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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요. 먹어 봐요."
탁, 널찍한 바 테이블 위로 제프가 유리 글라스를 내밀었다. 원뿔을 뒤집어 놓은 듯한 칵테일 글라스에는 위 테두리에 고운 초콜릿 파우더가 빙 둘려 있고, 그 안에는 진한 갈색의 음료가 들어 있었다.
라희는 앞에 놓인 칵테일 글라스를 들어 기울였다. 코끝으로 진한 초콜릿 향이 났고, 혀끝에 닿는 초코 파우더는 씁쓰름했다. 이내 입안으로 진갈색 액체가 흘러들자, 약한 알코올 향과 함께 아찔한 단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진한 맛이 나쁘지 않았기에, 라희는 초코 파우더가 묻어있는 입술을 혀로 훔치며 입맛을 다셨다.
"맛있네요."
짧은 감상을 말하자, 제프는 가지런한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당연하죠. 누가 만든 건데요."
"야, 제프. 내 것도 좀 줘봐."
라희 옆에 앉아 있던 혜영이 제프에게 요청했다. 제프는 눈썹을 살짝 들어서 혜영을 보더니 이내 바쁘게 바 위에서 손을 움직였다. 보드카와 초콜릿 리큐어, 슬라이스 한 레몬 조각, 초코 파우더 사이를 움직이던 손은 뚝딱, 라희가 마신 것과 똑같은 칵테일을 만들어 혜영 앞에 놓았다.
"고마워."
혜영이 혀끝으로 잔 가장자리의 초콜릿 파우더를 찍어 맛보고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제프는 그런 혜영을 보며 쿡, 웃었다.
"뭘요. 누님. 누님의 사라진 뱃살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조해야지요."
"어휴, 안 그래도 다이어트 때문에 아무것도 못 먹어서 예민한데, 명 재촉하면서 신경 돋우지 마라."
"네네."
바 테이블 너머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라희는 조용히 칵테일 잔을 기울였다. 아까 혜영과 재회한 센트럴 파크 공원에서 반갑게 이런저런 안부인사를 나누고 있던 도중, 제프의 누나인 캐서린이 대화가 길어질 거 같으니까 실내로 자리를 옮기자면서 시간 괜찮으냐고 물었다. 라희는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여유가 있었다. 이내 일행은 캐서린이 운영한다는 있다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센트럴 파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W 58번가에 위치한 식당은, 미국식 레스토랑 겸 술집으로 좁은 입구를 지나면 안쪽으로 바 스탠드가 길게 놓인 주류 공간이 있고 안쪽으로는 테이블이 놓여 있어 여느 고급스러운 식당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데다가 아직 주변 직장인들이 퇴근하기 전이어서 식당 내부는 한산했다. 캐서린의 안내로 바에 착석하자 혜영이 말했다.
"아우, 추운데 돌아다녔더니 술 당긴다. 아침에 커피는 많이 마셨거든. 이왕 바에 왔으니 오랜만에 낮술. 콜?"
"그래. 나도 콜."
캐서린이 수긍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혜영이 라희를 향해 물었다.
"라희씨는? 술 괜찮아요? 아니면 여기 커피도 있는데 커피로 할래요?"
"괜찮아요. 잘은 못 마시지만요."
호텔을 나서기 전, 제니퍼를 마주하고서 차를 마셨기에 차 종류는 끌리지 않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몽롱한 알코올로 달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바텐더가 없는데?"
혜영이 빈 바 스탠드를 보며 중얼거리자 캐서린이 힐끗 눈짓했다.
"아직 낮이라 출근 안 했거든. 하지만 괜찮아. 야, 제프."
누나의 눈짓을 받은 제프는 잽싸게 바텐더 자리에 섰고 이내 초코 시럽이 듬뿍 들어간 칵테일을 만들어 내 준 것이었다.
"사라는 잘 있죠? 여전히 유쾌하고요?"
밝은 목소리로 묻는 혜영의 말에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친절하셔서 홈스테이하는 동안 즐겁게 지냈어요."
"언제 한번 편지 써야지 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연락할 경황이 없어서. 이번에 결혼한다고 연락하면 부담될까 봐, 아예 결혼식 후에 신혼여행 갔다 와서 한번 전화 드려보려고요."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라희가 말하자 혜영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영국에서 계속 지내다 귀국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뉴욕에서 만나서 깜짝 놀랐어요. 진짜,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 봐요? 여기서 라희씨 보니까 정말 반가워서."
