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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48화 (14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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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온 바흐는 소파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평소 단정한 몸가짐의 그답지 않게 등받이에 머리를 뒤로 젖히고 비스듬히 앉아서 이마에 손을 짚은 채 그대로 가만 눈을 감았다. 가지런한 속눈썹 끝이 경련하듯 잘게 떨리다가 이내 멈췄다.

고모님 집에서 호텔까지 오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던 그였기에,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라희가 식당을 향해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이쪽."

바흐가 말했다.

라희는 멈칫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눈을 내리뜬 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짙게 내리깔리 눈동자로 라희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기로."

낮게 잠긴 목소리가 넓은 거실의 정적을 깨트리며 울렸다.

"......."

라희는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소파 앞에 멈춰 서자, 바흐는 서있는 라희의 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그를 향해 끌어당겼다. 엉겹결에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 위로 겹치듯 안겼다.

바흐는 라희의 등을 손을 받치고 꽉 끌어 안있다. 그리고 바로, 가는 목덜미 위로 얼굴을 깊게 묻었다.

맨 살갗에 그의 보드라운 뺨이 와 닿고, 이내 움푹한 쇄골에 약간 까끌한 턱이 닿았다. 오돌토돌한 수염의 흔적이 피부를 찔러와 자극하는 사이, 깊이 들이마시는 호흡이 느껴진다. 피부를 간질이듯 스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자 기분이 야릇하다.

기울어진 등을 끌어 안은 단단한 팔. 커다란 손바닥이 뒤에서 어깨쭉지를 옭아매고 있다.

그의 품에 안겨 묵직한 육체가 빈틈없이 밀착해 맞닿은 느낌.

전신을 감싼 그윽한 체향. 따뜻한 온기. 얕은 숨결. 깊게 안긴 포근한 기분.

오늘 하루는 길었다. 제니퍼로 시작해서 제프를 거쳐 유진으로 끝난 정말 긴 하루였다. 하루 종일 지친 몸이 그의 품에 안기자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이는 그를 향해 괜찮아요? 라고 묻고 싶지만 그 말 대신, 라희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목을 끌어 앉았다. 가늘게 내려뜬 시야 사이로 코끝을 스치는 그의 검은 머리칼이 호흡할 때마다 작게 흔들렸다.

여린 목언저리 피부 위로 느껴지는 그의 얕은 숨결.

그가 숨을 내 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바짝 끌어안은 어깨가 천천히 위아래로 들썩인다.

묵직하게 마주 닿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의 뭉근한 울림.

두근. 두근. 서로의 박동이 뒤섞이면서 코안 가득 스며든 체향.

정신이 어질하면서,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온다. 핏줄 한 올 한 올, 나긋하게 긴장이 풀려나가는 기분. 넓은 품에 안긴 포근함이 좋아서, 머릿속이 몽롱할 정도로 아득하다. 그 달콤하고 아찔한 느낌에 몸을 맡긴 라희는 가만 눈을 감았다.

느릿느릿. 어깨를 벗어난 손길이 등을 타고 쓸어내리는 감촉.

라희가 몸을 미세히 떠는 사이, 손바닥은 허리골을 쓰다듬다가 둥근 엉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흠칫. 맨 허벅지 위로 그의 손바닥이 닿았다. 뜨끈한 온기.

사락거리는 검은색 드레스의 치맛단 러플을 밀어 올리면서 허벅지를 나릿하게 쓸어내리는 손은 거슬러 올라왔다. 드러난 살갗에 맞닿은 손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 놀란 몸이 잘게떨린다.

훤히 드러난 맨 살갖의 허벅지 아래부위에 닿은 그의 남성은 검은 정장 바지 위로 팽팽히 솟아나 뭉툭한 이물감으로 존재를 확인시켰다.

단단한 느낌을 생생히 자각하니, 아래의 깊은 곳이 순간 뭉클 조여들면서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는 갈증으로 입술 위가 타들어가며 마르는 것 같다.

곧은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 은밀한 곳으로 점차 파고들자, 자극에 들뜬 열기가 우릿하게 치솟아 올랐다. 순식간에 눈밑까지 차오른 열기로 몸이 뜨거워졌다.

"흣-."

라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손끝이 팬티라인을 더듬어 내렸다. 순간, 라희는 허리를 작게 비틀었다. 붉디붉은 작은 입술이 달싹이며 열리면서,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거웃에 닿을 듯, 팬티 라인을 들추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

목덜미 아래 가슴골 사이로 미끄러지듯 뿜어지는 긴 한숨. 치마 밑을 벗어난 손을 다시 라희의 등과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찌르르 살갗을 타고 흐르는 열기의 여운이 남아 버티기 어려웠다. 허나, 지금은 생리기간.

어느새 미끈하게 젖은 아래가 불쾌하고 찝찝하다. 라희가 그의 품을 벗어나려 몸을 조금 뒤척이자, 목덜미에 깊이 얼굴을 묻은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만."

