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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침실은 일반 가정집의 침실이 아니라, 병실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주 호화로운 특급 병실.
넓은 침대를 가운데 옆에는 심전도 모니터가 규칙적인 곡선을 만들며 숫자를 깜빡였고, 심전도 모니터 옆에는 각종 의료기구와 기기들이 보였다. 그 근처로는 병원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의료용품이 가득 들어찬 흰색 4단 카트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청진기니, 혈압계니가 돌돌 말려 있다. 침대 주위로는 꼬챙이같이 긴 링겔대 두 대가 주렁주렁 주사액을 매단 채 서 있었다. 침대의 다른 한쪽으로는 넓은 라운지 소파가 놓여 있어, 평소 방문객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진욱이 왔니."
하얀 침대 가운데서 간호사복을 입은 두 여자의 부축을 받은 채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초로의 여성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병색이 완연한 파리한 얼굴, 한 시대를 풍미했을 법한 미모의 쇠퇴가 역력한 이목구비. 브랜다 한.
라희는 초로의 여인을 보자마자, 아무 언질이 없었더라도 바흐와 한 핏줄임을 바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도 닮아있었으니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반듯한 콧날, 단정한 이마, 그리고 심연처럼 새카만 눈동자. 한 핏줄임을 암시하는 또렷한 자취.
"예."
바흐가 짧게 답했다. 라희는 멍하게 있다가, 그의 낮은 음성을 듣고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브랜다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손님이 오신 모양이로군요."
브랜다가 라희를 보기 위해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라희는 조금 놀랐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바흐가 말한 뇌졸중의 후유증 때문인지, 브랜다 한의 아름다웠을 법한 얼굴의 왼쪽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마비된 신경으로 입매와 눈매, 그리고 뺨이 흉측하게 아래로 쳐지고 일그러졌다. 얼굴의 정 중앙을 선으로 나눈 듯이, 오른쪽의 평범하고 단정한 모습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조금 기괴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거기에 서 있지 말고, 가까이 와서 앉으렴. 앉아요."
조금 불분명한 발음. 브랜다는 오른손을 들어 침대 옆쪽으로 놓인 넓은 라운지 소파를 가리킨 후 천천히 내렸다. 그러고 나서, 마치 습관처럼 자신의 왼쪽 팔을 매만졌다. 오른쪽 손은 온전한 모습인 데 비해, 왼쪽 손은 마치 시든 식물의 줄기처럼 조금 말라 보였고, 안쪽으로 뒤틀려 굽어 있었다.
라희는 바흐를 따라 브랜다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침대 가장자리에 다다르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새카만 눈동자가 라희를 향해 좁혀져 면밀히 탐색했다. 침대 앞에서 걸음을 멈춘 바흐는 라희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분은 브랜다 한 에오르그. 고모님이셔."
공식적인 소개. 브랜다가 한쪽 입꼬리로 엷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한쪽은 축 처져 있어서 기묘한 표정이었지만, 라희는 최대한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했다.
"여기 이 아가씨는?"
브랜다가 어눌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고모님에게 라희를 소개했다.
"이쪽은 송라희. 제가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브랜다는 라희를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
짧게 터져 나온 감탄사. 뒤에 생략된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아, 들었던. 혹은 아, 그 아가씨.
"라희양로군요. 편히 앉아요."
브랜다는 부드러운 어조로 자리를 권했다. 라희가 소파의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자마자, 바로 뒤에서 맹렬히 쏟아지는 시선이 생생히 느껴졌다. 머리통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문앞에 선 유진은 소개가 이루어지는 내내 말없이 팔짱을 끼고서 라희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는지, 또각, 또각, 푹신한 카펫 위를 밟는 하이힐 굽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고모님."
침대맡에 멈춘 유진이 상냥한 목소리로 브랜다를 불렀다. 브랜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유진은 입매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오전에 말씀드린 대로, 결국 라희씨가 직접 이곳에 고모님을 뵈러 왔네요. 생각보다 빨라서 조금 당혹스러운데요. 어쩔 수 없죠. 불쑥 방문한 손님에게 내올 차는 어떤 것으로 준비하라 이를까요?"
"카모마일이 좋겠구나."