"저도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혜영은 라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얼굴은 그때랑 별로 다를 게 없는데. 분위기는 더 밝고 차분해졌네요. 정말 이제 와 하는 말인데, 런던에서는 아플 때 봐서 그랬는지.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었거든요. 당장 다가가서 손잡아 주지 않으면 막 큰일 날 거 같은 그런 분위기? 내가 좀 오지랖이 넓긴 하지만. 외지에서 공부를 오래 하다 보니까, 사람 볼 때 뭔가 감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라희는 시선을 내리고서 반쯤 비워진 칵테일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위태위태했었나? 하긴, 그때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막막하던 때였으니까.
"그랬나요. 그땐 정신없이 아플 때라서 경황이 없던 차에 걱정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런던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막막했거든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놓으세요. 혜영 언니."
라희가 부드럽게 말하자 혜영은 멋쩍게 입매를 올렸다.
"그래? 그럴까. 역시. 좀 어색하지? 그런 말 놓을게. 라희야."
"네."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이 차가 있으니 서로 존대는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뉴욕에서 언제까지 머무를 거야?"
혜영의 질문에 라희는 눈을 허공에 띄워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관광비자 3개월 받고 들어왔거든요. 대충 그 정도요."
"진짜? 잘됐다. 그럼 나 여기 있는 동안 계속 볼 수 있는 거네?"
"다음주가 전시회라고 하셨죠?"
혜영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마주쳐 한눈에 반해버린 연하의 화가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마치 영화처럼 시작된 만남 이후 불꽃 튀기는 시간을 보낸 끝에 청혼을 받고 바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 그런 이후 뉴욕 소호에서 예정된 남자친구의 전시회 일정에 맞춰 입국했는데 어린 시절 친구인 캐서린과 함께 노닐던 센트를 파크를 둘러보던 중 그곳에서 우연히 라희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몰라보게 달라진 외모는 한 달 뒤 결혼식에 입을 웨딩드레스를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면서, 아직도 3kg 정도를 더 빼야 완벽한 핏의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며 다이어트 의지를 더욱더 불태우는 중이랬다.
"응. 다음 주 월요일부터 2주간. 난 플라자 호텔에 머무르고 있어. 라희 너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희는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뉴욕의 세인트 리지스는 런던에서 고작 민박집에 머물던 라희가 묵기에 상당히 비싼 숙소다. 하지만, 거짓말은 끔찍한 결과를 부른다는 것을 소피 일로 뼈저리게 경험해보았기에 혜영이 이상한 의도로 묻는 것도 아닌 이상,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세인트 리지스요."
"우와, 가깝다. 거기 막, 버틀러 있고 그런데 라던데. 어때? 지낼만해?"
"네. 그냥 지내기에는 편해요."
바에 손을 짚고서 라희와 혜영이 대화 하는 것을 가만 듣고 있던 제프가 끼어들었다.
"진짜 사람에 따라 태도가 정말 확 다르네요. 나랑 이야기할 때는 대꾸도 안 하고 말도 짧았는데."
"네가 시시껄렁한 바람둥이 인 것을 진즉 파악했나 보지. 라희도 눈이 있으니 말이야."
"제가요? 하, 오해세요. 누님."
"제프야. 내가 네 히스토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던 개도 안 믿겠다. 사람이 말이지, 나이가 들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쓰여 있다고. 넌...."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혜영을 바라보는 제프를 향해, 혜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마에 딱 적혀 있다. 진성 바람둥이. 접근 주의라고."
"와, 누나. 정말 그러기에요?"
둘이서 투닥거리고 있을 때, 식당 안쪽으로 사라졌었던 캐서린이 간단한 핑거푸드가 든 접시를 들고 나타나 바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딱 보자마자 혜영이 네가 좋아할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진짜 두 사람이 서로 알 줄이야. 그것도 한국도 아닌 영국에서 만나서 말이지."
캐서린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혜영의 시선도 라희를 향했다. 라희는 갑자기 두 사람이 진지하게 쳐다보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라희처럼 청초한데 약간 분위기 있는 미인형이 내 취향이지. 남자였다면 당장 고백했을 거야. 그런데 불행히도 난 여자고, 여자라서 만나게 된 거니까. 그때 머물렀던 런던 A 민박집이, 독실 형인데다가 독보적인 여성전용 한인민박이어서. 영국 혼자 여행 온 여자들 사이에서는 유일한 숙소지 뭐. 도미토리는 남녀 혼숙이고 일반 한인 민박도 여자 혼자 머물기에는 좀 그렇잖아."
