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46화 (14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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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자.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세 부류인데. 일단, 금융가이자 사업가인 에오르그씨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브랜다와 친분 있는 예술 계통 사람들. 나머지는 플러스 원으로 따라온 지인들일 텐데. 라희씨는."

제프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려 앞에 서 있는 라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움찔. 라희는 그를 마주 쏘아보며 몸을 굳혔다. 찬찬히 아래로 이동하는 눈길은 성적인 신호가 담겨 있지는 않았으나, 수치심을 느끼기 충분했다.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으니까.

"애매하긴 한데요. 라희씨가 내내 걸치고 있던 그 검은색 코트, 우리 누나도 얼마 전에 구입한거라 대충 가격대를 아니까 더 고민되네요."

제프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라희의 빈손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손에 들고 다니던 휴대폰 보다 비싼 거니까요. 그래도, 그냥 감이지만, 에오르그씨와는 친분이 없는 듯 보여요. 집안이 부자였다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 그런 식으로 위축된 성격을 갖긴 힘들거든요. 어린 시절 불우한 학대를 당했다거나, 잘못된 양육과 훈육이나 방치로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요. 그리고 그랬더라면 약에 절어 있거나 성장 과정 중에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의사를 괴롭혀서 성격 개조를 하니까. 저기, 저쪽 제니퍼 보이죠?"

제프는 턱짓으로 거실 안쪽에서 남자들과 여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한 손에는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제니퍼를 가리켰다.

"저런 성격이 전형적이죠. 아니면, 우리 누나? 혜영 누님도 있네요. 공통점은 기가 죽어 있지 않아요. 아무리 겉으로 공손하고 조용해 보여도, 내면은 그렇지 않거든요. 오만이 철철 넘쳐 흐르죠. 기 죽을 일이 없거든요. 대부분의 일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가능하니까요."

확실히, 세 사람의 성격은 구김이 없었다. 더불어 런던의 엘리자베스도. 남에게 할 말 다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서 그럴까. 라희는 제프의 말을 들으며 네 명의 공통된 성격을 종합해 보았다.

"그러면, 브랜다 아주머니 쪽? 흐음. 손을 살펴도 작업으로 단련된 티가 안 나니. 화가나 예술 쪽은 아닌 거 같고. 어쩌면, 이 집 붙박이장처럼 미학도일지도 모르겠군요. 라희씨, 전공이 뭐에요?"

"알아서 뭐하게요?"

라희가 싸늘하게 바로 되받아치자, 제프는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끝이 가늘어진 눈매로 라희를 곁눈질하며 다시 쿡쿡거렸다.

"아, 재미있다니까요. 다소곳하고 얌전해 보이는데, 의외의 이런 톡 쏘는 반응 말이죠. 발끈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예술 계통은 아니로군요. 그러면 플러스 원(동반인)이네요. 가만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칭칭 감아줄 머리 빈 남자가. 음."

제프의 시선은 파티가 한창인 거실의 저 너머 창가 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을 향했다. 대부분 백인이었는데 드문드문 아랍계통의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 섞여 있었다.

"루안 케자크, 알리 알콰에, 오마르 페레, 알란 카멘."

아마도, 저 남자들 이름. 제프는 나직하게 읊조리듯 아랍계 이름을 줄줄 불렀다.

"........"

제프를 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하루 종일 빈속이라 그럴지도. 거실 구석에 파티 음식이 놓여 있던 것이 기억났다. 헛다리 짚은 거라 말해주고 주고 싶지도 않았기에, 라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제프를 지나쳐 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그냥 가버리기에요?"

앞서 가는 라희의 뒤를 잰걸음으로 뒤따라 오며 제프가 외쳤다. 라희는 깨끗이 무시하고서 음료 코너의 바텐더를 향해 샴페인을 주문했다. 이내, 차가운 샴페인이 손에 들렸다. 그런 라희를 따라 하듯, 제프도 같은 것을 주문해 한 모금 기울이고서 빤히 라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함께 온 파트너가 누군지는 알려줘야죠. 궁금해 죽겠단 말이에요."

"왜요? 그게 왜 궁금한데요?"

라희는 짧게 냉소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가 너울지는 야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이내 어두운 창문 표면에 반사되어 비치는 제프의 모습. 끈질기다.

"말했잖아요. 그쪽에 관심 있다고."

피식, 라희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오늘 낮에 제프가 던진 무례한 말을 떠올리면 더 심하게 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비아냥으로 일갈했다.

"누나한테 덜 맞았나 봐요?"

뾰족하게 내던진 말을 들은 제프는 반응 없이 샴페인을 기울일 뿐이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 보면요."

