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제니퍼가 돌아간 한참 뒤까지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마음이 무거웠다. 라희는 한참을 기대 서 있던 현관에서 벗어나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 문을 열고 검은색 외투를 꺼내 입으려다 멈칫했다. 이 외투는 런던에서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 옷이다. 엘리자베스는 제임스의 동생. 제임스는 바흐의 친구. 머릿속으로 바흐와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이유진. 브랜다. 제니퍼.
이유진은 바흐의 연인. 아니, 정확히는 연인이었다. 라희는 알마하 리조트에서 언뜻 본 사진을 기억했다. 아마도 사진속 풋풋하고 달콤했을 거 같았던 둘 사이는 지금은 완전히 끝났다. 뉴욕에 와서 호텔에 머무는 도중, 우연한 기회에 확인해 본 결과, 바흐의 지갑 속에 들어있던 두사람의 사진은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바흐가 직접 인정하기도 했다. 그날, 말이다. 로드윌 갤러리에서 유진과 마주한 그날.
라희는 손을 들어 뺨을 가볍게 만졌다. 손바닥으로 닿는 감촉이 느껴지자 뉴욕에 온 계기가 또렷히 떠오른다.
따귀. 그것도 한대도 아닌, 전력을 다한 두대.
당초 라희는 영국에서 조용히 지내고 귀국하려다 그날 갤러리에서 유진과 마주쳐 따귀를 맞고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길로 바흐를 따라 뉴욕에 왔다. 단 한가지 이유, 지금껏 회피하고 있던 이유 때문에.
'이유진.'
허나, 뉴욕에 온 이후, 라희는 유진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만날 수도 없었다. 핑계를 대자면, 오늘로서 호텔에서 벗어난지 겨우 사흘째니까.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유진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 한 구석은 몹시 두려웠다.
'트라우마인가?'
손끝에 닿는 뺨의 얼얼했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잠시 그때가 생각나 숨을 참았던 라희는 미간을 좁히며 스위트 룸을 벗어났다. 더러운 기분을 씻어줄 신선한 공기가 간절히 필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호텔을 나오니 한겨울 뉴욕은 몹시 추웠다. 고층 건물 사이로 부는 세찬 바람이 뺨을 얼얼하게 깨웠다.
얼굴 피부가 땡땡 얼정도로 시리게 와 닿는 겨울 바람을 맞으며, 라희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었다. 복잡한 뇌리속에 선명한 이름들이 여전히 떠다닌다. 브랜다. 제니퍼.
브랜다는 바흐의 고모. 그가 스스럼없이 집이라고 표현하고 거의 매일 방문하는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 그리고 제니퍼. 오늘 호텔로 찾아와 얼굴을 내민 제니퍼는 브랜다의 외동 딸. 바흐의 고종사촌 동생. 아까 보인 태도로 미루어 판단해 볼 때, 제니퍼는 이유진과 라희의 대치에 흥미를 보일 뿐,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그 누구의 편도 아닌 듯 보였다.
'선전포고라...'
제니퍼가 흥미롭다는 듯 건넨 말을 떠올린 라희는 미간을 찡그렸다. 선전포고라는 말은, 어딘지 신사적이었다. 교전 전에 상대방에게 공격의사를 먼저 알리는 교양 넘치는 행위니까. 그런데 아무런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다가와 야만적으로 따귀를 날린 이유진에게도 지극히 신사적인 선전포고를 해야 할까? 라희는 입가에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해야, 마음속 응어리진 분이 확 풀려 후련해질까.
지난번 만남에서 다짜고짜 따귀를 날렸던 유진이었으니까,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처음 나영의 생일파티에서 바흐와 함께 들어오는 유진을 봤을 때는 도도하고 고고해 보였던 유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바흐의 오피스텔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는, 비록 심사는 뒤틀린 듯 보였지만 겉으로는 무척 교양있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행동거지를 보였다. 그 뒤, 다시 만나 1억을 건네받았을 때만 해도 차갑고 오만한 태도였는데, 지난번 런던에서는 그야말로 정신줄을 놓고 광분하며 갖은 패악을 부렸다.