"몰라 난. 그런데 안 가봐서. 더군다나 나는 여태껏 혼자 여행해 본 적이 없잖아. 우리 남편이 호스텔이나 민박을 갈 위인도 아니고."
캐서린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혜영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쯧쯧. 호텔만 숙소가 아니란다. 얘가, 여행의 참맛을 몰라. 새로운 장소를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신기한 경험하고 이런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너도 결혼해봐라.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 하. 거기, 노예."
캐서린이 제프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놀지말고, 일해. 난 코스모폴리탄."
"제프. 나도 같은 거 한잔 추가. 라희 너는?"
혜영이 물었다. 라희는 앞에 놓인 빈 잔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초코 맛이 달콤한 것이 혀끝에 착 감겨서 감칠맛 났다.
"저는 이걸로 다시 한잔이요."
"들었지?"
제프가 미간을 찡그리며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자, 캐서린이 힐끗 올려다보며 말했다.
"코스모 2잔, 초코 마티니 1잔. 오더다. 어서 일해."
"네네."
제프가 고개를 숙이고 바삐 재료들을 조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혜영이 캐서린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쟤 얼마 까야 되니? 그거 비싼 거지?"
"글쎄. 정확한 금액을 말하긴 그렇고. 이번 방학 끝날 때까지는 24시간 마구 부려 먹기로 했으니까."
둘의 대화가 오가자, 제프가 툴툴거리며 한마디 했다.
"악마."
"야, 누구보고 악마래. 얼른 일이나 해. 너 그나마 내가 있어서 다행인 줄 알아. 네 매형이 천사라 감싸준 거지, 아빠가 아시면. 어휴."
캐서린이 가차 없이 일갈하자 제프는 쳇, 하고 투덜거리면서 다시 손을 움직였다. 오가는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니, 제프는 어떤 일로 누나에게 약점을 잡혀서 아버지께 함구해주기로 약속받은 대신,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누나의 시중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매치고는 꽤 하는데?"
새빨간 크렌베리 주스가 섞인 코스모폴리탄 칵테일을 기울여 맛본 혜영이 말했다.
"얘가 평생 놀고 먹은 것 밖에 전력이 없잖아. 허구한 날 여자들과 술집을 전전하다 보니 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웬만한 바텐더보다 잘 만들어."
"그게 아니라, 절대 미각이라서 그런 거라고요."
"어휴. 자뻑은."
캐서린이 야유하며 손사래를 치자 제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래도 잘 만들긴 하잖아. 칵테일, 뭐 뭐 만들 수 있어?"
"한 100여 개 정도요?"
"와우, 바텐더로 나가지그래?"
혜영의 말에 제프는 싱긋 웃었고 캐서린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쟤가 잘도 남 비위 맞추고 있겠다. 부추기지 말고 그냥 마셔. 낮술도 오랜만이네."
"그러게. 우리 예전에 이렇게 낮술로 시작해서 밤새워 마시고 있으면 네 남편이 데리러 오고 했던 거 생각난다. 그땐 남자친구였나?"
"응. 그렇지, 결혼 전이었으니까."
제프가 만들어 내는 칵테일은 맛이 꽤 좋았다. 혜영과 캐서린의 대화를 들으며 라희는 조용히 칵테일을 마셨다. 순식간에 잔이 비워지고, 여자들은 다시 똑같은 칵테일을 주문했다. 제프는 툴툴거리며 칵테일 제조에 열을 올렸다. 연달아 두세 잔 술이 들어가자, 가벼운 단맛 속에 숨어 있던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느릿하게 혈관을 타고 흘렀다. 말초 감각이 조금씩 둔해졌다.
"아깐 잘 못마신다더니, 이제 보니 상당히 잘 마시네요?"
제프가 넉 잔째 초코 마티니를 건네며 말했다. 라희는 잔을 받아 들고 긍정했다.
"맛있어요. 술이 들어간 핫초코 느낌? 그런 맛이라서요."
"매그놀리아 컵케이크 좋아하면 딱 좋아할 맛이긴 해요. 다디달잖아요. 어제 컵케이크는 입맛에 맞던가요?"