차갑고 냉정하게 덧붙였다. 제프는 자리를 피하지 않고 옆에서 묵묵히 샴페인을 기울여 마셨다. 짧은 침묵.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이 불쾌하고 무례한 곱슬머리가 멀리 도망갈까, 머릿속으로 고심하던 그때였다. 어깨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하이힐 소리가 나고, 바로 뒤에서 급하게 멈춰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송라희."

잔뜩 날이 선 여자 목소리. 달갑지 않다. 라희는 미간을 찡그렸다. 창문에 비친 라희의 모습 뒤, 허리에 팔을 얹고서 전투적으로 자세로 서 있는 늘씬하고 키큰 여자의 모습. 라희는 유리창 너머로 유진을 건너다보며 눈매를 좁혔다. 1층으로 내려오면서 예상했어야 하는데, 낭패였다. 바흐도 곁에 없는데 굳이 지금 마주하고 싶지 않다.

"야, 사람 말이 안 들려? 아주, 보자 보자 하니까."

격식 따위는 멀리 내던진 반말. 유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반말을 잘근잘근 눌러 던졌다. 후, 짧은 숨을 내 쉰 라희는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날카로운 속눈썹을 찌를 듯 치켜뜬 유진의 독기어린 얼굴이 보였다. 붉은 립스틱 바른 입가를 씰룩이며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고 있는 모습을 본 라희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는데. 이왕 마주했으니, 상대를 해야 했다. 라희는 눈을 들어 유진의 시선을 사납게 받아쳤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뻔뻔한 낯짝 들이민 거야?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거니? 하긴, 애초에 수치라는 감정을 일말이라도 느낀다면 이런 낯뜨거운 일을 벌이지도 않겠지.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네 잘난 몸뚱이가 이룩한 업적을 자랑하고 다니는 중이니?"

"....."

라희는 슬쩍 곁눈질로 뒤돌아 창밖을 보고 있는 제프의 등을 힐끗 보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유진이 날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라희의 주변으로는 제프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설령 있더라도 지금 상태의 유진은 옆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개의치 않을 성싶었다. 눈이 뒤집혀서 다짜고짜 다가와 악에 받친 말을 퍼붓는데 열을 올리는 중이었으니까.

"대체 계획이 뭐야? 들어나 보자. 응? 제2의 웬디 덩으로 등극하려고 그래? 아니지. 넌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으니까. 미련하고 아둔하니, 이런 일을 벌이는 거겠지. "

유진은 매몰찬 어조로 다다다 쏘아댔다. 2층에서는 격식을 차리며 고고한 척 하더니, 이제 단둘이 있다고 밑바닥을 드러낸 역겹고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유진 언니. 전 언니 말대로 똑똑하지 않아서인지 웬디 덩이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라희는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유진은 기가 막힌 듯, 하, 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라희를 맹렬히 쏘아보았다.

"딱 너 같은 여자야. 머독 회장의 전 부인. 네 완전판, 천한 몸뚱이 굴려서 네가 열망하는 워너비의 삶을 사는 여자지."

머독 회장 전부인? 그러고 보니 잡지에서 읽은 적 있다. 중국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여러 남자를 이용해 영주권과 시민권 그리고 대학까지 마치고 나서 머독 회장의 세 번째 아내가 된 여자. 다행이지. 그나마 어렴풋이 아는 인물을 대서.

"그 여자, 예일대 출신 아닌가요? 저보다는 언니에게 어울릴 것 같은 롤모델이네요."

라희가 비아냥거리며 대꾸하자, 옆에 가만 서 있던 제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썹을 올리며 뒤돌아 봤다. 유진은 눈을 한껏 치켜뜨며 한마디 하려다가, 뒤돌아선 제프를 발견하고 표정을 싸하게 굳혔다.

"....!"

미간을 잠시 찡그리던 유진은 이내 낯을 싹 바꿨다. 무언가 생각하듯 미간을 좁히다가, 제프를 향해 눈길을 한번 던지고는 라희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난 년은 난 년이로구나. 이런 건 어디 학원에서 돈 주고 배우려 해도 배우지 못하겠으니."

유진은 차가운 얼굴로 명백한 비웃음을 흘렸다.

"무슨 뜻이죠?"

"네 안목에 감탄했다는 뜻이야."

불쾌한 표정의 라희를 힐끗 바라본 제프는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관심을 표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은 그런 그를 향해 입매를 끌어올려 건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지난번 라희가 해먹었던 1억보다는 큰 공사겠네요. 미스터 조."

1억이라는 말을 듣고 하얗게 질린 라희를 곁눈질한 유진은 제프를 향해 비꼬듯 어조를 올렸다.

