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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보게 되네요."
"아. 네에.."
라희는 짧게 답하고 고개를 돌려 줄을 초조하게 살폈다. 매장안에서 막혔던 줄은 이내 스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골이세요?"
남자가 뒤에서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저어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럼, 처음이세요? 아, 한국에 사세요? 관광 오셨어요?"
"아. 네."
보통 이런식으로 단답형이면 눈치를 채고 말을 걸지 않을 텐데,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뉴욕에 온지 얼마 안됐나보네요?"
"네에."
열흘정도 되어가니, 얼마 안됐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내내 호텔에 머물다 밖으로 나온 지는 이제 고작 이틀째.
"그런데 별로 관광객 티가 안나네요. 어디 다른데서 지내다 오셨나보군요. 뉴욕에는 오래 머무실건가요?"
"........."
라희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데도 남자는 말을 이었다.
"거기다 티파니에서 그렇고, 같이 다니는 일행도 없구요. 혼자 여행 오셨어요?"
"......."
"어디에서 머물고 계세요?"
이정도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어지간 하면 눈치챌 것도 같은데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말 많은 남자였다. 라희는 남자의 말을 한귀에 흘리고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귀찮게 말을 거는 사이 길었던 줄은 상당히 줄어들어 라희는 매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케이크 판매대 옆에서 직원에게 바나나 푸딩을 주문해 아이스크림 통처럼 생긴 하얀 통을 손에 들고서 컵케이크 코너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어느 틈에 뒤로 다가온 남자가 라희의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저기요. 그거 제게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이거요?"
라희가 하얀 바나나 푸딩 통을 들고 묻자 남자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네. 그거요. 딱 하나 남은 거더라고요. 이제 품절이라 저녁 7시쯤 되면 나온다는데. 저, 지금 바나나 푸딩이 꼭 필요하거든요. 지금 당장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기도 그렇고요. 혹시, 꼬옥 먹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게 양보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라희는 손에든 바나나 푸딩 통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에서 바나나 푸딩은 엄청 달고 맛있으니 꼭 먹어보라는 블로거 추천 표시가 되어 있었기에, 단 것이 무지하게 땡기는 지금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품목이었다.
"네? 저는 딱 이거 하나 사러온 거거든요. 바나나 푸딩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면 당장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요. 당분이 떨어질 때마다 우울증에 걸리는 포악한 악마와 계약했거든요. 불쌍한 노예 신세랍니다."
계약. 라희는 남자의 말 도중에 나온 단어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계약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던가. 라희가 짧은 한숨을 쉬자 남자는 싱긋 미소 지으며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같은 한국인끼리 이번 딱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요? 그쪽이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의 인정, 혹은 범지구적인 인류애에 간절히 호소해도 안되나요? 진짜? 정말로?"
라희가 무덤덤한 표정을 보내자, 남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내 소개도 안 하고 다짜고짜. 제프라고 합니다. 제프 조요. 한국식으로 하면 조 제프죠. 물론, 한국 이름은 따로 있지만요. 조유현입니다. 다 합쳐서 풀네임이 제프 유현 조에요. 전혀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경계하지 마세요. 저는 요 근처 57번가에 살아요. 머무시는 곳을 알려주시면, 바로 저녁에 바나나 푸딩을 사가지고가 사례할게요. 아니면, 뉴욕 일일 관광 가이드라도 해 드릴까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라희는 더는 피곤한 일을 만들기 싫어서 말없이 손에 든 바나나 푸딩 통을 남자에게 건넸다. 호텔에서 이곳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서 꼭 먹고 싶다면,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와서 사 먹으면 된다. 남자는 통을 받아들고서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고마워요.정말로!"
"네."
라희가 남자를 지나쳐 컵케이크를 6개 골라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남자가 지폐를 꺼내 캐셔에게 건넸다.
"제껀데요?"
"양보의 대가죠."
"아니에요. 됐어요. 이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 돈으로 계산할 거에요."
"에이. 악마로부터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라희와 남자는 카운터 앞에서 계산을 두고서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캐셔는 조금 짜증이 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뒤에 주륵 늘어선 계산 줄을 힐끔 보더니 남자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재빨리 눈짓하자 그냥 남자의 푸딩까지 계산해서 남은 거스름돈을 남자에게 건넸다.
"얼마죠?"
엉겁결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매장을 빠져나와 거리에 멈춰선 라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자요."
2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는 라희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남자는 라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쳤다.
"에이. 괜찮대두요. 생긴 건 부드럽게 생겼는데 성격이 너무 뻣뻣하시다. 남자친구 없죠?"
"네?!"
갑자기 어이가 없어진 라희가 말꼬리를 높이며 묻자 남자는 눈매를 잔뜩 휘고서 말했다.
"아, 정곡을 찔렀나 보네요. 외모는 괜찮은데 애교 없는 성격이라 남자친구가 없나 보군요."
"하?"
얼척이 없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라희를 향해 남자는 슬쩍 한쪽 눈매를 찡긋하며 환하게 말했다.
"남자친구 대신, 미남으로부터 새해 선물 받았다고 생각하라고요."
미남? 서글서글한 눈매와 부드러워 보이는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귀염 상이긴 했으나, 미남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라희가 알고 있는 누구와 비교하면 미남의 기준에서 한참 떨어지는 외모. 게다가 키도 중간보다 살짝 큰 정도. 만약 라희가 힐을 신는다면 라희와 키 차이도 얼마나 보이지 않는 키였다. 178 정도?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라희는 컵케이크 상자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
"이봐요. 이거, 가져가세요!"