"네."
라희가 짧게 대답했다.
"매그놀리아 컵케이크? 그건 무슨 소리래? 둘이 만난 적 있어?"
옆에서 듣고 있던 혜영이 물었다. 그러자 캐서린이 말했다.
"어제 내가 바나나 푸딩 사오라고 시켰거든. 거기서 만났나 보네. 그렇지? 제프."
"맞아. 누나. 그리고 그거 원래 라희씨 것이었거든. 줄 서는데 내 바로 앞이었거든. 마지막 하나 남은 거 양보받았어."
캐서린이 라희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고마워요. 라희씨. 덕분에 잘 먹었어요. 난 두통이 도지면 단 거 먹어야하는데, 그날 딱 그게 꽂혀서 너무너무 먹고싶은거 있지."
"아니에요.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혜영 언니 친구분이신데."
"좋아. 보기보다 성격 담백해서 마음에 드네."
보기보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보이는걸까. 문뜩 궁금했다.
"보기에는 어떤데요?"
라희가 조심스럽게 묻자, 바로 옆에 앉은 혜영이 답했다.
"몰라서 물어? 완전 여성스럽잖아. 조금 새침한 천상여자 스타일? 가만 보면 아이라인이니 마스카라니 화장 하나도 안했는데 진짜 풀메이컵 한것처럼 속눈썹도 길고 눈매도 또렷해서 예쁘지. 라희, 지금 메이크업 전혀 안한거지?"
"아니에요. 파우더 바르고 립틴트도 했어요."
불쑥. 혜영이 손을 내밀어 손끝으로 라희의 뺨을 미끄러지듯 스륵 만졌다.
"그거야 화장축에도 못끼는거고. 이야. 진짜 피부 축복이다. 어쩜 이렇게 매끈해. 잡티나 점도 하나 없고. 아, 결혼식을 앞에두니 피부과랑 피부관리실 다니고 있는데 평생 다녀도 이렇게는 안될거야. 하아, 다시 태어나야 되나보다."
"야, 이 아가씨랑 너랑 나이차가 얼마나 나는데. 이십대랑 삼십대랑 같니? 너도 저때는 저랬다고 위안삼아. 그런데 라희는 나이가 어떻게 돼? 언뜻 제프랑 비슷해 보이는데. 내 동생은 스물 넷."
캐서린이 호기심 가득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올해로 스물 셋이요."
라희가 대답하자, 캐서린이 제프를 힐끗 보며 말했다.
"아, 거봐. 비슷하지. 약간 성숙해 보이는 분위기 때문에 내가 나이를 높게 쳤나봐. 제프가 한 살 위네."
"내가 오빠네요. 자, 그런 의미에서 여기."
새로 만든 초코 마티니가 라희 앞에 놓였다. 이번에는 장식에도 신경썼는지, 녹색 민트잎과 긴 빨대 모양의 초코 스틱이 꽂혀있었다.
"고맙습니다."
라희의 대답을 들은 제프의 눈이 살짝 휘었다. 잔을 기울여 마시자 훅, 하고 끼치는 알콜과 함께 아찔한 단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라희는 혀끝에 맴도는 단 맛을 음미했다. 어쩐지 좋아하게될 것 같은 맛이었다.
라희가 잔을 기울여 칵테일을 홀짝이는 사이, 옆에 캐서린과 혜영은 결혼식 준비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 할 예정인데 앨범 촬영 스튜디오와 메이크업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끼어들 이유가 없는 주제였기에 라희는 가만 앉아서 잔을 기울였다. 빈속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술기운 때문에 몸이 후끈후끈 했다.
"평소에 단 거 안좋아하죠?"
라희를 가만 지켜 보고있던 제프가 말을 건넸다.
"네?"
뜬금없는 물음이지만, 틀린말은 아니었다. 평소 단 것에 대한 욕구는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누나 표정이 딱 그래요. 두통때문에 달달한 게 먹고 싶을때는 눈이 뒤집혀서 찾는데, 보통 때는 돌 보듯이하거든요. 대개 단 거 좋아하는 여자들은 이 초코 마티니를 맛보면 정말 호들갑스럽게 맛있다고 표현하고 막 그러죠. 특히 이런 대단한 미남이 정성들여 만들어준 것에 크게 감동하면서요. 그런데 그쪽은 덤덤해 보여서 물어보는 거에요."
