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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하고 호화스러운 리무진 뒷좌석에 몸을 기댄 유진은 간이 선반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런던에서 인지도를 쌓은 재하 유의 그림은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영국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다. 초상화와 인물 중심의 작품을 발표해온 재하는, 기존 인물화의 틀을 깬 파격적인 구도와 구성으로 거울을 이용했다. 이는 내면세계를 관찰당하는 1인칭의 시점을 3인칭으로 드러냈다고 평가받았다.
내부의 공허함을 감추려고 거울을 응시하는 대상의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담한 붓놀림과 선으로 가면이나 조명에 의해 비추어진 이미지 속 속마음을 관람객들에게 불쾌하리만치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는 화가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단서인데, 삶을 공허하고 추상적인지만, 변화 가능하고 역동적인.........'
키보드 위로 다닥닥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데, 옆에서 진한 샤워코롱 냄새가 풍겨왔다. 유진은 손가락을 멈추고서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짙고 농밀한 난초향이었지만, 나이 든 남자의 살 냄새와 섞이면 농밀한 향이 되레 역했다. 특히, 이렇게 가까이 훅 끼쳐올 때.
유진은 호흡을 삼켰다. 조금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유진."
갑자기 다가온 마른 입술이 유진의 입술 위에 짧게 키스했다.
"버나드. 리슬러와 전화 통화는 끝났어요?"
유진은 입매를 올리며 밝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녀의 오랜 연인, 다국적 기업인 TGH(Tetrica Group Holdings)의 회장 버나드는 희끗희끗한 금발 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노트북을 보며 주름진 눈매를 기울였다.
"뭘 그리 열심히 쓰는 거지?"
"월요일부터 L 갤러리에서 열리는 뉴욕 데뷔전이요. 런던에서 유명한 화가인데, 뉴욕은 처음이라서요. 언론에 공개될 추가 보도 자료를 쓰고 있었어요. 제가 전담 딜러가 되었거든요. 일요일 뉴욕타임스 문화 섹션에 대대적으로 홍보할 예정인데, 금요일 저녁 6시가 기사 마감이라 서둘러야 해서 그래요. 그리고 몇몇 VIP를 초청해서 월요일 밤 오픈 파티 준비로 정신도 없네요."
올해로 60세가 갓 넘은 버나드 리체는 유진의 노트북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눈동자로 하얀 화면 위 검게 쓰인 글을 따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백금발의 속눈썹 아래, 아래로 내리뜬 투명한 잿빛 눈동자. 신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소년처럼 맑고 투명해서 유진은 그의 눈을 참 좋아했다. 잠자리에서는 가늘게 흐려져 매력적이다. 이내, 그의 주름진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유진을 향했다.
"재하 유? 아시안이군."
유진은 입술을 샐쭉하다가 답했다.
"한국인이에요. 그래서인지 전시회 관련해서 제게 먼저 컨택이 들어왔더라고요."
"쓸만한가?"
버나드가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개인 트레이너가 24시간 관리한 탄탄한 근육이 유진의 어깨에 단단하게 둘렸다. 유진은 가식적으로 붉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럼요. 영국 왕립예술학교 (RCA: Royal College of Art)를 졸업하자마자 영국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던 스캔들 메이커에요. 이제 스무 살 후반인데도 평가가 상당해서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고, 앞으로고 충분히 발전 가능성도 있어요. 더군다나 외모도 꽤 예술가다워서, 팬층도 제법 두텁고요."
"투자 가능성은?"
귓가에 속삭이듯 낮게 묻는 저음. 단순히 묻는 것이 아닌, 은근히 권하는 목소리. 포브스(Forbes) 선정 세계 200대 부자 리스트(The World's Billionaires 200)에 매년 등재되는 그의 목소리는 아찔한 돈 냄새를 짙게 풍긴다.
"음."
유진은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상품성 있는 작품이긴 했으나, 현재까지는 아주 고가에 거래되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번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완판해 보도자료를 돌린다면 화제가 될 것이고, 그 다음 전시회부터는 그럭저럭 괜찮은 가격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미술계는 감상 위주의 작품성이 좋으냐 보다는 투자 위주의 상품성이 좋으냐가 관건이니까.
"왜요?"
유진은 보톡스 주기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한 뺨에 입술을 갖다 대며 물었다. 버나드가 말한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런 식으로 관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야, 우리 여왕님께서 왕좌로 복귀한 선물을 할까 해서 말이야."
실크 블라우스를 걸친 유진의 허리 위로 두툼한 손바닥이 내려앉아 매끄러운 직물의 표면을 지그시 누르며 허벅지까지 쓸어내렸다.
"흐응."
유진은 입매를 올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재빨리 금액을 따져보았다. 재하 유의 이번 뉴욕 전시회 작품 수는 총 30점. 작은 6호짜리 작품의 금액은 5백만 원, 가장 큰 200호짜리 가격은 2억. 총 책정 금액은 10억 정도.
만약 버나드가 전매를 한다면, 통상 중개수수료인 50%보다 10% 더 요구할 수 있다. 더불어 완판을 근거로 유재하의 다음 작품까지 전속 계약을 맺는다면, 이번 전시회에서 그림을 감상했을 뿐 단 한 점의 작품도 구입하지 못한 수집가들이 안달이 날 것이고 다음 전시까지 성공이 보장된다. 단발인 이번 계약을 장기로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한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보도자료 끝에 완판이라고 추가 기재를 해야겠네요."
