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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40화 (1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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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잠결이었나 보다. 라희는 맨살에 닿아 살결을 부드럽게 더듬는 손길에 기분이 좋아져 몸을 가늘게 떨었다. 살갗에 닿아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은 어깨를 둥글게 어루만졌다가 등줄기를 타고 서서히 내려왔다. 허리를 타고 가 둥근 엉덩이를 감싸고 슬며시 움켜쥐었다가, 팬티 라인에 닿자,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이내, 짧은 한숨이 이마 위에 옅게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묵직한 손길이 등 언저리를 포옥 감싸 안아 포근하게 품어주었다. 라희는 넓은 품 안에 코를 묻고서 뺨을 부비며 얕은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밤새 꾼 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꿈속에서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기분을 느꼈다.

어렴풋이, 어둠 속에서 그가 이마와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던 거 같다. 보들보들한 입술의 감촉이....

'감촉?'

번쩍. 정신이 들었다. 라희는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환한 침실을 마주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습관처럼 침대 옆자리를 살펴보았다. 바흐는 자리에 없었다. 어제 오후부터 세상 모르게 푹 자고 일어나 새벽에 출근한 모양이었다.

그가 길게 누웠던 흔적을 바라보며 라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서 내내 같이 지낼 때는 그나마 덜했는데, 이렇게 아침 일찍 출근해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바흐의 일상을 생생히 접하고 나니, 정말 그는 하루하루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학하기 전, 술자리에서 대학 선배들에게 취업 정보를 주워듣기에는 금융권, 특히 증권 쪽은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라고 했었다. 바흐는 증권 중에, 특히 위험 부담이 높다는 파생상품, 그중에서도 거래 단위가 가장 큰 선물과 찰나의 대결인 외환거래 쪽을 다루었다고 들었으니 저녁마다 피곤해 보이는 일도 무리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바흐가 영국에 있을 때도 온전히 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늘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보거나 읽거나 했었으니까. 라희는 바흐의 빈자리를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베드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각. 아무리 생리기간이라지만, 오늘은 특히 늦잠을 잤다. 매일매일 늦잠의 연속이긴 한데, 생리 기간이 아닐 때는, 그라는 핑계가 있었으니까. 그와 잠자리를 하고 나면, 정말로 몸이 노곤노곤해서 스르륵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늦잠에 대한 핑계는 항상 있는 거다. 생리, 그리고 잠자리. 물론 어느 쪽도 그다지 건실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라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생리 중에는 잠잘 때 혹시 밖으로 샐까 봐 탐폰과 패드를 동시에 쓰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을 가야 했다. 긴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나서 활동하기 편한 옷을 걸쳐입었다. 레깅스와 오버사이즈의 긴소매 티셔츠.

'오늘은 어디를 가지?'

라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맨해튼에서 가볼 만 한 곳을 검색했다. 그러다가 어제 모마에서 맞닥뜨렸던 뿔테 아버님을 떠올렸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장소는 패스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박물관, 미술관을 제하고 나니 갈만한 곳은 몇 없었다. 브로드웨이의 타임스퀘어도 아직 안 가보았는데 그쪽으로 가서 돌아다닐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정오를 지난 시각, 어제 하루 푹 잔 바흐는 회사에 출근해 장이 마감하는 4시까지 정신없이 바쁠 터였다. 어제도 대충 시간을 가늠해보면 장이 마감하자마자 호텔로 돌아와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바흐는 아니다.

'누구지?'

라희는 현관문으로 걸어가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몸을 돌리려는데, 다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띵동.

현관문 렌즈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밀라노 스위트 담당 집사, 에반스였다. 라희는 별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열린 현관 앞에는 집사 혼자가 아니었다. 에반스 옆에는 젊은 여자가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서 있었다.

"미스송, 안녕하십니까."

에반스는 정중히 인사말을 건네면서, 그의 옆에 서 있는 젊은 아가씨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방문객이 찾아오셨다고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젊은 아가씨는 라희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박."

라희의 놀란 눈동자가 여자를 향해 좁혀졌다. 나이는 20대 초반. 혹은 그보다 어릴지도. 긴 갈색 생머리, 이국적인 얼굴 생김새, 키는 라희보다 작았다. 160 될까 말까 한 작은 키.

