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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이내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고 물기를 대충 말렸다. 가벼운 옷을 걸치고 식당으로 가니, 어느새 식탁 위에는 익숙한 룸서비스가 한가득 차려있었다. 샐러드, 스테이크, 파스타, 그리고 크림뷜레와 케이크까지. 바흐는 먼저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오렌지 주스를 기울였다. 라희가 식탁에 앉자, 그는 기기를 내려놓고 포크를 손에 쥐었다.
"잘 먹겠습니다."
"들지."
배는 고팠지만, 막상 음식들을 앞에 두자, 식욕이 별로 동하지 않았다. 온종일 쌀쌀한 바깥에서 돌아다녀서인지 뭔가 뜨끈한 것이 먹고 싶었다. 찌개나 탕. 딱히 외국에 나와 한국 음식을 찾은 적은 없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얼큰한 국물 요리가 먹고 싶었다. 뜨겁고 매운 국물에 밥 한 공기 뚝딱 말아서 후루룩 떠 먹고 싶은 그런 기분.
"......."
퍽퍽하고 씹어야 하는 서양 요리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식탁 위 음식을 그냥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싸하니 아파져 왔다. 라희는 포크를 내려놓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아랫배를 감싸고 도는 쌔한 느낌. 잠시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릿하게 배를 누르던 불쾌한 통증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라희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라희를 가만 살피고 있던 바흐가 나직하게 물었다.
"괜찮아?"
"아, 네. 그냥. 배가, 조금."
"음."
대답을 듣던 바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 아마도 좀전의 격렬한 행위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희는 그가 짐작하는 이유일 거라 동의하다가 그 외 다른 이유를 하나를 더 생각해 냈다.
생리.
지금쯤 시작할 기간이었다.
라희는 눈을 슬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난처한 표정.
'걱정하는 걸까?'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라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좀 더 그 상태로 내버려둘까 하다가, 오늘 충분히 피곤했을 테니 더는 괴롭히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게아니라, 여자들이 매달 하는 거 때문이에요. 이맘때거든요."
"아."
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좁혀졌던 미간과 어색하게 굳은 표정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여전히 라희가 음식에 흥미를 보이지 않자, 그가 포크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물었다.
"오늘 뭐 먹었지?"
오늘 먹은 음식? 생각해보니 티파니에서 먹은 아침, 아니 점심이 전부였다. 베이글하고, 커피.
"빵이요."
"빵? 어떤."
"베이글요."
"그리고?"
그의 물음에 라희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 바라보는 눈빛. 조금 있다가 눈이 슬그머니 마주치자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커피요."
그는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눈으로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라희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옷 입고 나가지."
***
"Go to 9 west 32nd."
(32번가로 가주십시오.)라희와 함께 호텔 정문을 나와 직원이 잡아주는 택시에 올라탄 그가 목적지를 말했다. 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각. 라희가 머물던 바스였다면, 도시 전체가 고요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뉴욕에서 가장 화려한 맨해튼의 밤거리는 온통 환했다.
택시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자 그는 라희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호텔을 나가서 밥 먹으러 갈 거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 시간에 밥이라니. 거기다 음식이라면 식당 테이블 위에 손도 대지 않은 채로 한가득 쌓여 있다시피 했는데.
"메뉴는요?"
라희는 택시 창밖에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는 말없이 밖을 눈짓했다. 이내 대답을 들어 볼 필요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은 익숙한 한글투성이였으니까.
이내 West 32nd St. Korea way 한국 타운이라는 푸른색 표지판이 보였다. 곳곳에 마치 한국 한복판에 와 있는듯한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한글로 쓰인 시티은행 신한은행, 우리 은행, 뚜레쥬르, 엽기떡볶이, 설렁탕, 국밥, 곰탕, 뼈 해장국 등등. 뉴욕 한복판에 작은 한국에 온 기분.
택시는 붉은 간판의 큰집이라고 쓰인 곳 앞에서 멈췄다. 늦은 밤에도 환히 불을 밝히고서 성황리에 영업 중인 식당이었다.
"이런데도 있네요.."
"코리아 타운이니까."
바흐와 함께 들어간 식당 내부는 평범했다. 국내에 있는 식당과 같은 구조와 모양. 식사 시간이 지난 시각임에도 매장 절반가량 들어찬 손님들은 저마다 모여앉아 바쁜 식사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점원이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라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펼쳐보니 음식 사진과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한국의 김밥 천국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온갖 종류의 음식을 팔고 있었다. 굴 보쌈에서부터 아귀찜, 잡채, 심지어 순대까지.
