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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골치 아파질 뻔한 사고였다. 만약, 아이스 버킷이 아니라, 크리스털 제품인데 떨어져 깨지기라도 했으면…. 아무리 상대가 한국인이라 한들, 쉽게 넘어갈 수 없었을 거다.
'분명히 지저분한 실랑이가 벌어졌겠지.'
물론 배상책임 문제가 거론되었다면, 내키지는 않지만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그냥 매장으로 들어가 바흐가 준 신용카드를 긁어버리면 될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갑 안에 든 돈과 카드로 마음이 든든했다. 이렇게 조금씩 돈 맛에 길들여지는 걸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던 라희는 짧은 한숨과 함께 손에 든 더러워진 빈 커피 컵을 바라보다가 길가에 보이는 쓰레기통으로 다가가 구겨 넣었다.
-툭.
쓰레기통의 건조한 소리를 뒤로 한 라희는 티파니를 벗어나 바로 앞 블록의 Bergdorf Goodman 백화점을 지나쳐 보이는 애플 스토어를 바라보았다. 티브이 뉴스에서 애플의 신제품이 출시 발매일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진풍경을 펼치며 기다리던 하얀색 애플 로고가 투명한 유리 박스 안으로 보였다.
라희는 문득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황금색 아이폰을 꺼내보았다. 공교롭게도, 그동안 쭉 국산 휴대폰만 사용했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는 저 한입 베어 문 사과 로고의 아이폰이었다. 물론, 애플 스토어에서는 이런 터무니 없는 가격의 금칠한 제품을 팔지 않겠지만.
"......"
라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계속 센트럴 파크 쪽을 향해 걸었다. 조금 지나지 않아, 어릴 적 <나 홀로 집에> 영화에서 보았던 플라자 호텔이 눈에 띄었다.
'추억의 케빈. 저기서 홀로 지냈었지. 2탄이었나? 3탄이었나?'
오랜 기억으로 가물가물 했다. 아마도 2탄 아니었을까? 플라자 호텔에서 고개를 돌리니 바로 맞은편은 센트럴 파크였다. 횡단 보도를 건너서 센트럴 파크 초입에 들어서자 관광객들을 위한 관람용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언뜻 인터넷에서 보기로는 이번 뉴욕 시장이 마차를 금지한다고 했었는데, 아직 있는 것을 보니 반가웠다. 한번 타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왕 센트럴 파크에 왔으니 뉴요커 흉내를 내며 걷고 싶었다.
탁 트인 센트럴 파크는 여느 공원과 달랐다. 공원 지도가 그려져 있는 안내판을 살펴보니 호수도 몇 개나 되고 부지가 굉장히 넓었다. 과연 하루 동안 한 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을까 슬슬 의문이 생길 만큼 압도적인 크기였다.
'자전거를 빌릴까?'
공원 초입의 대여용 자전거를 힐끗 바라다본 라희는 쌀쌀한 날씨니 추운 바람 사이를 뚫고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야 그래도 슬슬 걷는 편이 나을 거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흐와 함께한 동안 걷기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으니, 그간의 굳었던 몸도 풀 겸, 미드에서 나오던 뉴요커 흉내도 낼 겸 운동 삼아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는 일이 오후 시간을 때우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되었다.
겨울이라 기온은 쌀쌀하긴 했지만, 날씨 자체는 맑았으니까. 이렇게 혼자서 도심 속 공원을 걷는 일은, 몇 달 전 런던에 처음 도착해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정처 없이 싸돌아다닐 때를 생각나게 했다. 물론,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심신이 지치도록 걸어서 쓰러져 잠들어야 하는 괴로운 일도 없었고, 더군다나 혼자가 아니니까.
천천히 주위 평화로운 풍광을 관찰하며 걷다 보니 몸이 슬슬 더워지고 숨이 찼다. 센트럴 파크 안의 산책길은, 평소 미드에서 본 막연한 이미지로는 온통 곧고 완만한 평지로만 이루어져 있을 거 같았는데 오르막길도 있고 바위 동산도 있었다. 이내 등 언저리에 조금씩 후끈한 열기가 차올라 날이 추운 줄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중심도로를 벗어난 쪽 길 아래 굴다리 같은 곳이 나오길래 호기심을 느껴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걸어가니 온실 같은 커다란 구조물이 눈에 보였다.
'공원이라 수목원에 부속된 온실이라도 있는 걸까?'
서울 어린이 대공원도 걷다 보면 수목원 온실이 나왔으니까. 라희는 수목원 입구를 찾으려고 계속 걸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온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규모가 거대했다. 아무리 길을 따라 헤매도 끝없을 거 같은 유리창만 보이지 정작 입구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다.'
라희는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손에 들었다. 지금 위치를 대충 검색해보니, 큰 온실인 줄로만 알았던 건물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 이었다. 속칭, 메트라고 축약해 부르는 이곳은 센트럴 파크 쪽은 건물의 뒤편이라서 온실처럼 보이는 것이었고 입구는 반대편인 5번가의 대로에 있었다.
인터넷 설명에 메트는 뉴욕에 왔으면 꼭 들러봐야 하는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본 라희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미술관 정문 쪽으로 옮겼다.
샛길로 센트럴 파크 공원을 빠져나와 5번가를 남쪽으로 거슬러 걸어가 마주한 메트의 입구는, 거대하고 웅장했다. 교과서에서 나옴 직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높고 둥근 석조기둥이 버티고 있는 정문은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그중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긴, 티파니에서 마주쳤던 남매도 한국인이었으니까. 뉴욕이 세계 최대 도시이다 보니 한국인이 심심찮게 있는 모양이었다.
