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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44화 (14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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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라희는 택시 안에서 짧은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바흐가 내미는 길고 곧은 손을 맞잡았다. 택시에서 내리니 맨해튼 여느 고급 저택과 같은 석회암과 벽돌로 된 고전적인 14층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파크 애비뉴의 센트럴 파크 주변, 속칭 어퍼 이스트 사이드(the Upper East Side).

건물 앞으로 시원하게 뻗은 왕복 8차선 도로는 잘 정돈된 조경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하나같이 5번가의 유서 깊은 건물들을 크게 확대해 촤륵 붙여 놓은 모양새로, 과연 부유층 동네(Silk Stocking District), 백만장자들의 거리( Millionaire’s Row), 최고 부자들의 거주지(The uber wealthy residences)라 불릴 만 한 으리으리한 지역이었다.

바흐가 일하는 동안 호텔에서 하는 일 없이 이것저것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을 때 보았던 맨해튼 거리 소갯글에서 이쪽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석유 재벌(oil barons), 언론계 거물 (entertainment moguls) 혹은 금융가( financiers)들이라고 적혀있었다. 바흐의 고모부인 에오르그씨도 소위 백만장자라고 했으니 이런 데 사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터였다.

"오셨습니까. 미스터 한."

건물 입구를 지키고 선 단정한 감청색 제복을 입은 백인 도어맨 반갑게 인사하며 육중한 문을 열어주었다. 1층 현관 복도를 지나 고급스러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12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는 바로 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멋들어진 곡선으로 휘어진 대리석 계단이 보이는 둥근 현관은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파티 장면이었다. 백인, 동양인, 아랍계 남자들은 톤 다운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손에 술잔을 들고 삼삼 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노소 할것 없이 늘씬한 여자들은 원피스나 이브닝 드레스, 혹은 화려한 칵테일 드레스와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가느다란 글라스를 기울였다.

이곳에 오기로 결정한 이후 바흐로부터 고모 댁에 파티가 있을 거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이런 낯선 세상 같은 화려한 파티 장면을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라희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걸쳐 입은 블랙 원피스를 살폈다. 조금 전, 그러니까 약 반 시간 전에 바흐의 전화를 받은 버그도프 굿맨( Bergdorf Goodman) 백화점의 퍼스널 쇼퍼가 원피스와 구두, 핸드백, 목걸이와 팔찌와 헤어밴드 일체를 호텔로 가져와 직접 스타일링 해준 완벽한 상태였지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잔뜩 보이자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지."

"......네."

라희는 그의 팔을 붙잡고 현관을 지나 안쪽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흰색 벽난로가 설치된 거실은 긴 직사각형 형태로 입구만 해도 양 끝으로 두 개나 있었다. 화려하고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눈 부신 빛을 내는 실내 너머 탁 트인 다섯 개의 거대한 창으로 맨해튼의 야경이 너울지며 흘렀다.

그 안쪽으로는, 완벽한 파티를 위해 분주히 음료를 따르는 바텐더가 서 있는 홈바와 갖가지 파티용 음식이 놓여 있는 긴 테이블이 벽 쪽 사이드에 붙어 있고 넓은 사교 공간 내부에는 흰 셔츠를 입은 직원이 갖가지 음료와 음식들을 바쁘게 나르는 가운데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소파에 앉거나 창가 혹은 기둥 근처에 모여 서서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우, 데이빗!"

곳곳에서 눈인사와 손짓으로 바흐를 향해 아는 체가 날아들었다. 한걸음, 한걸음 파티가 한창인 거실 안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짧은 인사와 함께 탐색하는 시선이 꽂혀 와 박혔다.

"데이빗, 오늘은 동행이 있군요!"

라희는 사람들의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답했다. 인종과 나이를 초월하는 낯선 사람들. 그 사이에서 몇 분도 되지 않아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여기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거지 표정은 모두 달랐지만 단 한 가지 똑같은 점이 있다면 모두의 옅게 미소 짓는 얼굴에서 무의식적인 자부심과 특권 그리고 우월의식이 비쳐난다는 것이다. 라희에게는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공간.

"어머, 오빠!"

높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익숙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편안한 차림이었던 낮에 봤을 때와는 달리, 예쁜 살구색 탑 원피스를 차려입고 업스타일 헤어로 한껏 멋을 낸 제니퍼의 활짝 웃는 얼굴이 보였다. 하얀 목덜미에서는 눈부신 보석 더미가 번쩍번쩍 빛을 냈다.

"어, 그리고."

제니퍼는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의 끝에 달린 보석을 반짝이며 다가 걸어와 라희를 향해 눈을 한쪽 찡긋했다.

"드디어 오셨네요. 라희 언니. 오늘이 결전의 날인가요."

활약을 기대 하겠다는 듯한 관심 어린 눈초리를 스륵 비낀 라희는 턱을 가볍게 까닥여 인사했다.

"제니퍼. 다시 보니 반갑네요."