"골라봐. 김치찌개, 김치전, 떡볶이도 있으니까."
그가 던진 말에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단어들이 낯익지?'
조금 생각해보니, 윌버리 하우스를 떠나 런던으로 가던 날, 우연히 들른 솔즈베리 한식당에서 라희가 주문했던 점심 메뉴들이었다. 떡볶이를 빼면, 그가 싫어하는 매운 거 먹이려고 주문한 메뉴들이었는데 전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라희는 메뉴판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물었다.
"뭐 드실 거에요?"
"아무거나."
그는 손으로 눈가를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퇴근 이후 그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바흐가 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순두부찌개와 떡볶이 사진을 보니 저절로 군침이 흘렀다. 라희가 메뉴판을 보며 망설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먹고 싶은 것으로 선택해."
바흐가 손짓하자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갈비탕 하나하고,"
그가 먼저 메뉴를 말하고 라희에게 눈짓했다. 라희는 이어서 주문을 했다.
"떡볶이와 순두부찌개요."
이내 깍두기 콩나물, 무생채, 참나물, 김치 등의 평범한 한식 반찬과 물이 나오고 그다음 바로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식사류가 먼저 나왔다. 라희는 붉은 국물에 초록색 파가 송송 썰어져 있는 순두부찌개를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 약간 칼칼하면서도 짠맛. 딱 국내 식당에서 파는 순두부찌개의 그 맛이었다. 뉴욕에 와서 느끼한 양식만 먹던 입안에 착착 감기는 매콤한 한식이 들어가자, 식욕이 당기고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뜨뜻한 국물이 뱃속으로 내려가자 속이 화악 풀렸다.
"맛있어요!"
라희가 밝게 소리쳤다. 그는 옅은 미소 띤 얼굴로 순두부찌개를 연신 떠먹는 라희를 가만 지켜보다가 수저를 들어 갈비탕을 먹었다. 순두부찌개에 밥 한 공기를 말아 뚝뚝 떠먹는 라희와 달리, 그는 젓가락으로 갈비탕 건더기를 깔끔하게 건져 먹고 밥을 떠서 반찬과 함께 먹었다. 예의 단정한 자세로 밥을 먹는 그를 보니 감탄이 나왔지만, 이미 지저분해진 밥공기와 그릇들로 깔끔한 척 체면 차리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라희는 자신 앞 너저분한 테이블을 힐끗 보고 깨끗이 체념했다. 그리고 남은 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 도중 주문한 떡볶이가 나왔는데, 양푼 냄비 속 자작한 붉은 국물 떡볶이였다. 송송 썰린 파와 어묵과 함께 오동통한 흰 떡이 근사한 자태를 뽐냈다. 한 젓가락 쿡 찍어 떡을 씹어보니 쫄깃쫄깃한 쌀 떡이 맛있게 씹혔다. 떡볶이 국물은 육수를 썼는지 깊은 맛이 나는 아주 맵지도, 달지도, 짜지도 않은 맛으로 이상적인 국물 떡볶이 맛이었다. 슬쩍, 그에게 하나 권해줄까 해서 눈을 들었는데 그는 벌써부터 떡볶이를 보며 미간을 미미하게 좁히고 있었다.
"여기 맛집인가 봐요. 음식들이 전부 맛있어요."
라희가 밝게 말하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떡볶이를 보며 대답했다.
"유명하긴 하지. 스물 네 시간 영업하니 편하기도 하고."
외국의 한식당이 스물네 시간 영업하다니. 역시 뉴욕의 한인타운은 규모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에서 북적거리던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을 떠올려보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닌듯싶었다. 그가 잔뜩 우려하던 대로 라희가 떡볶이를 먹으라 권하는 기색을 비추지 않자, 바흐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라희는 속으로 쿡쿡 웃음을 삼켰다.
라희가 떡볶이의 떡을 다 건져 먹고 순두부 뚝배기 바닥을 싹싹 긁어 갈 때쯤, 후식으로 숭늉과 수정과가 나왔다. 배불리 먹은 후 달달한 수정과로 입가심까지 싹 하고 나니 노곤했던 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나갈까?"
진작 식사를 마치고 물을 기울여 마시던 그가 라희를 보며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계산을 마친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오자 쌀쌀한 밤 기온이 붉게 상기된 뺨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잘 먹었어요. 엄청 배불러요."
"소화시키고 푹 자려면 호텔까지는 걸어야겠군."
