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38화 (138/214)

138

호텔 정문을 벗어나면, 바로 드비어스(De Beers)매장이 있다. 호텔에서 나와 모마로 가기전 잠시 화려한 다이아몬드 장식품들이 전시된 진열장에 시선을 빼앗겨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라희는 문뜩, 허기를 느꼈다. 어젯밤 배불리 먹기는 했지만 그건 어제의 일이었고 오늘 침대에서 일어난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조금 배가 고팠는데, 일반적인 허기는 아니었다.

위장을 채워주는 든든한 밥이 아닌, 뭔가 달콤한 것. 아까 욕실에서 확인했다시피 오늘부터 생리가 시작되서 인지 자꾸 입에서 단것이 땡겼다. 영국에서 지낼 때는 생리 때마다 달달한 마카롱이 자꾸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마카롱같이 가벼운 단맛이 아닌, 좀 더 묵직하고 진한 단맛이 나는 뭔가를 먹고 싶었다. 라희는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모마 관람 시간이 3시간가량 걸린다고 하니 대충 관람을 마치고 달달한 뭔가를 먹으러 가면 될 것 같았다.

드비어스를 지나 건널목을 건너면, 명품 시계 편집매장과 스와로브스키의 쇼윈도가 주륵 늘어선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건너 갭매장의 코너를 돌면 바로 현대적인 유리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이 모마다. 어제 가보았던 메트와 달리, 외관상 위압적인 분위기라던가 고풍스러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여느 오피스 건물 같은 심플한 외관. 미술관 같아 보이지 않는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라희는 모마의 회전문을 통과해 미술관 안으로 향했다.

모마는 메트와 만찬가지로 관광명소라서인지 온갖 피부색의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붐볐다. 현관 로비에 대여섯 살 돼 보이는 금발과 흑발의 백인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어디선가 견학 온 모양으로 보이기도 했다. 라희는 기괴한 모양의 조형물이 전시된 1층 로비를 힐끗 둘러보다가 데스크로 다가가 입장료를 내고 신분증을 맡긴 후 무료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어제 메트에서 경험했다시피, 미술관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되도록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는 편이 훨씬 나았다. 비록,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제대로 관람했다는 만족감이 좋았기에 라희는 이번에도 미술관 자체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를 들으며 관람하기로 했다. 모마의 오디오 가이드는 무료고, 한국어도 지원되는 검은색 아이팟이었다.

모마의 지상 층높이는 6층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제대로 관람을 하려면 6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역순으로 관람을 권한다. 라희는 한국어 팸플릿의 설명대로, 6층으로 향하는 직통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6층 특별 전시실에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는데 무심코 발걸음을 내디뎠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어디선가 보았던 익숙한 그림이 도처에 걸려 있었다. 어찌보면 낙서 같기도 한 마티스의 작품을 둘러보다가 5층으로 내려왔다.

5층은 유명한 작품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는데 중고교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숱하게 접했던 작품들이 전부 보였다. 피카소의 작품은 물론이고, 루소, 세잔, 모네의 수련 연작이라는 굉장히 긴 작품 그리고 위층에서 보았던 마티스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미술관의 통로를 따라 관람하던 도중, 저 멀리 사람들이 굉장히 북적이는 곳이 있길래 걸어가 보았더니, 전시실 코너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걸려 있었다.

푸른색의 밤하늘, 황금빛 달과 별 그사이를 흐르는 역동적 밤의 풍경을 표현하는 열정이 듬뿍 담긴 붓 터치, 그리고 물감이 캔버스 위로 툭툭 튀어나와 생동적이다 못해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별이 빛나는 밤을 보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책 속 평면적인 사진으로 보던 것과 실제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까지 들으니 감동이 더해졌다.

어떻게, 똑같이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같은 인간임에도 이다지도 다른 시야와 능력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걸까.

미술 작품이 주는 일견의 충격.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작이라 손꼽히는 놀라운 작품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문득 조용히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

왼쪽 관자놀이 부근이 따끔거렸기에 라희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 한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장년층의 남자들이 서 있는 무리에서 누군가 라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풍채와 체격이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라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희가 불쾌한 기색을 풍기며 미간을 좁히며 그를 쏘아보자 이내,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라희는 어르신을 향해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누가 대체, 왜, 나를 집요하게 보는 거지?'

라희는 남성의 모습을 훑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큰 키, 살집이 있는 체격, 약간 온화한 분위기의 부티가 흐르는 중년 남성?

"라희양 아닌가요?"

중년 남자가 이내 아는 체를 하며 라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내 이름을 알아? 그것도 한국도 아닌 미국의 뉴욕 한복판에서?'

라희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입가를 부드럽게 올려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는 입매를 보자, 라희는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안, 안녕하세요."

뿔테 아버님. 그러니 굳은 얼굴로 공손히 허리 굽혀 절할 수밖에. 자기도 모르게 당황으로 더듬는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대단한 우연이로군요."

뜻밖의 장소에서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나서 정말 반가운 듯한 목소리. 뿔테 아버지는 라희를 보며 기꺼워했다. 어제 메트에서부터 한국인이 심심찮게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하필 이곳에서 뿔테 아버지를 맞닥뜨리다니! 온몸의 피가 확 쏠리는 느낌. 긴장으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잘 지냈나요? 뉴욕에 있었군요. 어쩐지 요즘 아들 녀석을 통해 소식이 통 들리지 않던데요."

