 4천도 되지 않지만. 2억은 엄연한 빚이고 어마어마한 액수다. 키스 한번으로 변제해버렸다는, 마음속 치밀어 오르는 수치스러운 뻔뻔함을 억누를 수 있다면, 이제 바흐와 표면적으로 얽힌 금전관계는 없다. 현재는.......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 나온다. 라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더 높은 가격을 불렀나요?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의 곁에 머무르는 건가요?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수십번 되뇌였다시피, 유진에게 앙갚음 혹은, 분풀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뉴욕에 왔다.

'그런데, 끝났잖아?'

희뿌연 의식속에서 뾰족한 가시처럼 위로 튀어오른 질문.

그래 끝났다. 미션 컴플리트 (Mission Complete: 임무 완료).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러면...........'

라희는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인정해야지. 이젠 돌아가야 한다는 거.

고개를 들어 화려한 스위트 내부를 살폈다. 세련된 일류 디자이너가 선정한 최고의 품격이 담긴 인공적인 공간. 일상과 괴리된 화려한 곳. 마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차가운 쇼윈도 건너편 영롱하게 빛나는 티파니 보석 같이 눈부시면서도 아스라한 장소.

여기서 더 있다가는,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은 앨리스가 되어 영원토록 헤맬 것 같다가, 어느 날 이유진처럼, 싸늘한 바흐의 시선을 받아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아마도 감당치 못할 충격일터. 한동안, 아니, 단언컨대 평생. 너절한 현실과 조우한 지긋지긋한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겠지. 핑크빛 달콤한 꿈을 꾸다 갑자기 눈을 뜨니 질척이는 어두운 심연으로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일 테니까.

골똘히 좁혀진 미간에, 지난번 제프가 했던 말이 떠다닌다. 대학 졸업하고 뭐할 거냐는 물음.

-교사나 공무원 아니에요?

-라희씨 같은 타입은 말이죠, 평생직장을 선호하더라고요. 안정되고 든든한 직장.

라희는 파르르 두 눈을 내리감았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 꿈에서 깨면 현실을 마주해야지. 이제 복학하면, 3학년 반 학기를 마치고서 4학년을 다니고 졸업. 아니다. 2학년에 시작한 교직 이수까지 완수해야 하니, 이번 여름 학기부터 계절학기를 수강해 학점을 가득 채워서 졸업 때까지 쉴새 없이 수업을 들어야 했다.

계절학기는 6월 말에 바로 시작한다. 지금 귀국하면 복학까지 남은 개월수는 넉넉잡아 5개월. 만약 공무원 준비를 한다면 학원에 등록해 정신없이 전 과목을 1 독 할 수 있는 시간. 혹은 교직으로 미래를 굳히고 싶다면 최대 난관인 교육학을 1번 수강하면 딱 알맞을 기간이다. 거기다 원활하게 취업하고자 한다면 한국사 검정능력시험과 한자 급수시험을 필수로 쳐야 했다. 아마도, 두 가지 시험을 치르고 나면 바로 복학해야 할 듯싶었다.

귀국하면 사는 곳도 정해야 하는데, 마음속 한구석에서 이미 기숙사로 굳어졌다. Q대에 새로 증축한 기숙사 생활관 덕분에 신청하면 언제든 입실할 수 있다. 방학 포함 2인실이 일 년에 700만 원. 수중에 남은 돈으로 졸업 때 까지 앞으로 1년 반 동안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조금 안심이 된다.

학비는 학자금 대출로 해결하고, 생활비는 집에서 보내주는 몇십 남짓으로 충당하면 공부만 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았다. 굶어 죽지는 않더라도 넉넉하지는 않은 집안 형편. 흥청망청 놀며 지낼 여유는 없으니까. 최대한 졸업 전에 취업을 완료해야 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영국과 뉴욕에서 장기 체류한 덕분에 영어 장벽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문법은 조금 더 공부해야겠지만, 지금 상태로라면 듣기 평가는 문제없었다.