"......좋아하지는 않아요."
라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미남이라는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지만, 지적하는 일은 포기했다. 친 누나 조차 자뻑이라 혀를 내두를 정도니.
"단 거 좋아하지 않은 여자가 단 거 찾을때는, 둘중에 하난데."
제프가 은근한 눈빛을 흘리며 말했다.
"........?"
라희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제프는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울하거나, 혹은. 피리어드(period) 기간이거나."
생리(period) 기간. 여자 앞에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던지는 남자의 뇌구조는 어떻게 된걸까. 라희가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제프는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입꼬리를 늘였다.
"맞췄나보네요."
라희는 남은 칵테일 잔을 기울였다. 완전히 비운 잔 바닥에는 거뭇한 초코 시럽의 흔적남 남았다. 이쯤, 일어서야 하나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옆에서 금빛 휴대폰을 힐끗 본 혜영이 아는 체를 했다.
"그거, 헤러즈에서 산거지? 봤던거 같아."
확실히 눈에 띄는 휴대폰이긴 하다. 라희는 재빨리 주머니 속으로 휴대폰을 감추면서 얼머무렸다.
"아. 네."
라희가 어색한 표정을 짓자 혜영은 관심을 거두고 캐서린과 다른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 성숙한 배려가 고마워서 가만 있었는데, 앞에서 불쑥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에요? 외국인?"
제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한국인은 아니죠?"
"네?"
놀란 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휴대폰 선물 해 준 사람이요. 직접 샀을거 같지는 않고. 보통 아랍계 쪽에서 선호하는 거 거든요. 오일 머니 과시소비의 일환이죠. 금칠 아이폰이나 버투(Vertu: 럭셔리 휴대폰 브랜드)나."
하긴. 제정신이 박힌 한국인이라면, 출시 후 이년도 채 되지 않아 새 모델이 출시되어 기존 모델은 헐값에 거래되는 휴대폰에 이렇게 큰 돈을 쓰지는 않을 거다.
"누구에요? 진짜 궁금하네요. 남자친구 절대 없을 거 같은 타입이라 그런가."
"......"
침묵하는 라희를 향해, 제프는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자를 만나다 보면요. 어느 정도 타입이 보이거든요? 가령, 여기 있는 혜영 누님은 코드가 맞는 남자를 좋아하죠. 자신과 코드가 맞으면 사랑에 빠지는 즉흥적인 타입? 반면 우리 누나 같은 경우는 라희 씨랑 비슷한데, 이성에 별 관심이 없어서 진짜 상당한 공을 들여야 넘어오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매형이 어릴때 부터 줄기차게 쫓아다녀서 결국 결혼에 골인했죠. 한가지 쉬운 질문 해볼까요?"
제프는 라희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라희씨 대학생이랬죠? 학교 졸업하고 뭐 할 생각이었어요?"
졸업 후? 질문을 들은 라희는 생각에 잠겼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직업은 공무원이나, 아니면 임용시험 친 후 중등 교사. 마침 교직이수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내가 맞춰볼까요? 교사나 공무원 아니에요? 일반 기업체는 흥미없고요."
정답. 딱 맞췄다. 어찌 알았느냐는 표정으로 라희가 제프를 바라보자 제프는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라희씨 같은 타입은 말이죠. 애교라고는 흔적도 없고, 유머 감각도 없고, 남자에게 관심도 끼 부릴 생각도 없는 이런 타입은 평생 직장을 선호하더라구요.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을 배제하고 생각하니까 안정되고 든든한 직장을 선택하죠. 그러다 혼기가 차면 등 떠밀려 중매 결혼하거나, 혼자 살거나 그럴텐데. 남자 입장에서는 여지를 안주기 때문에 정공법으로 오랜시간 공을 들여야하는 타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선뜻 다가가기에는 기피되는 대상이에요."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으나, 제프는 마치 속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곧은 시선으로 라희를 내려다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칠한 아이폰을 선물 받고 같이 뉴욕에 와서 세인트 리지스에 묵다가 우울해져서 귀국하고 싶어질 정도의 관계면 일단 남자친구는 맞는 거네요? 그것도 외국인 남자친구."
마치 자신의 추리가 정답인 양 제프가 뻐기며 말을 이었다.
"라희씨, 그렇게 안 보였는데 의외로 돈에 혹하는 타입인가 봐요?"
화끈.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