"지금은 오히려 라희가 걱정될 정도예요. 악동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거든요. 얼마 전, 뉴욕 요트 클럽에서 제명당할 뻔했다죠?"

"무사히도, 아직 회원입니다."

제프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유진은 그런 그를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흘렸다.

"확실히, 매형이 검찰청에 소속되어 있으니 좋긴 좋네요. 약에 취해 모델들과 누드로 항해하다가 해안 경비대 함과 접촉사고를 내도 무사하고요. 하지만, 조심해요. 골드 디거(Gold digger: 꽃뱀)는 아무리 검찰이라도, 혐의를 입증하기가 몹시 어려우니까요."

유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제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리고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뻗어 라희가 들고 있던 잔에 챙, 하고 부딪혔다. 라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프는 그런 라희를 똑바로 직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유진에게 생글거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걱정 어린 충고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그저 친구라서요. 단순한 술친구요."

"흐응."

유진이 턱을 들어 올리며 눈매를 가늘이자 제프는 차갑고 건조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진 이런 개차반 같은 성격상, 아무리 술친구라도, 내 면전에서 친구가 당하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네요."

싸늘한 말을 내뱉는 입은 살며시 비틀어 올린 띤 채였다. 유진은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제프를 쳐다보았다. 한번, 해볼 테면 해보란 듯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을 이럴 때 쓰나 보군요. TGH 회장이 Yoo 갤러리를 차려줬다는 소문이 단지 소문만은 아니라는 거,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텐데요. 그쪽이야 말로 웬디 덩아닌가요? 멀쩡하게 20년간 평온했던 남의 가정을 파탄 냈으니 아, 맞다. 웬디 덩은 아니군요. 후처로 들어가려다 말았으니까."

"뭐, 뭐에요?"

제프가 쏘아낸 말에 당황한 유진이 말문이 막힌 듯 말을 더듬으며 작게 소리쳤다. 제프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곤혹스러워하는 유진의 앞에 손을 저어 흔들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는데 방해하지 말란 듯이. 이내, 그는 팔꿈치를 받쳐 턱을 괴고 쭉 뻗은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까닥까닥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가만 보자. 예일대 나온 똑똑한 머리로 계산해 보니 늙다리 부자보다는 역시, 젊은 게츠비가 낫겠다 판단한 거겠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돈에다 젊음까지 갖추면 금상첨화니까요. 밤마다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살 순 없으니, 그 마음 이해해요. 그런데 어쩌나."

"뭐라는....!"

순간, 시큰둥하고 냉소적인 눈빛이 차갑게 웃으며 유진을 직시했다.

"차기 웬디 덩으로 점찍어둔 이 친구를 데리고 후학 양성에 힘쓰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런. 라이벌인가 보네요?"

싱글 웃으며 차갑게 비꼬는 제프의 말을 들은 유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제프는 무언가 생각하듯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입을 삐죽이다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챙, 하고 멍하게 서 있는 라희를 향해 샴페인 잔을 부딪쳐왔다.

"흐음. 아랍계인 줄 알았더니. 의외네요."

그때, 유진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구제불능이라는 소문대로 정말 무례하군요. 미스터 조, 아니 조제프!"

"그쪽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이유진씨."

제프가 퉁명스레 지적하듯 언급했다. 유진은 분노로 번뜩이는 눈으로 제프를 쏘아보았다.

"이....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래? 그저 돈 많은 아버지 만나 빈둥거리는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감히 남의 인생을 그따위로 재단해?"

피식, 냉소를 흘리던 제프는 이내 웃음기를 싹 지우고서 유진을 응시하며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서늘하게 말했다.

"입 조심하시죠. 이유진씨. 그 돈 많은 아버지 덕분에 내가 건 전화 몇 통이면 당신의 그 조그마한 갤러리와 알량한 거래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유진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파르르 떨면서 분노를 내리누르는 모습이었다.

"뭐, 실제로 그럴지는 해보지 않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거 같은데요?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요? 나름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프는 태연스레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서 덧붙였다. 그때, 이를 악물고서 우아하게 드러낸 어깨 끝을 잘게 떨고 있는 유진의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유진은 고개를 휙 돌렸다.

뒤에서 바흐가 걸어오고 있었다. 라희와 눈을 마주친 그의 시선은 이내, 라희 옆에 서 있는 제프를 향했다. 가늘게 좁혀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미간을 좁힌 바흐가 라희를 향해 다가오려는 순간, 길고 가는 매끈한 손이 그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걸음을 멈춘 바흐을 향해 유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욱, 이야기 좀 해. 당장."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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