브랜다가 말했다. 그러자 유진은 고개를 돌려 비스듬히 소파 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고모님께서는 카모마일. 욱이는 에스프레소, 그리고 라희씨는요?"
마치, 본인의 집이라도 된 듯 유진은 각각의 평소 기호를 읊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라희를 향해 물었다. 오만하고 차가운 표정. 똑똑히 처지를 자각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유진은 턱을 치켜들고 위에서 아래로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라희는 눈을 깜빡이며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망설였다. 태연히 웃으면서 고모님과 같은 것으로요, 라고 응수할까 아니면 그냥 찻집 아가씨 대하듯 건조하게 아메리카노로 부탁해요, 감정 없이 말할까. 고민했다.
역시 유진을 약 올리려면 잔뜩 교태를 부려야 하나? 라희는 힐끔 옆에 앉은 바흐를 살폈다. 아까 침실 문 앞에서 유진과 마주했을 때는 오빠라는 말이 잘도 흘러나왔는데, 이렇듯 고모님과 간호사들까지 앞에 두자 한껏 고취되었던 들뜬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잔뜩 얼어버렸다.
유진을 마주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한껏 좁히고 있던 그때, 조금 전 문 앞에서처럼, 낮은 목소리가 팽팽한 대치를 깼다.
"유진. 차는 저분들이 알아서 할 거야. 지금 손님도 있고, 가족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피해 주길 바라."
바흐가 담담하게 말했다. 순간, 유진의 정돈된 눈썹 끝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면서 명백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욱. 그게 무슨 소리야? 가족끼리 할 이야기라니? 오늘 처음 온 손님인 라희씨는 들어도 되고 나는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도 있는 거야?"
유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바흐는 미동 없는 곧은 시선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움찔. 서늘한 눈빛을 보고 순간적으로 위축된 유진이 천천히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눈을 치켜떠 쏘아보는 유진. 담담히 받아내는 바흐. 주위로 갑자기 내려앉은 정적. 얼마간 불안한 고요가 진득하게 흘렀다. 방안 모두의 관심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그러던 그때.
"유진아, 지금은 자리를 피해 주는 편이 낫겠구나."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브랜다의 둔한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고모님."
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켜고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떤 심정인 줄 아시잖아요. 고모님만은 절 이해해 주실 거라 항상 믿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 유진아. 하지만 지금은 손님이 오셨으니,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할래? 일단 자리를 비켜주렴."
아마도 온전하게 들렸더라면 서늘했을 목소리였겠지만, 후천적 장애로 말미암아 뭉그러진 발음은 겨우 뜻만 전해주었다. 브랜다의 말에도 유진이 전혀 미동치 않자, 바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유진을 곧게 내려다보며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유진. 고모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뭐? 지금 나보고 나가라고? 나만? 내가 왜?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가. 대체 이 상황이 뭐야?"
유진은 턱을 치켜들어 라희를 턱짓하며 높게 소리쳤다.
"오늘 쟤는 여기에 왜 데려왔고? 가뜩이나 고모님 몸도 안 좋으신데, 이젠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려는 거야? 욱아, 나는 네가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 그리고.."
"유진."
바흐가 차가운 말투로 이름을 불러 말을 끊음과 동시에,
"유진아."
뭉툭하지만 엄중한 기색을 띤 음성이 유진을 다그쳐 불렀다. 유진은 계속 말하려던 것을 멈추고서 바흐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좋아."
유진은 덧붙였다.
"대신, 이따가 나랑 이야기 좀 해."
오만한 시선이 라희를 향했다.
"단둘이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유진을 향해 바흐가 눈을 한번 깜박여 알겠다는 의중을 비쳤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한 유진은 다시 라희에게 눈길을 한번 주었다가 거두고는 까닥, 브랜다를 향해 말없이 목인사 하고서 불쾌한 심중을 내비치듯 몸을 홱 돌려 방을 나갔다. 날카롭게 바닥을 내리찍는 하이힐 구두굽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유진이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옆에서 시중들던 간호사복을 입은 여자 중 한 명이 쟁반 가득 흰색 찻잔을 내왔다.
"라희양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브랜다가 라희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스물셋입니다."
달깍. 흰 찻잔이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이는 것을 보면서 라희가 답했다. 브랜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아, 정말 좋은 때로군요. 그럼 대학생?"