전혀 예기치 못 한 장소에 불쑥 나타난 뿔테 아버지를 마주한 라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무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혹시 불쾌하게 보일까 싶어서 라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네...."

"라희양은 뉴욕에 무슨 일로 왔나요?"

뿔테 아버지가 머뭇거리며 서 있는 라희를 보며 밝게 물었다. 사심 없는 인자한 미소를 받자, 퍼뜩 정신이 들면서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뿔테에게 이끌려 들어간 한정식집에서 만난 가족 중, 뿔테 아버님은 유일하게 라희에게 호의적이었던 분이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관광?'

관광하러 왔다고 하는 것은 어딘지 어감이 이상했다.

"아, 그게……. 여행왔습니다."

"아, 여행이라. 참 좋지요. 요즘 대학생들은 배낭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들었어요. 젊어서 하는 여행은 견문도 넓어지고 다양한 경험도 쌓이기 때문에 나는 여행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요. 그런데…."

뿔테 아버지는 라희의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혼자 온 건가요? 아니면 친구와?"

"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희는 멍했다. 혼자 왔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친구와 왔다고 하기에는, 바흐는 친구가 아니지 않은가.

"……. 일행이랑요."

라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모호하게 답했다. 어색해서 절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뿔테 아버지는 그런 라희 앞에 서서 한참 동안 흐뭇한 미소를 띠고 라희를 보고 있다가, 뒤에서 일행이 가자고 부르는 소리에 손짓으로 알겠다는 시늉을 했다.

"아, 이거 참. 나도 친구들과 함께 오느라, 이렇게 예쁜 라희양도 만났는데 일정이 있어서 아쉽군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것참."

정말 아쉬운 듯한 음색이었다. 라희는 어르신 앞에서 미간을 좁히기 않기 위해 바닥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네에."

그때 뒤쪽에서 일행이 재차 뿔테 아버지를 부르자, 뿔테 아버님은 라희에게 눈짓하며 뒤돌아 갔다.

"그럼, 라희양. 미국 여행 잘하고 나중에 또 봅시다."

"........살펴가세요."

호칭은 생략했다. 뿔테와 그렇게 정리된 마당에 무턱대고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으니까. 저쪽에서 일행과 합류한 뿔테 아버님은 라희를 향해 손짓으로 인사하고서 미술관 복도를 따라 이동해 마침내 모습을 감췄다. 라희는 어르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색한 표정으로 돌처럼 굳어 있었다.

***

당이 땡겼다. 뿔테 아버님을 마주한 이후, 혹여 미술관에서 다시 만나게 될까 봐 라희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정신없는 발걸음으로 모마를 뛰쳐나오듯 걸어나와 정처 없이 맨해튼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뇌리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망령과 갑자기 마주한 기분이랄까. 혼란스러웠다.

한참을 걷다가 어딘지 모를 곳에서 우뚝 멈춰 서니, 무언가 다디단 것이 먹고 싶었다. 혀가 얼얼하고 머릿속이 아찔할 정도의 단맛. 그런 강렬한 단맛이 땡겼다. 입안 가득 단것을 숨도 못 쉬도록 마구마구 집어넣고 꿀꺽 삼켜버리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다.

라희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단 거, 진짜 단 거. 마카롱? 아니. 마카롱은 아니다. 그건 가볍고 파삭한 단맛이다. 묵직하고 진하고 농밀하면서 혀뿌리가 마비될 것 같은 달달구리가 먹고 싶었다. 맨해튼 디저트, 맨해튼 단 거를 검색했다. 뉴욕과 맨해튼 중복 검색을 하니 가장 많이 보이는 이름이 있었다.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바나나푸딩과 레드벨벳 컵케이크가 유명하다고 쓰여있었다.

"컵케이크?"

블로그 평들을 보니 컵케이크와 파는 디저트들이 죄다 한입 먹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정도로 설탕 덩어리라고 적혀 있었다. 미치도록 단 맛. 딱 원하던 바다. 검색으로 알아본 결과 뉴욕에는 지점이 여러 개 있었다. 라희는 휴대폰 GPS를 켜고 가장 가까운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를 검색했다.

붉은 별표 표시가 화면 위에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근처였다. 라희는 지도에 표시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 W 49th라는 녹색 표지판이 매달린 전봇대 옆 코너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Magnolia Bakery)라는 볼드체 글씨가 보였다. 맛집은 맛집인지, 테이크 아웃 지점임에도 제법 긴 줄이 건물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다. 라희는 길게 늘어선 줄의 끄트머리에 가서 섰다. 어찌 된 일인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줄을 보며 초조하게 고개를 빼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넸다. 한국말? 그리고 남자? 라희가 고개를 홱 돌리자, 바로 뒤에 선 젊은 남자가 빙긋 미소 지었다. 약간 곱슬머리 끼가 있는 남자는 서글서글한 눈매로 라희를 보고 있었다.

"어, 맞네요."

".....누구세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헌데 누군지 도통 모르겠다. 라희가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자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티파니. 맞죠?"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