코로 깊이 숨을 가둔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대로 있어줘."

***

뉴욕의 한낮은 정말로 쨍하니 맑다. 온몸을 감싸는 대기는 한겨울 특유의 쌀쌀한 낮은 기온이었으나, 대기는 그야말로 투명한 느낌. 공기 중을 투과하는 빛이 도시 전체를 환하게 반짝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덕스럽게 날씨가 뒤바뀌던 런던과 달리, 뉴욕은 온종일 혹은 삼사일씩 한결같은 날씨가 계속 이어져서 좋다. 특히 이런 맑게 갠 날은, 환한 도시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있는 기분까지 상쾌하다.

철제 난간에 비스듬히 팔꿈치를 기대고 어깨를 위로 살짝 세운 라희는 바로 저 아래, 새하얀 아이스 링크 위를 이리저리 미끄러지면서 활짝 웃고 있는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침,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혜영의 전화를 받고 일어나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니 약속 시각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룸에서 지내기에는 어쩐지 어색했기에 일단 호텔 밖으로 나와 별 생각 없이 걸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보니 이곳, 센트럴 파크의 아이스링크였다.

한참을 초점 없이 바라다보고 있으려니, 저쪽 구석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밝게 웃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둘 다 백인인 남자와 여자는 잘생긴 얼굴에 늘씬한 키와 몸매가 잘 어울리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그들을 보며 턱을 괴고 있던 라희의 눈매가 서서히 좁혀졌다. 묘하고 섬뜩한 기시감. 라희는 며칠 전 바흐의 고모네 집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검은 슈트를 입은 훤칠한 바흐와 맨 어깨를 수줍게 드러낸 드레스를 걸친 우아한 이유진. 그 두 사람도 함께 있던 그 순간만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한 쌍으로 보였다.

......비록 결말은 참혹하게 끝이 났지만.

'이유진.'

라희는 그날 파티장에서 오도카니 홀로 남겨져 있던 유진을 떠올렸다. 바흐는 일말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았다. 자존심을 접고서 애원하며 매달리다 단칼에 연이 잘린 그녀는 정말로 비참하고 참담해 보였다.

그런 유진의 모습을 보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후련해지고 맺혔던 체기가 풀려 그저 통쾌할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아니었다.

파티장에 홀로 남아 시선을 발치로 떨구고서 어깨 끝을 가늘게 떨며 간신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유진의 모습은 머릿속에 미련처럼 남아 계속해서 잔상이 아른거렸다.

같은 여자라 그런 걸까. 연인에게 차갑게 외면받은 유진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더군다나 유진의 상대는 오랜 연인이었던 바흐니까. 그토록 싸늘하고 냉담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파티장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말을 대강 머릿속으로 유추해 보면서 바흐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은 목구멍 한가득이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그를 눈앞에 두고 차마 입맊으로 꺼내어 묻지 못했다.

파티장에서 돌아와 가라앉은 기분으로 내내 말없이 라희를 품에 안고 있던 그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흘깃 눈치만 살폈지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해 묻는 것은 확실히 주제넘은 질문일 것이다. 그저 이쪽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일 뿐이지만 그쪽은 심장을 후벼 파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회상일 테니까.

대체. 그는 무슨 심정으로 연인의 외도를 눈감아 준걸까.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어림잡아도 8년인데.

멍하니 허공을 배회하던 라희의 눈길은 다시 아이스 링크 위의 완벽한 커플에게 머물렀다. 서로에게 눈짓하며 환한 웃음 띠는 연인을 보고 있으니, 생각이 차츰 엷어지면서 문뜩 어떤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직감을 확신하는 순간, 천천히 마음 한구석이 싸해졌다. 심장을 도는 혈관을 타고 싸르르 온몸에 퍼지는 한기. 낯설고, 어색하다.

라희의 고개가 비스듬히 저 앞 커플을 향해 들렸다. 서로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을 울리다가 이내 말없이 주고받는 눈짓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는 커플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렴풋이, 바흐가 유진의 외도를 눈감아 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단 한가지 이유.'

라희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다가 코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머릿속으로 다음 이어질 문장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사랑했으니까.'

흠칫. 선뜩하게 날 선 뾰족한 얼음 가시처럼 날아온 말은 가슴에 박혔다. 날카로운 송곳에 깊이 찔린 것 마냥, 돌처럼 굳어 있던 심장이 아릿하게 먹먹해졌다.

아이스 링크를 멀거니 바라보던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둘을 계속 보고 있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휴대폰을 가만 만지작거렸다. 쥐었다 폈다, 한동안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하다가 버튼을 길게 눌러 화면 위 떠오른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약속 시각.

터벅터벅, 점심 약속장소인 캐서린의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자기도 모르게 목구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한숨이 차가운 겨울 대기 중으로 희게 부서지면서 잘게 흩어졌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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