'진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구나.'

머릿속 청사진이 선명해지자, 새삼 이제 귀국만 하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라희는 소파 위로 무릎을 세워 팔로 끌어안았다. 웅크리고 앉아서, 무릎 위에 얼굴을 비스듬히 기대고서 생각에 잠겼다.

돌아간다면, 앞으로 더는 오명(汚名)에 시달리지 않겠지. 돈 보고 들러붙은 창녀라는 꼬리표도, 이 남자 저 남자 손에 쥐고 저울질한다고 손가락질 받는 일도.

'실상, 남자 따윈 관심조차 없었는데.'

라희는 스스로에게 투정하듯 샐쭉 입술을 내밀었다. 물론 이런 이성에 대한 무관심에 일조한 것은 오빠였다. 같은 집에서 남매로 자라오면서 결심했다. 앞으로 오빠 같은 사람과는, 평생 엮이고 싶지도 같은 공간에 살고 싶지도 않다고. 그리고 그 결심은 단단한 확신으로 굳었다. 대학에 와서 마주친 대부분 남자들의 면면에서 오빠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그래, 평범하게 살고 싶다. 누구의 간섭이나 편견이나 판단도 없이. 그저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며 자유롭게.

"언제가 좋을까? 돌아가는 날짜는 빠를수록 좋겠지. 이번 주말? 아니면..."

휴대폰을 손에 들고 항공 앱을 실행해 날짜를 체크하는데 순간, 오늘 오후 캐서린의 레스토랑 앞에서 혜영에게 약속한 전시회 방문이 생각났다. 월요일이었다. 전시회 오픈 칵테일 파티라면 아무리 빨라도 월요일 오후쯤일 테니까, 그럼 화요일? 화요일에 귀국하는 편이 나으려나. 더이상 길게 머물 필요도 없는 곳이니까.

".........."

날짜별로 가격이 주륵 나열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화요일 귀국 비행기 표를 사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 뭔가 꽉 막힌 듯 먹먹해지는 기분. 숨을 깊게 내리 쉬며 굳게 다문 턱 끝이 잘게 떨렸다. 라희는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꼼지락 꼼지락, 소파 위 까닥이는 발끝에 시선을 낮춰 고정했다.

'뭘까. 이 찜찜하고 질척거리는 이상한 기분은.'

그때였다.

-띵동.

익숙한 초인종 소리.

그다.

라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삐 발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돌려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키 큰 남자. 단정한 이마 아래, 가지런한 속눈썹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새카만 눈동자가 라희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다녀왔어."

귀에 익은 나직한 바흐의 목소리. 이제, 정말........

'안녕.'

속으로 생각을 삼키며, 라희는 입매를 끌어 올려 밝게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자연스럽게 그의 긴 팔이 뻗어나와 몸을 감싼다. 그를 향해 기울어진 등에 닿는 단단한 손길. 은은한 체향. 아마도 이제는 그리워질, 그의 감촉.

"응."

귓가에 파고드는, 피곤이 내려 앉은 낮은 목소리를 들은 라희는 순간 충동적으로,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수고하셨어요. 진욱 오빠."

그러자 몸을 끌어안은 손이 스르륵 풀리더니, 등을 타고 올라가 뒷머리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가볍게 받치고서, 얼굴을 뒤로 살포시 기울이게 하고는 그가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이마 위로 닿았다 떨어진 따뜻한 입술. 마치 잔향처럼 남아 있는 부드러운 감촉. 그는 시선을 내려 라희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다가 다시 품으로 끌어안았다. 묵직한 온기가 몸을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조금, 먼저 상냥해져 볼까. 이렇게. 적어도 귀국할 때까지만이라도…….'

어차피 깨어나야 할 꿈이라면, 무미건조한 것보다는 달콤한 편이 좋으니까.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