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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43화 (14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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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세 번.

아주 짧게 마주친 게 고작인 낯선 타인이 어림짐작으로 던지는 말은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 들어왔다. 마음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숨이 턱 막힌다. 연거푸 들이켠 칵테일이 남긴 술기운인지 아니면, 앞에서 쏘아낸 타인의 경멸 찬 시선 때문인지 머리가 온통 지끈거렸다. 라희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끈거리다 못해, 이젠 뒤통수까지 욱신거린다. 뭐가, 문제인 걸까. 머릿속 내달리는 사고가 모로 치닫는다.

돈. 돈. 돈.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제프의 평가는, 돈에 혹한 여자.

불과 몇 시간 전 제니퍼가 툭 던진 말은, 돈을 받고 사촌 오빠를 홀리러 온 난잡한 여자.

유진이 차가운 경멸로 쏘아보며 했던 말은, 미끈한 몸뚱어리와 젊음을 돈에 판 여자.

아, 또 뭐가 있었더라?

라희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질끈 내리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 밑까지 아득하게 치솟은 열기로 시야가 온통 흐리다. 희뿌연 시선 속 덩그러니 앞에 놓인 빈 칵테일 잔이 너울지며 일렁인다. 누가 밟아 놓은 것처럼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은 해묵은 기억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또,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나영도 그런말 했었나?

라희의 동공이 급격히 좁혀졌다. 아, 했었다. 번쩍번쩍 금칠한 청담동 TWG에서 차갑게 입술을 비틀며, 경멸적인 어조로 야멸차게 내뱉었지. 조건이나 저울질하는 한심한 여자라고.

대체 왜?

왜.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이따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걸까.

그림자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꼬리표. 도무지 떼려야 뗄 수 없다.

처음 본 사람도 바로 알아차릴 만큼, 이마에 크게 쓰여 있기라도 한 걸까.

뭐가?

대체 뭐라 쓰여있길래.

꽃뱀?

창녀?

매춘부?

갈보?

남자나 유혹해서 홀리고 다니는 여자?

뭉클. 화악 열기가 솟구치던 눈 밑 아래로 갑자기 뭔가가 울컥 차올랐다.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면서 어깨가 축 처진다. 추욱 힘 빠진 등허리부터 파들파들, 잔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도무지 제어되지 않아 숨을 내리눌러 멈춰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가슴 속 고인 호흡은 똘똘 뭉쳐 올라오는 울컥한 기운을 함께 머금었다. 서서히 어깨 끝까지 잘게 떨렸다.

왜, 왜, 왜.

머릿속 가득한 물음.

라희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부질없는 생각의 흐름을 멈추려고 있는 힘껏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때였다.

-딱!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캐서린이 힘껏 휘두른 주먹이 제프의 어깨를 때렸다. 상당한 타격감으로 제프의 몸이 휘청거렸다.

"아앗!"

이내, 다시 한번 주먹은 제프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갔고,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올려 교차해 머리를 방어했다. 하지만, 가차 없었다.

-퍼억.

캐서린이 크게 휘두른 주먹은 방향을 비틀어 정수리를 강타했다.

"아얏!"

제프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심하게 아프다는 티를 냈다. 실제로도 정말 아파 보였다.

"아, 씨. 누나!"

"넌 좀 맞아야 해. 할머니가 너무 오냐 오냐 키웠어."

"아, 쫌. 때리지 좀 말라고. 얼굴 맞았으면 어찌할 뻔 했어.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파티 가야 된다고! 아, 진짜."

제프가 크게 소리치자, 캐서린은 싸늘한 눈으로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한번 주먹을 높이 치켜들며 위협했다. 제프는 누나가 여간 무서운지 행동을 멈칫하다가 목구멍 안으로 툴툴 투덜거림을 삼켰다.

"미안해. 라희야. 쟤가 보다시피 덜 커서 그래. 어릴 때부터 마음에 드는 예쁜 여자애만 보면 가서 괴롭히기 일쑤였는데, 아직도 그러네.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

-툭.

캐서린의 말과 함께 뿌옇게 흐렸던 시야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러 투둑, 바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뜨거워진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아보려 애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치 우물에 물이 고이는 것처럼, 곧게 뜬 눈으로 열기가 가득 몰려들어왔다.

"........"

라희는 미동도 없이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가슴만 작게 들썩이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물었다.

조용히, 느릿하게.

숨 죽여 깜빡이는 속눈썹 아래로 후둑, 후두둑,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이러기 싫은데.

턱 끝까지 힘을 주어 굳게 다문 입술 끝이 미세히 떨렸다.

이렇게 무너지기 싫었다.