턱을 들어 버나드의 마른 입술 위에 진하게 키스했다.
"고마워요, 버니."
"그대를 위해서라면."
나이 든 다정한 연인의 달콤한 황금빛 목소리가 귓가를 찔러왔다. 잠시 후, 조용히 주행하던 리무진이 길가로 천천히 멈춰 섰다. 마침내 저녁 식사 장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도착했군."
버나드가 창밖을 눈짓하며 말했다. 유진은 흘깃 고개를 돌려 초록색 고풍스러운 간판에 K's 라고 적힌 레스토랑 입구를 바라보았다. 센트럴 파크 남단에 위치한 아메리칸 퓨전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주인이 한국인인 만큼, 한식과 조합한 독톡한 요리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간 스타일리시한 프렌치와 기름진 이탈리안 요리에 질려 하는 유진을 배려한 버나드의 선택인 듯싶었는데, 유진은 레스토랑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 오만하고 건방진 말을 틱틱 내뱉던 곱슬머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프. 그 싹수 노란 놈의 누나인 캐서린(Katherine) 조가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 가게주인 이름 앞 자를 딴 K's.
"여기 평가가 별로예요. 그냥, 퍼세(per se)로 가요. 최소한의 맛은 보장되어 있으니까."
유진이 창밖을 내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리자, 버나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운전기사에게 그리하라 지시했다. 그때,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유진이 소리쳤다.
"잠깐만요."
유진은 창밖을 건너다보며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K's 레스토랑 입구에는 한국인 여자 세 명과 남자 둘이 배웅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 총으로 쏴죽이고 싶은 곱슬머리와 꿈에서도 생생히 찢어발기고 싶은 여자의 하얀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창문 위쪽에 조금 틈이 생기자, 바깥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럼, 전시회에 꼭 들러! 알았지? 나 전시회 시작되면 갤러리에 온종일 있을 거거든. "
유진은 밝게 외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보통 몸매에 복스럽게 생긴 외모. 이내, 누군지 기억났다. 계약서를 작성하러 갤러리 사무실에 들른 재하유와 동반했던 약혼녀, 한혜영.
"네. 그럴게요."
하얀 얼굴이 웃으며 인사했다. 유진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라희를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저 따위, 가벼운 웃음이나 실실 흘리는 헤픈 계집. 뭐가 좋다고.
"아, 맞다. 월요일 오픈닝 때 올래? 그날 파티가 있을 거거든. 간단한 샴페인 파티라서 편하게 입고 오면 될 거야."
혜영이 덧붙였다.
"음, 잘 모르겠어요."
"에이. 그냥 와. 얼굴 보고, 그림 감상도 하고."
혜영이 재차 권하자, 옆에서 있던 재하가 거들었다.
"그래요, 라희씨. 우리 혜영이가 정말 마음에 들어 하던걸요. 다시 얼굴도 볼 겸 해서 제 작품도 꼭 와서 감상해 주세요. 이래 봬도, 꽤 인기 있거든요"
라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밝게 답했다.
"그래요. 그럼. 그날 봬요."
"그래, 잘 가."
"잘 가요."
"그날 또 보면 악연이라 하기 없기!"
모두의 인사 뒤에 제프가 마지막으로 덧붙이자 라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손인사 하고는 돌아섰다. 검은색 코트 자락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눈매를 좁힌 유진은 이내 리무진 창을 올리고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탁탁 번호를 손끝으로 찍어 누른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마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관장님?"
"파울라. 아직 퇴근 전이야?"
유진이 빠른 목소리로 묻자, 수석비서인 파울라가 긍정했다.
"네, 이제 막 사무실 문 닫고 나가려던 참이었는데요."
"거기, 내 책상 위에 리스트 파일 펼쳐 보면, 민중, 정이라는 이름이 보일 거야."
전화기 너머로 뒤적거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이내 밝은 목소리로 파울라가 답했다.
"네. 여기 있네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체류라고 메모 되어 있어요."
정민중. 나영의 시아버지이자, 역겨운 하얀 얼굴이 서울에서 내내 만났던 정선우의 아버지. 나영으로 부터 이번 미국 여행 중, 뉴욕 미술 시장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언질받은 차였다.
"그럼 방 호수랑 연락처를 텍스트(문자)로 보내주고. 좋은 주말 보내."
"네. 관장님. 지금 바로 텍스팅 해 드릴게요."
전화를 마친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지켜보던 버나드가 입을 열었다.
"여왕님의 심기가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에요. 아무 일도."
유진은 건조하게 웃으며 버나드의 주름진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무리 현대 의학으로 돈을 쏟아부어 관리해도 생물학적 노화는 숨길 수 없다. 버나드가 미소 짓자, 입매 가로 피부가 늘어지면서 골이 깊게 팼다. 앞으로 함께할 연인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갑자기 추가할 VIP 초청 명단이 기억나서요. 배고파요, 어서 식사하러 가요."
유진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며 버나드의 뺨에 볼을 부볐다. 탄력 없이 늘어진 피부 위에 기대어 기분 좋은 신음을 흉내 내 흘리던 유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대해. 우연을 가장하여 예정된 뜻밖의 랑데부(rendezvous)를 말이야.'
슬림한 검은 코트의 잔상이 아른거리는 텅 빈 거리를 보며 유진은 속으로 낮은 중얼거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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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