"진짜네!"

여자가 짧게 외쳤다. 굳은 라희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는 집사를 보며 여자가 말했다.

"여기 이렇게 만났으니, 이제 자리 좀 피해주실래요?"

"미스 송, 아시는 분입니까?"

집사의 물음에 라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눈이 마주치자 입을 옆으로 길게 늘어뜨려 억지 미소를 지었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라희가 떨떠름하게 묻자, 여자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고서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니퍼에요. 제니퍼 에오르그."

"아시는 분이십니까?"

에반스가 재차 묻는 말이 귀에 먹먹하게 들렸다. 라희는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제니퍼와 시선을 맞추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반스, 차를 준비해 주시겠어요?"

***

-달깍.

에반스는 소파 테이블 앞에 멈춰 서서 손에 들린 쟁반에서 꺼낸 찻잔을 테이블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라희와 제니퍼가 말없이 서로를 탐색하는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고풍스러운 찻잔과 그릇에 담긴 홍차와 쿠키, 그리고 스콘이 놓였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에반스가 자리를 피해 나가자마자, 제니퍼는 라희를 향해 크게 외쳤다.

"우와 진짜네요!"

".......네?"

라희가 미간을 좁히며 제니퍼를 바라보자, 제니퍼는 눈을 과장되게 동그랗게 뜨고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침에 유진 언니가 집에 와서 이야기해줄 때까지만 해도 까맣게 몰랐거든요!"

유진? 이유진. 이유진이 집에 왔다고? 바흐의 고모 집에? 라희는 제니퍼를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 호들갑스러운 아가씨는 굳이 시키지 않아도 대단히 많은 말을 쏟아낼 성격으로 보였다.

"이야, 진짜였네요. 진욱 오빠가 여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제니퍼는 라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덧붙였다.

"어제 진욱 오빠가 엄마 보러 오지 않았었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집에서 통 자고 가지 않는다고 엄마가 서운해했었는데 얼굴까지 비치지 않자 혹시 유진 언니와 함께 있는가 싶어서 유진 언니에게 전화했더니, 글쎄, 언니가 오늘 아침에 와서 한다는 말이."

제니퍼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런 말 여기서 해도 되나.."

"해봐요."

라희의 말을 들은 제니퍼는 어색한 표정을 풀고서 말했다.

"하여튼, 유진 언니가 몰랐느냐고, 진욱 오빠가 여자 데리고 있다고. 그 여자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거라 알려주더라고요. 물론, 그 여자는 라희씨죠. 맞죠? 이름이 라희."

비록 겉모습은 백인과 섞인 듯한 이국적인 외모였지만, 제니퍼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라희는 제니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네. 송라희에요."

이유진이 이름까지 친절하게 밝혔었나 보다. 자신의 이름을 말한 라희가 이내 입을 다물자, 제니퍼는 팔을 뻗어 쿠키를 집어 입에 넣으며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너무 궁금해서 오빠가 늘 묵는 세인트 리지스에 와서 숙박객 이름을 대니까, 여기로 안내해 주더라고요."

"......."

라희는 내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소파 테이블에 놓인 홍찻잔을 기울여 마셨다. 엘리자베스가 평가한 대로, 바흐의 고종 사촌 동생 제니퍼는 구김 없고 밝고 해맑은 성격 같았다. 밝아도 너무 밝아서 탈이랄까. 이곳에 불쑥 찾아와 대뜸 바흐가 숨겨 놓은 여자가 당신이냐며 묻는 중이니까

"......어떻게 만났어요?"

제니퍼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뭐라고 답해야 하지. 순간 라희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백지 같았다.

"유진 언니 말로는, 따로 사귀는 사람이 서울에 있다면서요?"

라희는 눈을 깜빡였다.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라 당황스럽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사귀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도 했어요. 유진 언니가. 라희씨는, 그런 쪽 여자라면서요?"

그런 쪽? 순간 기가 찼다. 어쩐 쪽? 라희가 눈매를 좁혀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제니퍼를 바라보자, 제니퍼는 약간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남자를 만나서…….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아, 정말 난감하다. 하여튼.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요. 맞나요?"