이유진이라는 인간의 더러운 성격을 날것 그대로, 밑바닥까지 뒤집어 까서 생생하게 내보인 느낌. 그러니 앞으로의 유진이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예상가능하거나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 미지의 것이 무섭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앞으로 뉴욕에서건 어디서건 유진과 다시 맞딱드릴 경우, 단둘이 만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흐와 함께 만나는 편이 가장 이상적이겠지. 뉴욕에 온 목적에 부합하기도 하고. 유진이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경기하도록, 그녀가 보는 앞에서 바흐의 품에 안겨 교태를 부리거나, 아니면 진하게 키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라희는 문득 무작정 거리를 걷던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공원. 호텔에서 나와 직진으로 5번가를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센트럴 파크였다.
'사람 많다.'
며칠 전 왔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센트럴 파크는 추운 한겨울, 평일 낮에도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만약 한적한 외진 곳을 선호한다면 구불구불한 오솔길 깊은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대부분의 메인 로드는 사람들이 점령했다. 세련된 코트를 걸쳐 입고, 시크한 선글라스 착용하고서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는 멋쟁이 주부들과 느릿한 걸음으로 목줄을 당기며 앞서 가는 개들을 산책시키는 애견인들, 그리고 이런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매를 드러낸 간편한 차림으로 뛰는 조거(Jogger)들. 심지어 반소매와 반바지를 차림으로 땀을 흘리며 뛰느라 여념 없는 운동 중독자들까지.
그들 사이에 섞여들어 조금 더 걷다 보니 저만치 움푹 파인 곳에 아이스 링크가 보였다. 안내판에 Trump Rink라고 명칭이 적힌 넓은 아이스링크에서 온갖 사람들이 보였다. 공원 한복판에 있어서인지 어제 지날 때 보았던 록펠러 센터의 도회적인 느낌의 아이스링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쪽은 잘 차려입은 세련된 도시인 분위기였다면, 여기는 대충 걸쳐 입고 나와 마냥 신나하는 분위기. 겨울이라 황량하고 메마른 자연 풍경 속 위치한 아이스 링크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온통 활기가 넘쳤다.
다들 산책만 할 뿐인 조용하고 정숙한 공원 내에서 떠들썩한 분위기가 이색적이라 그런지, 오가던 사람들도 저마다 발걸음을 멈추고서 산책로 옆 난간에 기대 하얀 아이스 링크를 내려다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라희도 아이스링크를 관람할 수 있는 길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색 철제 난간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어 어깨를 세우고서 멍하니 아이스 링크를 바라보았다. 맨해튼 도심의 한복판.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후....."
라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이유진, 제니퍼, 브랜다도 저 사람들처럼 낯선 타인이 될 수도 있다. 단 한사람. 그 사람과 타인이 되면 된다면. 라희와 그들과의 접접은 유일했으니까.
바흐.
바흐과 타인이 되면 어지러운 낙서처럼 머릿속을 흐트러뜨리는 선전포고니, 이유진이니, 제니퍼니, 브랜다니, 모두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다.
"하아, 그냥 귀국해 버릴까......."
머릿속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중얼거림으로 튀어나왔다. 그때 옆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하세요."
한국말?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철제 난간에 팔꿈치를 걸친채로 몸을 수그리고 아이스링크를 쳐다보는 남자가 보였다. 평균보다 살짝 큰 키. 보드라워 보이는 곱슬머리. 그리고 라희를 힐끗 바라보는 서글서글한 눈매. 이름이 뭐였더라? 조씨였는데. 아, 제프. 조제프였다.
깜짝 놀란 시선과 마주치자, 제프는 몸을 바로 세우고는 라희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왜 여기 있는데요?"
"네?"
"방금, 귀국해버릴까라고 했잖아요. 난 뉴욕보다 서울이 더 좋던데.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중대한 이유라도 있어요?"
라희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많은 남자를 여기서 또 만나다니. 라희의 시선을 받은 제프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앞으로 펼쳤다.
"자, 헤아려 볼까요. 엊그제 티파니."
엄지 손가락이 손바닥으로 접혔다.
"어제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검지 손가락이 안으로 접혔다.
"오늘, 센트럴파크의 트럼프 링크."
중지까지 접은 제프는 오므려 접힌 세 손가락을 보란듯 라희를 향해 흔들면서 말했다.
"이렇게, 삼일 연속이네요?"
그는 눈매를 휘고서 말을 이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는데, 우린 아무래도 대단한 인연이거나 혹은."
휜 눈매 끝이 가늘어진다.
