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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자신의 팔을 잡아챈 유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이 검은 슈트 위를 찌르듯 박혔다. 행여나 놓칠세라 꽉 쥐고 있는 길고 우아한 손아귀는 악력에 못 이겨 미세히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유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씰룩거리는 입술 안, 잇새에 눌린 자근거리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우리."
바흐는 팔로 향했던 눈동자를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려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깊고 검은 눈빛을 마주하자, 유진은 붉은 입술 끝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이야기하기로 했었잖아?"
약속을 지키라는 듯 재촉하는 목소리. 바흐는 눈 하나 까딱 않고 가만 유진을 응시했다. 라희와 제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동안 앞에 서 있는 둘 사이로 무시무시한 침묵이 흘렀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라희 옆에서 제프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과연, 그랬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말에 선선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라희는 마주 보고 있는 선 두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음 나영의 생일파티 장소에서 저 둘을 보았을 때는, 케주얼한 옷차림으로 잡지에서 갓 튀어나온 모델 한 쌍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동화 속 왕실 무도회에나 등장할 법한 왕자님과 공주님 같았다. 검은 슈트를 입은 반듯한 콧날의 키 큰 왕자님과 그에 못지않은 차갑고 아름다워 보이는 공주님.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공주의 우아한 손길은 왕자의 팔을 붙들고 있다.
"......."
가타부타 말도 없이 침묵만이 계속되자 거만한 공주님 같은 유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나름의 대치 상태. 라희와는 팽팽한 힘겨루기 같은 긴장이었다면, 이 둘은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보겠다는 듯한 미묘한 신경전이었다.
"욱."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매혹적인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유진. 당장에라도 앞에 있는 왕자님의 팔목을 낚아채 데리고 나가고 싶지만, 우뚝 서 있는 왕자님은 그녀 앞에서 미동도 않는 견고한 성채 같다. 높고, 단단하고, 묵직하다.
"우리 꼭 해야 할 말이 있잖아."
가만 서서 내려다보는 고요한 눈매가 복잡하게 좁혀진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 허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주위의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온통 새카만 암흑뿐.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해. 응?"
유진은 바흐의 팔을 놓지 않고서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좀 전에는 약속을 걸고 늘어지는 요구였다면, 이제는 부탁이다. 더는 도도하거나 오만해 보이지 않는 표정. 평소 유진 답지 않게 자존심을 한 수 접은 듯 보였다. 그런 유진을 향해 서늘한 검은 눈동자가 잠시 멈춰 섰다.
"유진."
굳게 다물렸던 입매가 천천히 벌어지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흑요석처럼 검고 곧은 새카만 눈빛을 마주한 유진은 아주 잠시, 기대에 부풀어 바짝 다잡았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만 따라가 주지. 여자 쪽에서 저렇게 저 자세로 나오는데 말이죠."
제프가 재미있다는 듯, 라희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숨죽이는 소리마저 들릴법한 지척인 거리다. 그때, 제프의 말을 들은 듯, 줄곧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던 짙은 눈동자가 각도를 달리해 앞을 응시했다.
검은 눈매는 다시금 가늘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서 있는 라희와 그 옆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생긋 웃는 곱슬머리와 눈이 짧게 마주친 그는 다시 라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고정된 눈빛.
빨려들어 갈 것 같은 깊고 검은 눈매가 가만 바라보며 끝을 좁혔다. 라희는 바흐의 시선에 갇혀 숨을 천천히 삼켰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있는 무표정이지만, 그의 곁에 함께 지내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케이틀린."
바흐는 유진의 어깨너머 라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단어.
"뭐?"
유진이 순간,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힘주어 팔뚝을 쥐어 잡은 채로 묻는 유진을 향해 천천히 시선이 옮겨갔다.
"이제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더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욱. 케이틀린?"
유진은 미간을 찡그리며 재차 물었다.
케이틀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라희의 머릿속에 이내, 런던에서 만난 로드윌 부부의 딸이 떠올랐다. 8살가량의 꼬마 숙녀. 엘리자베스의 집에서 졸린다고 칭얼거리며 엄마더러 집에 가자 내내 조르던 아이.
"예쁘게 컸지. 바버라의 딸이니 엄마 닮아 예쁜 게 당연하지. 금발에 푸른 눈이면 인형같이 예쁘잖아.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유진이 다그치듯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녀를 향한 비스듬한 곧은 시선 그대로, 바흐는 입을 무겁게 다물었다.
"갑자기 케이틀린이 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유진은 이마를 찡그리며 침묵하는 바흐를 응시했다.
"그만하지."