라희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치 차오른 댐이 터지듯, 눈시울이 붉어진 눈가에서는 눈물이 투툭 떨어져내렸다. 날카로운 비수에 찔려 상처 투성이가 된 가슴이 크게 경련하며 들썩였다.

흠칫. 숨을 가두고 가늘게 떠는 어깨 위를 무언가가 툭, 건드렸다. 감싸듯 가볍게 내려와 앉은 손길은 잔뜩 굳어있는 어깨와 등을 어루 만진다. 토닥토닥, 억누른 마음을 부드럽게 달랬다.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혜영과 허공에서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라희는 그동안 꾹꾹 눌러담아 애써 참았던 울음을 그대로 터트려버렸다. 꽉 메인 가슴이 먹먹했다. 말없이 얼굴을 감싸는 품이 포근하게 안아주자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서러웠다. 터져나온 울음을 견딜 수도, 억누를 수도 없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안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적시며 흘러내려 맞닿은 혜영의 옷깃을 적셨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바탕 울고 난뒤 잦아든 흐느낌. 그렇게 정신없이 울고 나서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제프는 보이지 않았다. 라희의 곁에는 혜영과 캐서린만 있었다.

일행은 바에서 일어나 식당 안쪽 사무실, 쥐죽은 듯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어떤 사심이나 편견없이 마주한 사람이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은 묘한 위안과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두사람이 가만 앉아있는 가운데, 라희는 마치 고해성사 하듯 두서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싶었던 이야기의 단편들이 흘러나왔다. 술에 취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짜임새라고는 전혀 없고, 개연성도 없는 단어로만 이루어진 이야기였다. 잔뜩 머릿속을 흐트러뜨린 호르몬, 혹은 알코올 기운으로 사고가 얼룩져 진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털어 놓고 싶다는 생각. 그 하나만의 목적을 위해 아무렇게나 툭툭 던져진 말들.

주어와 서술어가 뒤죽박죽이 된 모호한 말들이었지만 혜영과 캐서린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둘은 히끅 거리는 숨을 참느라 말이 중간중간 끊어질 때마다 라희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잘게 잘려서 이리저리 흩어진 낱말들을 듣고 난 혜영은 말없이 라희를 껴안아 주었고, 옆에서 가만 지켜보던 캐서린은 라희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라희야."

"....네."

캐서린의 목소리는 고요히 내려앉은 공기 속에 차분히 울렸다.

"솔직히 단편적인 이야기로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아마도 네가 의도한 거겠지. 하지만, 그냥 듣다 보니. 우리 할머니가 어릴 적 내게 매일 물었던 말을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꼭 대답할 필요는 없어. 그냥 마음속으로 답을 생각해볼래?"

붉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라희와 눈을 마주한 캐서린이 담담하게 물었다.

"행복하니? 지금."

***

-띵동.

초인종 소리가 가라앉은 의식을 깨운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주저앉아있던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캐서린의 식당에서 여기까지 어찌 왔는지도 기억이 흐릿하다. 숙취 때문인지 민망한 기억 때문인지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어쨌든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온 호텔로 택시를 타고 돌아와 침대 위에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멍하니 어둠 속에 녹아있었다. 행복, 하냐고? 라희는 내내 머릿속 떠올린 물음표에 마침표를 덧붙였다. 아니.

-띵동.

다시 한 번, 고요히 내려앉은 정적을 가르는 초인종 소리.

라희는 눈을 들어 침실 탁자 위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7시. 평소보다 늦은 귀가시간. 긴 숨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라희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다녀오셨어요."

라희는 고개를 바닥에 고정한 채 말을 건넸다.

"다녀왔어."

뒤이어 피로가 겹겹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일을 마치고 몹시 피곤한 얼굴일 테지. 달깍,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라희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바흐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마주 볼 힘이 나지 않았다.

그는 바로 들어오지 않고 현관 복도에 멈춰 서서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가볍게 스치자 라희는 숨을 참았다. 그의 낮아진 검은 눈동자가 라희를 향했다. 동그란 이마를 미끄러지듯 내려가 아래로 내리뜬 긴 속눈썹을 지나 굳게 다물린 부르튼 입술 가에 머물렀다. 잘게 짓씹은 흔적.

움찔. 라희는 갑자기 입술 위에 닿은 손끝의 감촉에 몸을 움츠렸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충혈된 입술 표면은 부드럽게 매만졌다. 느릿느릿 더듬어 눌리고 쓸릴 때마다 아릿한 감촉이 입술 위에서 퍼져 나왔다. 입술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덧그리던 손끝은 이내 뺨을 거슬러 올라가 말라붙은 눈매 끝을 스쳤다.