"저도요. 잘 어울리는데요? 알렉산더 맥퀸 드레스죠?"

빠른 손놀림으로 스타일링을 직접 해준 퍼스널 쇼퍼가 스치듯 중얼거린 브랜드를 알아맞히는 제니퍼의 눈썰미에 놀라 하며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흐응. 사라 버튼은 역시 여심을 안다니까요. 나도 이걸로 입을까 고민했었는데, 보시다시피 키가 작아서요. 키 작은 여자들은 옷 입을 때 신중히 골라야 하거든요. 특히 블랙은 완전 기피대상이죠."

위아래로 라희를 훑어본 제니퍼는 고개를 올려 바흐를 향해 싱긋 웃었다.

"역시, 오빠는 살짝 섹시하면서 우아한 스타일 좋아하는구나. 취향은 절대 변하지 않네요? 오빠."

"제니퍼."

바흐가 질책하듯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제니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비교는 어쩔 수 없어요. 유진 언니, 지금 2층 엄마 방에 있으니까요. 언니가 내려오면 오늘 오빠의 여인, 둘 다 우아한 섹시미로 대결하겠는 걸요? 유진 언니는 아르마니 블랙 드레스를 입었거든요. 역시 키 좀 되고 늘씬한 사람들은 죄다 블랙이에요."

유진. 제니퍼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되는 이름이 귀에 들린 순간, 라희는 짧게 머금었던 숨을 폐부 깊이 가뒀다. 멈춘 호흡 사이로, 따끔따끔, 관자놀이 근처에서 뛰는 맥이 느껴진다. 역시, 유진이 와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예상했던 대로였다. 유진은 브랜다의 현대 미술 컬렉션의 지정 딜러인데다가, 아직 바흐에게 미련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그의 주변에 머물 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낮에 들은 제니퍼의 말에서 파악되었듯이 유진은 평소 에오르그씨 집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분명 오늘 파티가 열린다면 참석할 것 같았다.

"단단히 준비하고 왔나 봐요, 라희 언니?"

"그래 보여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화장이랑 옷차림 때문인가?"

눈매를 가늘게 좁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직시하는 제니퍼를 향해, 라희는 입매를 끌어올려 건조하게 웃어 보였다. 알고 있다. 화장을 하고 나면, 나영의 싸한 평가대로 독기가 들어 보인다는 것쯤은.

오늘, 낮에 찾아온 제니퍼가 속을 박박 긁어놓고, 그 뒤 갑작스레 마주친 혜영을 따라 들어간 57번가, 캐서린의 바 테이블에 앉아 어이없는 제프의 어림짐작에 상처받고 한껏 울고 난 후, 호텔 방 어둠 속에 홀로 앉아서 수도 없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심하다 결심했다. 이왕, 불행에 빠진 이상. 불행의 바닥 끝까지 내려가 절망과 마주해 버리겠다고.

호텔 현관에서 바흐가 에오르그가로 가자고 제의 했을 때, 라희는 흐릿한 머릿속으로 유진을 똑똑히 떠올렸다.

뉴욕에 오기로 결심한 이유. 이유진.

오늘, 바흐와 함께 그녀를 만나 뉴욕에 온 소기의 목적을 꼭 달성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불행의 처절한 나락에서, 또 다른 불행을 똑똑히 목도 할 것이다. 물론, 유진이 사랑해 마지않는 '얕은 수'를 쓸 생각이었다. 바흐의 품에 안겨 생글생글 웃는 천진한 낯을 들이밀어야지.

후. 한껏 가둬두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라희는 파르르 떠는 속눈썹을 몇 번 깜빡여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진욱씨."

한껏 입매를 끌어올려서 달콤한 목소리로 바흐의 이름을 불렀다. 거의 처음. 첫 계약 날, H 빌딩 사무실에서 갑을 계약서를 읽어내리다가 갑 쪽이 한진욱 씨로군요, 라고 중얼거린 이후 처음 불러보는 이름.

그의 팔을 붙잡고서, 턱을 살짝 올려 옆에 서 있는 바흐를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히 내려보는 그의 깊은 눈매를 향해, 라희는 붉은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슬며시 벌려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요, 우리."

***

제니퍼가 1층 계단 앞까지 따라오면서 재잘재잘 떠들던 말을 종합한 결과, 바흐의 고모부인 에오르그 씨의 집은 총 3층의 트리플렉스(triplex) 펜트하우스였다. 1층은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현관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파티나 사교만을 위한 공간으로 수십 명의 방문객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거실, 그 옆 거실의 절반만 한 넓은 서재 그리고 다이닝 룸, 키친이 빙 둘려 있고 2층은 생활 공간으로 4개의 침실이 3층은 맨해튼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테라스와, 패밀리 시팅룸(가족용 거실),그리고 2개의 침실과 고용인 숙소가 있다.

2층을 향해 우아한 곡선으로 뻗어 있는 둥근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면서 라희는 단단한 팔뚝을 슬며시 움켜쥐고 몸을 밀착해, 머리를 비스듬히 그의 어깨를 향해 기울였다. 이런 친밀한 자세가 익숙해 보여야 지켜보는 속이 부글부글 끓을 거다.