괜찮겠느냐는 표정,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호텔에 바로 들어가면 분명 부대낄 거 같았다. 그의 말대로 조금 걷다 보면 소화가 될지도. 택시 타고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걷는다 해도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저쪽이죠? 가요."
라희는 오늘 온종일 걸어 다녀 익숙한 5번가라고 쓰인 표지판을 가리키며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손을 꼭 쥐고서 번화한 맨해튼 밤거리를 걸었다.
막연한 이미지 속 뉴욕의 밤거리는 뭔가 무시무시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수나, 거리의 밝기는 서울의 번화가의 밤거리와 다르지 않았지만, 거리 곳곳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 들 때문인지 현대적인 서울보다는 좀 더 중후한 멋이 풍겼다.
익숙한 간판들이 잔뜩 걸린 낯선 외국의 밤거리. 뜨끈한 국물로 채운 배가 부르고 기분은 들떴다. 조용한 그와 나란히 밤거리를 걸으며 뉴욕을 구경하는 일은 즐거웠다.
"오늘, 고마웠어요."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호텔로 돌아와 잠잘 준비를 마친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 라희가 작게 속삭였다. 바흐는 그런 라희를 말없이 끌어안아 품에 가두고는 새근, 얕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 때까지 가볍게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침대 위 쏟아지는 햇살이 밝아 눈을 떠보니, 혼자였다. 날이 환히 밝았으니, 그는 벌써 출근하고 없는 모습이 당연했다. 라희는 떠지지 않는 눈을 찡그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10시. 어젯밤 배불리 먹고 신 나게 밤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와 정말로, 푹 자고 일어났다. 이른 아침 회사에 나간 그를 생각하니 슬쩍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임스도 누차 말했고, 라희도 눈으로 똑똑히 봐서 알고 있는 대로라면, 바흐는 일반적이지 않은 엄청난 자산가였다. 그렇게나 돈이 많은데도, 그는 정말 부지런히 돈을 벌고 있다. 그에게 회사는 어떤 의미일까. 아니, 잘 모르겠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회사, 부, 권력 이런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만약, 나라면.'
라희는 만약 바흐처럼 현금으로 몇천억의 자산이 수중에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보았다. 무엇부터 할까? 아마 돈 걱정이라고는 없으니 평생 놀고 먹을거다. 라희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돈 걱정이 없을거라는 그 가정부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바흐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현재 누워있는 화려한 스위트 룸 침실 안을 휙 둘러보았다. 이런식으로 하룻밤 숙박가격이 어마어마한 스위트에 계속 묵고, 이동할 때 전용기를 빌리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면서 잔뜩 호화스럽게 산다면, 백억이든 천억이든 금방 사라져 버리리라.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그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거겠지. 막연히 드는 생각은 그랬다. 현재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스러운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자?
"흐음."
모르겠다. 생각을 거듭하던 라희는 결론을 내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다. 바흐의 사고 수준은 가늠하기 힘들다. 하지만, 만약.
'나라면.'
라희는 고개를 들어 침대 위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새삼 바흐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해주는 간극. 이런 사치스러운 방, 승용차, 전용기등은 라희의 삶과는 무관했다.
'혹시 모르겠다. 바흐처럼 엄청난 돈이 수중에 덜컥 주어진다면, 돈 때문에 삶의 태도나 스타일이 바뀔지도.'
하지만 여태까지 스무해 남짓 살아오는 동안 라희가 필요로 했고 누려왔던 일들은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학교를 갔다와서 텔레비전을 보고, 재미있는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읽고, 사람들이 괜찮다 평가하는 영화나 음악을 찾아서 감상하고, 가끔 밖에 나가서 맛집에서 외식하고, 친구들과 만나 커피숍에서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은 딱히 큰 돈이 든다거나, 값비싼 대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편해."
라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제 티파니에서 일이나, 메트에서 택시를 타고 올 때를 떠올려보면, 적어도 돈이 있다는 것은 편하긴했으니까. 돈이 주는 여유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라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바흐 입장에서 보면 가지지 못한자의 안분지족(安分知足). 학습되고 체득된 단념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도 아닌 아침에,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이라니. 라희는 머리를 휘휘저어 영양가 없는 생각을 털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서, 어제 부터 예정해 두었던 오늘의 목적지를 떠올렸다.
모마 (MoMA: The Museum of Modern Art).
이왕 모두가 열광하는 뉴욕에 왔으니, 모범 관광객다운 충실한 자세로 주요 관광명소는 죄다 둘러봐야겠다는 사명감을 불태운 라희는 침대에서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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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