"그쪽, 스토커에요? 나한테 반해서?"
"네에?"
순간, 너무 어이없어서 말꼬리를 높이 올린 라희를 향해 제프는 피식 웃었다.
"아아, 그래서 한국으로 못 돌아가시는 구나. 나 따라다녀야 하니까."
"하."
"이해해요. 내가 워낙 잘생겨서. 다들 날 갖고 싶어 안달이 났죠."
"저기요."
라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정색하고 그를 바라보자, 제프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뭐죠?"
인상을 찡그리고 날카롭게 묻는 라희를 향해 제프를 빙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남자친구가 없을 만 해서요. 애교 없는 성격인 것은 알았는데, 지금 보니 유머감각도 전혀 없네요. 너무 뻣뻣해요. 그쪽에 비하면 우리 집 악마는 양반이네요. 포악하지만 적어도 성격은 유쾌하니까."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어제부터 악마가 어쩌고 계약이 어쩌고 했었다. 집에 있는 악마? 어차피 남의 일. 라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아이스링크에 시선을 던졌다. 관심 없다.
"거기다 호기심도 없으시네요?"
옆에서 들려오는 제프의 목소리. 라희는 깨끗이 무시했다.
"이정도 미남이 악마, 악마 하면서 인생 비관하는 태도로 투덜거리면 다들 한 번쯤 누구냐고 묻던데."
진짜, 말이 많은 남자다. 아무래도 조용히 아이스 링크를 바라보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란 글렀다.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도 한숨 쉬던데. 자꾸 그렇게 한숨 쉬지 마세요. 옆에 사람까지 복 달아나니까."
별것이 다 트집이었다. 말 많은 데다가 이젠 잔소리까지.
"복 달아 난다고, 누가 그래요?"
"우리 할머니가요. 그쪽 할머니는 그런 말 안 해주던가요?"
"........."
그냥 자리를 옮겨야겠다. 결심한 라희는 마지막으로 제프에게 말을 던졌다.
"이봐요. 그쪽, 절대 미남도 아닌데다가, 말 많고, 시끄러워서 딱 질색이에요. 혹시 또 마주치면, 제발 아는 체 하지 마요. 알겠죠?"
제프는 뚱한 표정으로 라희를 힐끗 바라보았다.
"싫은데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하?"
그래. 말이 안 통하는 남자였지. 라희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자, 제프가 얼굴을 풀고 입매를 위로 올렸다.
"난 그쪽 마음에 드는데. 진짜, 눈치까지 없으시구나. 남자친구뿐만 아니라 지금껏 연애 해본 적도 없죠?"
".......됐거든요."
차갑게 말한 라희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겨려 할 때, 제프가 덧붙였다.
"친구도 없는 거 아니에요?"
"이봐요!"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한마디 하려고 언성을 높일 때였다. 갑자기 큰 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제프!"
"어, 악마다."
제프의 어깨너머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둘 다 여자였다. 그중에 한 명은 티파니에서 마주쳤던 여자였고, 다른 한명은..
"어?"
티파티에서 본 여자가 제프 앞에 서 있는 라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옆의 여자를 보며 외쳤다.
"혜영아, 저기."
혜영? 라희는 눈매를 좁혔다. 이상하게도 어딘지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머릿속은 온통 안개처럼 흐렸다.
"내가 말했잖아. 엊그제 딱 네 취향인 여자 봤다고."
여자가 손으로 라희를 가리키자, 혜영은 라희 향해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벼락 맞은 것처럼 일시에 기억이 떠올랐다. 영국에 도착하고 민박집에서 내리 앓고 있을 때, 식당에서 만났던 여자. 한혜영? 그런데 외양이 약간 변한 것 같았다. 런던에서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통통한 체격이었는데. 지금은 늘씬하고 갸름해서 못 알아 볼뻔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모습이.."
라희가 놀라 하며 슬림한 몸매인 혜영을 바라보자, 혜영이 싱긋 웃었다.
"살이 많이 빠졌죠? 못 알아보겠죠?"
"서로 아는 사이야?"
"뭐야, 누나. 티파니를 알아?"
두 사람의 거듭된 질문에 혜영은 라희를 보며 밝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가 어떤 사인데. 내가 조금 과장하면 생명의 은인이거든. 그렇죠? 라희씨."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