"제가요? 왜요?"
남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쪽이 계산했잖아요."
"그쪽이 골랐잖아요. 전 컵케이크 싫어해요. 우울증에 걸린 악마도 싫어하고요. 먹기 싫으면-."
남자는 길모퉁이의 쓰레기통을 턱짓했다.
"저기에 버려요."
"네에?! "
"내가 대신 버려주기엔 시간이 이미 늦은지라."
남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악마가 폭발할 시간이거든요. 이만."
말을 마친 남자는 도로 가로 걸어가 손을 높이 올렸다.
"이봐요!"
라희가 남자를 부르며 다가가고 있는데, 남자는 바로 멈춰선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올라타면서 재빨리 외쳤다.
"Happy New year! 늦었지만, 새해 선물이에요! 나 정도면 근사한 미남이죠. 뭘."
"하? 이봐요!"
라희의 외침과 아랑곳없이 노란색 택시는 부웅 출발했다. 라희는 멀어져가는 택시를 잔뜩 노려보다가 손에 들린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종이백을 한번 바라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황당한 남자가 탄 택시가 멀리 사라지고 난 뒤, 라희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인가 보다. 모마에서는 뿔테 아버님을 만났고, 좀 전에는 이상하고 말 많은 남자를 만났다. 뿔테 아버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바짝 곤두선 신경이 이상한 곱슬머리 남자를 만나 완전히 지쳐버려서 머리가 어질할 정도였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무겁게 엄습했다. 어서 가서 소파에 길게 누워 쉬고만 싶었다. 라희는 호텔을 향해 걸었다.
SNL광고가 쇼윈도우에 요란하게 붙어 있는 NBC 스토어를 지나쳐 걸으니 뜬금없이 아이스 스케이트장이 나왔다. 고개를 들어 건물 위를 올려다보니 어딘지 익숙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거리에 걸려 있는 팸플릿 깃발이 눈에 띄었다. 이내 여기가 뉴욕의 명소인 록펠러 센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서 멈춰 서서 잠시 난간에 기대 멍하니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보니 참을 수 없이 당이 땡겼다.
라희는 종이백에 들어 있던 레드벨벳 컵케이크를 하나 꺼내 들었다. 하얗게 덮인 바닐라 아이싱 크림과 함께 촉촉한 붉은 머핀을 한입 베어먹으니 묵직한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많이 약했다. 혀뿌리가 얼얼하고 잇몸이 닳아 없어지는 듯한 충격적인 단맛을 기대했건만,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 진하게 달다 정도?
하얀 아이싱 크림은 아찔하게 달았지만, 붉은 머핀 쪽은 단맛이 덜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온종일 단것을 간절히 바라기도 했고, 입맛에도 꽤 잘 맞아서 그 자리에서 정신없이 한 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손가락 끝에 묻은 붉은 빵의 흔적과 흰 크림까지 쪽쪽 빨아 해치우고 나자, 혀끝 가득 기분 좋은 단맛이 맴돌면서 잔뜩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느긋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라희는 한층 가라앉은 잠잠한 기분으로 아이스링크를 내려다보았다. 평온한 눈으로 살펴보니 로맨틱 영화나 미드에서 많이 보았던 데이트 장소였다.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장식이 화려하게 빛나는 모양새가 밤에 와서 스케이트를 탄다면 제법 로맨틱한 기분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쭈뼛거리며 가장자리를 맴도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피식 웃음이 났다. 라희도 서울에 L 월드 아이스링크에 대학 친구들과 놀러 갔을 때 낯선 스케이트화 때문에 뒤뚱거리며 겨우겨우 가장자리 완충 대를 짚어가며 걷다시피 한 바퀴 돌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흐음."
한번 타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으나, 연인들로 북적이는 세기의 데이트 장소에서 홀로 어정쩡한 자세로 스케이트를 타는 일은 꼴사납게 보일성싶었다. 라희는 턱을 괴고서 연인들과 아이들로 붐비는 아이스링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스위트 룸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블랙 앤 화이트의 깔끔한 거실은 오늘따라 뭔가 달랐다. 하지만, 그게 뭔지 콕 찝어 낼 수 없는 찝찝한 기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희의 눈에 뭔가가 포착되었다. 라희는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익숙한 물체로 다가갔다. 검은색 휴대폰. 이건, 바흐 거다. 그가 항상 손에 쥐고 들여다보던 물건.
'바흐는 회사에 갔을 텐데, 왜? 설마? 퇴근하고 돌아온 걸까.'
늦은 오후이긴 했지만, 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각. 라희는 검은색 휴대폰을 손에 들고 침실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스륵 열린 비스듬한 틈 사이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모로 길게 누워있는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침대로 다가가니, 바흐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도 외출복인 그대로인 채로 세상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긴, 사람인 이상 그렇게 생활하고 지치거나 병나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하다. 라희는 잠든 바흐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그의 품을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으음..."
그는 조금 몸을 뒤척이다 이내 품 안에 들어온 라희를 감싸 안았다. 깊은 잠에 빠진 낮은 숨소리가 잔잔한 자장가처럼 귓가를 울렸다. 맞닿은 몸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라희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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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