차가운 목소리가 짧게 대꾸했다.
"이해가 안가. 갑자기 케이틀린 왜? 로드윌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을 저 계집애가 뭐라 지껄이기라도 했어?"
유진은 죽일듯한 눈빛으로 라희를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즉각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 눈매를 좁힌 바흐가 유진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대답을 요구하자, 유진은 아차, 하는 얼굴로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는 턱을 올려 라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유진 언니에게 직접 여쭤보세요. 오빠."
라희는 유진을 눈짓하며 싸늘히 말했다. 겨우 한잔 마셨을 뿐인데, 술기운인지 다시금 오빠라는 말이 잘도 튀어나왔다.
"이런, 뭔지 모르겠지만 들켰네요. 이제 3파전인 가요? 아, 정말 치정 싸움이 제일 재미있다니까요.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런가."
라희 옆에서 제프가 들으라는 듯 작게 키득거렸다. 바흐는 제프를 매섭게 쏘아보다가, 유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날, 마주쳤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지?"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자신에게 쏘아진 사실에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유진 대신, 제프가 입매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이유진씨 성격 보면 견적이 딱 나와 할 거 같은데요."
바흐의 눈매가 제프를 향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제프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유진을 눈짓했다.
"약자에게 가차없는 성격인 거. 알고 있죠? 꽤 오래 사귀었다 들었으니까요."
"그쪽이 상관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바흐가 낮은 음성으로 따끔하게 말했다. 제프는 싱긋 웃으면서 손가락에 낀 샴페인 글라스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보다시피, 라희씨와 술친구라서요. 그쪽이 부재한 동안, 이유진씨가 적반하장으로 어이없게 행동하는 것을 가만 보고 있으니, 참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제가 좀 오지랖이 넓거든요."
제프는 한쪽 입매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덧붙였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니 지금 벌어지는 삼파전에는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조용히 관전할 테니 계속해 주시죠."
제프와 바흐가 서로 곧게 마주 보는 가운데,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욱, 나가서 조용한 데로 가자."
손에 움켜쥔 단단한 팔뚝을 바깥으로 잡아끌려는 몸짓. 바흐는 그런 유진을 향해 짧게 말했다.
"놔."
유진이 어이없다는 듯 높이 소리쳤다.
"뭐?"
"그만 놓으라고."
쏘아보는 유진을 담담히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 뜻밖에 말에 놀란 듯, 유진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뭐라고...."
바흐는 이어지려는 유진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싸늘히 운을 뗐다.
"마지막으로 바버라를 만나기 전."
파르르 속눈썹을 치켜세운 유진을 향해, 그가 냉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고모부님을 따라 세 달간 홍콩에 가 있었지."
"그....!"
순간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유진의 목소리. 잔뜩 미간 아래로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흔들리는 불안한 눈동자가 바흐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부터야."
온점을 찍은 듯한 무거운 음성. 스르륵, 바흐를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맥없이 풀렸다. 돌처럼 굳어버린 유진을 그대로 지나쳐 발걸음을 옮긴 바흐가 라희 앞에 멈춰 섰다.
"호오."
제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바흐는 보란 듯, 긴 손을 앞으로 뻗어 내밀었다. 라희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선문답처럼 들리겠지만, 어렴풋이 내용을 파악한 라희로서는 유진과 바흐가 이야기한 내용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지금, 그가 말한 뜻은...
가만 눈을 낮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에 내민 길고 곧은 손이 보였다. 라희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바흐의 어깨너머, 유진이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모습이 보였다.
"가지."
귓가에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라희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만 돌아갈 시간이야. 자."
마치 마법의 말에 홀린 것 처럼, 라희는 그의 말에 따라 선선히 내민 손을 맞잡았다. 순간 유진의 험악하고 매서운 눈초리가 맹렬히 라희에게 쏘아졌다. 볼이 따끔거린다.
라희는 조심스럽게 바흐의 안색을 살폈다.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 작은 손을 굳게 잡은 커다란 손은 이내 위로 올라가 가녀린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라희는 그대로 그에게 이끌려 출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술잔을 빙글 돌리는 제프를 뒤로하고, 두 사람을 기괴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유진을 그대로 지나쳐 현관 앞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싸늘히 굳어 서 있는 유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라희는 흘깃 유진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으로 파티장에 홀로 서 있는 유진.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비참해 보였기에 그 이상 화를 돋우려 바흐에게 교태를 피우거나 아양떨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왕자님에게 깨끗이 외면당한 공주님은 지독히도 불행해 보였으니까.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14회 123회 찾아보심 단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