"음."

잔뜩 좁혀진 미간. 탁하게 잠긴 음성이 울린 뒤 남은 침묵. 묵묵히 다물린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삼켜졌다.

"......들었어."

나직하고 고요한 음성이 귓가를 깨운다.

"제니퍼가 말해주더군."

고모 집, 오늘도 갔었나 보다. 그러면 당연히 제니퍼와 마주쳤으리라. 굳이 시키지 않아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니 자발적으로 오늘 호텔에 찾아와 숨겨둔 여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겠지.

제니퍼는 어떤 버전으로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과연, 만나 보았더니 홀릴 만 하더라? 아니면, 형편없다며 여자 보는 안목을 높이 높여라? 가만 서서 숨만 얕게 내 쉬던 라희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이 싸하다. 짙게 내려앉은 침묵. 라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미묘하게 주위를 압박하는 무거운 고요를 깼다.

".......뭐라던가요."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높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래로 향했던 턱 끝을 그가 들어 올렸다. 비스듬히 위로 기울여진 얼굴. 현관 조명등 밑 아래로 내리뜬 긴 속눈썹이 눈 주위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반쯤 감긴 눈 두덩이 위로 곧게 쏘아져 훑어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라희를 바라보는 깊은 눈매 끝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예쁘대."

나직한 목소리. 단정한 입술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뭐? 예쁘다고? 어이가 없었다. 낮에 그렇게 속을 벅벅 긁어 할퀴어 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예쁘다는 말? 아래를 향해 착 가라앉았던 속눈썹이 위로 확 들렸다. 라희의 눈이 치켜 떠졌다. 순간, 조용히 내려다보던 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부딪쳤다.

천천히, 어둠이 내려온다. 깊은 어둠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가 싶었는데, 다물린 작은 입술 위로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촉촉한 혀끝이 붉게 부푼 입술 위를 핥았다. 부어 있는 입술 위를 느릿하게 어루만지다가 쓸고 천천히 문질렀다.

찌릿.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잔뜩 짓씹힌 입술 위로 미끈한 혀끝이 다가와 스칠 때마다 옅은 전류처럼 짜릿한 기운이 퍼져 나간다.

이내, 말랑한 살을 가르고 따뜻한 혀가 다가왔다. 조심스레 파고들어 와 멈춰 있는 작은 혀와 맞닿았다. 보드라운 혀끝이 서로에게 감기고, 들큰한 타액 속에 혀와 혀가 섞였다. 따스한 느낌 속에 미끈하게 뒤엉키는 감촉. 미끄러지듯 서로에게 감겨들었다가 떨어져서 다시 감겨들었다.

이상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을 그가 달콤하다. 약하게 느껴지는 숨결의 맛조차도 오늘 맛본 그 어떤 달달한 것보다 더. 단맛에 취하듯, 제멋대로 혀끝이 그에게 밀착되어 착 감겼다. 아찔할 정도로 달콤한 맛. 입안 가득 스미는 은근하고 진한 베르가못 향. 슬쩍 감겼다가 풀어지는 혀가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이 퍼져 나와 몸 안 깊숙이 가라앉았다.

"으응..."

라희는 턱을 비틀어 올려 달콤한 어둠에 키스했다. 서서히 달구어진 몸이 젖어들어 갔다. 그에게로 깊이 다가서기 위해 발끝으로 섰다. 호흡이 달아오른다. 섞여드는 뜨거운 숨결이 아찔했다.

혀끝에 까끌까끌하게 느껴지는 단단한 이의 오돌토돌한 잔 굴곡이 거친 설탕 입자처럼 달게 스몄다. 정신없이, 깊게 빨아들였다. 숨 쉴 틈도 없었다. 젖은 혀가 조여들면서 미끈거리며 넘나드는 맞물린 살결이 야하게 맞부벼졌다.

갈증. 마치 목마를 때 설탕물을 벌컥벌컥 마신 것처럼,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났다. 취한 사람처럼, 그에게 정신없이 매달렸다. 이윽고, 숨이 차올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자 라희는 힘들게 입술을 뗐다.

"하아, 하아.."

가슴이 들썩거리며 내뱉어지는 짧은 숨. 달구어진 공기가 드나드는 입술 위에, 쪽. 그가 짧은 입맞춤을 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흐릿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홀리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입을 열었다.

"........갈래?"

약간 탁한, 촉촉이 젖은 낮은 목소리. 질문이었다. 가자고? 어디로? 라희가 숨을 할딱이며 그를 바라보자, 복잡한 생각을 고르듯, 좁힌 미간 아래 가지런한 속눈썹을 낮게 깜빡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에오르그가로."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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