'어떤 기분일까? 나란히 함께 있는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라희는 시선을 들어 계단 위를 바라보며 입매를 차갑게 비틀어 올렸다. 거기, 기다리고 있어. 최대한 다정한 모습 꼭 보여줄 테니. 네 남자가 얼마나 배려심이 넘치는지 말이야. 너를 위해 냉장고 가득 네가 즐겨 마시는 음료를 종류별 맛으로 꽉 채워 챙겨 놓았던 그 남자가,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세팅해 주었거든. 그것도 본인이 선호하는 스타일로 말이지.

드레스 밑단의 나풀거리는 러플자락을 팔랑팔랑하며, 2층으로 올라서자 고급스럽게 치장된 복도가 나오고 양옆으로 침실 문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저 안쪽, 작은 응접실과 같이 생긴 공간 너머로 커다란 방문이 하나 보였다. 마스터 베드룸. 아마도, 그의 고모님인 브랜다 한이 머무는 장소. 그리고 유진도 함께 있을 장소.

두근. 심장 소리가 귓속을 거칠게 때렸다. 긴장으로 몸이 미세히 떨리는 것 같아서, 라희는 검은색 수트를 입은 단단한 팔뚝을 가슴팍으로 꼬옥 끌어안았다. 묵직한 느낌으로 가슴 위가 눌리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위에서 곧게 내려다보는 의아한 시선이 얼굴 피부 위로 따갑게 느껴지자, 그를 향해 턱을 살짝 기울여 올려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고모님은."

복도 한가운데서 발걸음을 멈춘 바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뇌졸중으로 왼쪽 편측마비가 오셨어. 흔히들 중풍이라 부르는 증상이지. 몸의 한 쪽이 불편하신 상태야. 겉모습은 부자연스럽지만, 인지기능은 정상이시니까."

만나기 전 미리 알아두라는 담담한 말투였다. 아마도 고모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어색한 모습 보이지 말라는 당부가 담긴 언질.

"네."

라희의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 마스터 룸을 향해 걸었다. 저 방안에서 유진을 마주할 것을 미리 앞서 생각하니 심장이 쫄깃하게 조여들었다.

-똑똑

굳게 닫힌 큰 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노크. 이내, 안에서 인기척이 나고 닫혔던 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욱!......."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유진의 목소리는 바흐 옆에 서 있는 라희를 발견하고서 입안으로 삼켜 들어갔다. 유진은 눈매를 좁히고서 라희를 죽일듯한 눈빛으로 잠시 노려보다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천천히 억누르듯 호흡을 한번 내쉬고는 음절을 하나하나 힘주어 끊어서 발음했다.

"라희씨. 여기서 보네요?"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그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보는 시선으로, 팔을 교차해 팔짱을 낀 유진은, 제니퍼의 말대로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를 훤히 내보인 여신 풍의 아르마니 드레스는 흐르듯 유연하게 발목까지 떨어져 내려와 오만한 그녀의 포즈와 무척 잘 어울렸다.

"유진 언니. 반가워요."

라희는 싱긋 미소 지으며 짐짓,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 가슴팍 안에 품듯이 붙잡고 있던 그의 팔뚝에 머리를 슬며시 기댔다.

"런던 로드윌 갤러리에서 뵙고는, 뉴욕에서는 처음이네요."

로드윌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진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얼굴을 펴고서 싸한 눈빛으로 라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흐응. 그러게요. 생각보다 오래 보네요? 난 서울에서 보고 못 볼 줄 알았는데 런던, 그리고 뉴욕까지. 딱히 돌아다닐 일 없이 한가해 보이는데도 나름 바쁘게 지내나 봐요?"

라희는 입가를 길게 늘여 가식적인 미소로 응수했다.

"그게요. 언니가 계시는 뉴욕까지는 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말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면서, 라희는 바흐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오빠가-."

다시 유진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입가에는 오늘 오후, 제프를 보면서 배운 싱글거리는 얄미운 웃음기를 띠고서.

"같이 오자고 해서 온 거에요."

유진은 딱딱한 얼굴을 하고 미동도 없이 가만 라희는 노려보았다. 라희도 지지 않고 살짝 냉소 띤 가늘어진 눈매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 팽팽한 긴장이 공기를 짓눌렀다. 대치하듯 마주 노려보는 시선. 차가운 침묵. 곧 찔러 죽이기라도 할듯,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송곳을 겨누고 있는 듯한 유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지만. 라희는 있는 힘을 다해 입매를 끌어올렸다. 숨 막힐 듯 조여오는 정적을 가른 것은 간결하고 짧은, 나직한 목소리였다.

"유진."

바흐가 이름을 불러 눈짓하자, 유진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다가, 가로막고 서 있던 문 앞에서 슬쩍 우아하게 몸을 돌려 비켰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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