당사자 앞에서 모욕적인 뉘앙스의 말을 해놓고서 맞냐고 확인하려는 듯 물어보는 천연덕스러움에 라희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요."

기가 막혔지만, 겨우 끄집어낸 말이 목구멍으로 기어나왔다.

"그, 그래요. 참. 나 라희씨에 대해서 잘 몰라요. 몇 살이에요?"

"몇 살이신데요?"

라희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물었다. 제니퍼는 조금 당황했는지 눈을 껌뻑이다가 말했다.

"열아홉이에요."

"그쪽보다 많아요."

라희의 대답에 제니퍼는 조금 당황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 네. 언니시구나…. 그럼."

제니퍼가 라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직업은 뭐에요? 그런 일 말고요."

"그런 일이요? 정말 어이가 없네요. 대학생이에요. 대학교 3학년."

"그런데, 뉴욕에는 왜 왔어요? 진짜 진욱 오빠 홀리려고 온 거에요? 돈 받고?"

점입가경. 제니퍼가 태연히 뱉어내는 말은 하나하나가 커다란 돌덩이처럼 라희에게 던져졌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했던가. 만약 마음이 난 상처가 눈에 보이기라도 한다면, 지금 라희의 마음은 던진 돌덩이에 맞아 피멍이 들고 살이 터져 피가 흥건하게 흐를 것만 같았다. 라희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러려고 온건 아니에요."

"그럼요?"

제니퍼의 호기심 어리는 눈길을 받아내는 라희는 속으로 한 이름을 가차 없이 짓씹었다. 이유진. 너 때문에 온 거라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해주어서 고맙다.

"이유진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헤? 유진 언니한테요? 우와."

제니퍼는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마, 선전포고라도 하게요?"

".....네?"

"그렇잖아요.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볼일이 있다는데. 그거 선전포고 아니에요?"

그런 거였나?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 맞은 기분. 라희는 눈을 재차 깜빡이다가 급히 홍차 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마셨다. 선전포고? 그렇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전쟁이지? 라희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힐끗 건너다본 제니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와서, 유진 언니 만난 적 있어요?"

"......."

정말 제니퍼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상식이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 예의는 머릿속에 흔적도 없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저렇게 천진함을 가장해 묻는 교묘한 악취미일까.

라희는 제니퍼와 함께 있은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런던에서 제임스가 내린 평가가 제법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주장이 강한 수다스럽고 시끄러운 여자아이.

더군다나, 난처한 질문을 해 놓고도 도대체 언제 대답할 거냐는 듯 빤히 바라보며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라희는 찻잔을 손에서 내려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그렇구나.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요. 그럼."

제니퍼는 이제 볼일을 다 봤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라희를 향해 작은 손을 내밀었다.

"얼굴 봤으니 이만 가볼게요. 그런데 전령 역할은 제가 해도 되죠?"

"전령이요?"

"네. 메신저(messenger)요. 누군가는 선전포고를 전달해야 하니까요."

마치 강 건너 재미있는 불구경이라도 관람하는 듯한 표정으로 제니퍼는 눈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라희를 보며 눈짓했다. 어서 악수하자는 듯이. 라희는 내밀어 진 손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말, 뭐하자는 건지.

"그건 사양할게요."

"헤. 그래요 그럼. 직접 만나서 해야 의미가 있죠."

제니퍼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가볍게 말했다. 라희의 말에 김을 빠졌지만, 앞으로 벌어질 전쟁을 기대하고 있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참."

현관문을 나서려던 제니퍼가 라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싱긋, 가벼운 미소를 띠고서.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라희 언니."

"......."

갑자기 불쑥 찾아와 내내 속을 할퀴며 긁어대더니, 이젠 언니라고 부르겠다는 제니퍼. 라희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제니퍼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겠는가.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데.

"그럼. 또 봐요. 라희 언니."

정말로 기쁜 듯이, 라희를 향해 밝게 손인사하고 제니퍼는 스위트 룸을 나섰다.

-달깍.

현관문을 굳게 닫자. 잔뜩 곤두섰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던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뚝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순간 맥이 탁 풀려서. 라희는 그대로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찡그린 미간 사이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져 오면서, 지독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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