"네."
"어느곳에 다니는지 물어봐도 실례가 아니려나요?"
"Q대에요."
일상적인 사실. 객관적 신변에 대한 질문이 몇 차례 더 언급되었다. 전공은 무엇이냐, 부모님은 계시느냐, 무얼 하시느냐, 가족관계는 어찌 되느냐는 등의 주위 상황에 대한 물음들. 어려울 것 없는 질문이기에, 라희는 사실대로 답했다. 그러다 불쑥 던져진 조금은 다른 성질의 질문.
"우리 진욱이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대학도 사는 곳도 다른데, 특별한 계기라도?"
오른손으로 하얀색 찻잔을 기울이며, 브랜다가 찻잔 너머로 라희를 보며 물었다. 라희는 앞에 놓인 흰색 찻잔 가득 담긴 노란 수색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난감했다. 이제까지는 한 치의 거짓 없이 사실대로만 말했는데, 이번 질문은 뭐라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제가."
갑자기 가만 앉아 있던 바흐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라희는 눈동자를 기민하게 굴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 단정한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죄여 들었다.
조금 전 보인 유진의 행태와 일부러 대답하기 편한 사실 관계만 묻다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 브랜다를 보니 유진이 그동안 지껄인 낯뜨거운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일한 가족인 고모님에게, 그가 사실대로 처음 만나게 된 계기를 솔직히 말해버린다면, 정말 모멸스럽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조차 없겠지. 얼마간 동안 질식할 것만 같은 숨죽인 침묵만 흘렀다. 브랜다의 눈빛이 바흐를 향해 좁혀지자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첫눈에 반해서요."
담담하고도 나직한 목소리. 깊은 울림이 고요를 가른 순간,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바흐의 곧은 시선이 라희를 향했다. 어둠보다 짙은 눈동자가 직선으로 쏘아졌다. 새카만 깊은 눈매. 투명하게 검은 동공 안에 라희의 얼굴만 가득 비쳤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는 라희를 향해, 바흐는 옅은 미소를 띠고서 말을 이었다.
"먼저 만나자고 했습니다."
라희의 멍한 눈은 바흐의 입매에 고정되어 얼어붙었다. 한껏 죄어들었던 가슴이 덜컥거리다가 이제는 욱신거린다. 아니, 마음 한복판이 저릿한 기분. 멍하게 풀린 갈색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던 그때 탁, 도자기가 바닥에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 트레이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브랜다가 바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흐음. 흥미롭구나.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니 말이야."
옆에 서 있던 간호사들에게 찻잔을 치우라는 눈짓을 보낸 브랜다가 말을 이었다.
"유진이가 내게 해준 이야기는 조금 다르던데. 진욱아,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브랜다는 고개를 돌려 라희를 향해 한쪽 입매만을 부드럽게 올렸다. 방금까지 빠져들듯 홀려 있던 검은 눈동자와는 다른 깊이와 채도를 가진 새카만 눈빛을 마주한 순간, 라희는 알 수 있었다. 정중한 표현이었다. 이방인은 이만 나가달라는.
"라희양, 조카와 대화 할 수 있게 자리를 좀 비켜 주겠어요?"
예상대로 브랜다는 바흐와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아, 네."
라희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얼떨결에 방을 나왔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2층 계단을 내려와 1층으로 향했다. 맨 처음 도착해 내린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둥그런 현관 통로에 다다를 때까지도 정신은 멍했다.
바흐가 한 말이 머릿속을 가득 맴돌았다. 실제와 다른 말. 사실과 동떨어진 설명이었지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평온해지면서 말랑말랑해지는 기분. 보들보들하고 뽀송뽀송 새하얀 솜뭉치에 온통 둘러싸인 포근한 기분이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신경이 흐물흐물 풀리고, 자기도 모르게 입매가 스륵 올라가려던 그때였다.
"어?"
옆에서 들려온 남자 목소리.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입에서, 하아 긴 한숨이 나왔다. 재수 없는 음성. 목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다. 체념하듯,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또 볼 줄이야. 우리 진짜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되게 질긴 인연."
바로 옆에 그레이톤의 수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곱슬머리가 생글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제프. 제프 조.
"악연이라고 해 두죠."
라희가 차갑게 대꾸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