라희는 사람들을 지나쳐 메트 정문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건물로 들어가 가방검사를 마치고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한국어 지도를 챙겨 들었다. 간단한 입장권을 사려고 안내데스크에 줄을 서니, 뜻밖에도 여기는 입장료가 없다고 한다.
"네?"
미술관이라면 입장료가 당연할 텐데 설마 무료냐고 놀라서 물어보니 입장료 대신 기부금(Donation)을 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라희는 10달러짜리 지폐를 기부금으로 내고, 한국어가 지원된다는 말을 듣고서 7달러를 주고 오디오 가이드를 렌트했다.
라희는 귀를 덮는 헤드셋으로 상세한 한국어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거닐었다. 물론, 모든 전시를 한국어로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요 작품은 모두 오디오 가이드 가능 표시가 붙어 있었고, 그 앞에 서면 자동으로 설명이 시작되었다. 단순한 설명뿐만 아니라 바다 그림이면 파도소리가, 숲 그림이면 숲 속 바람과 새소리가 입체적으로 전달되어서 새삼 빌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걷다 보니 넓은 유리로 된 공간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처음 밖에서 보고서 온실이라고 착각했던 곳은, 이집트관을 비롯한 창 측 전시실이었다. 각국에서 가져온 미술품과 전시물들이 온실 창 같은 투명창 아래 엄청나게 늘어서 있었다.
시대를 초월하는 조각, 회화, 전시물, 유물까지. 1층과 2층을 모두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렀고,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미술관 안을 걸어 다녔기에 다리도 피곤하고 집중해서 보느라 눈도 침침했다.
라희는 관람을 마치고 다시 정문으로 나와서 어두워진 밤거리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가로등이 켜진 뉴욕의 5번가는 역시나 보석처럼 화려했다. 휴대폰 시간을 보니, 5시가 넘은 시각. 이제는 정말로 지쳐서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진을 뺐는지 다시 호텔까지 걸어갈 일을 생각하니 도통 힘이 나지 않았다. 어떠랴.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라희는 인도 끝에 멈춰서서 지나는 노란색 택시를 향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택시 한 대가 부리나케 달려와 라희 앞에 스륵 섰다.
"St. Regis. please."
호텔 이름을 말하고서 뒷좌석 시트에 엉덩이를 푹 묻고 있으니 정말로 살 거 같아서, 새삼 돈이 좋구나 생각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돈이 주는 여유로움으로 인해 일단 몸과 마음이 편했다.
***
라희는 세인트 레지스 밀라노 스위트로 돌아와 컴컴한 방의 불을 환히 켰다. 각 디자이너 스위트는 특색이 있었는데, 밀라노 스위트의 메인 테마는 모던함과 심플로 느껴졌다. 탁트인 거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흰색 벽지와 사각의 모던한 소파 그리고 둥근 하이백 가죽 암체어가 놓여 있었다.
라희는 소파로 다가가 털썩 지친 몸을 기댔다.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창밖을 보니 거실 코너의 두 개의 큰 창문 너머로 뉴욕 5번가 고층빌딩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색의 빛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풍경. 전 세계 부가 모여든다는 맨해튼은 라희에게 반짝이는 보석 같아 보였다. 혹은 도심 한가운데의 놀이동산? 현실이 아닌 공간. 진탕 놀고 나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화려하지만 낯설고 허망한 곳.
오늘 티파니에서 뜻밖의 사건으로 가슴 졸인 일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뉴욕 관광이었다. 특히 메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긴 시간 관람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굉장히 눈과 귀와 머리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가만, 내일은....."
메트를 둘러보고 나니, 뉴욕 시내의 유명한 관광지는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기에 라희는 휴대전화기로 관광명소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뉴욕 현대 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일명 모마(MoMa). 오늘 관람한 메트와 달리, 근현대 미술작품이 소장된 곳이라 했다. 특히,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앤디 워홀, 모네, 프리다 칼로, 달리 등의 유명한 작가의 대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어 관람객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는 다고 적혀 있었다.
"좋아, 내일은 모마에 가봐야지."
지도를 보니 고작 걸어서 3분 거리였다. 세인트 레지스에서 남쪽으로 달랑 한 블록 떨어져 있는데, 북쪽인 티파니보다 훨씬 가까웠다. 바로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되었기에 오늘처럼 센트럴파크를 경유해 걷느라 지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일 뭐할까 계획을 짜고 있을 때 현관문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띵동.
이제 저녁 시간. 아마도 바흐. 오늘 첫 출근은 수월했을까. 라희는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다녀왔어."
바흐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짧게 말했다.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색. 회사 일이 밀려 있었다더니, 정말로 힘든 하루였나 보다. 관광하느라 지친 라희와는 질적으로 다른 피로가 얼굴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 라희가 편히 쓰고 다닌 돈도 아마 저런 피곤의 대가 일 거 같아서 라희는 그를 향해 일부러 밝게 웃어 보였다.
"다녀오셨어요."
그런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던 바흐는 발걸음을 멈추고서 갑자기 팔을 뻗어 여린 몸을 꽉 끌어 품에 안았다. 숨 막힐 정도로 단단히 등과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숙여 정수리 위로 턱을 묻으며 가만 서 있었다.
머리 위로 낮은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공기 중에 흩어져 몸 안에 스미는 것 같은 진한 숨결. 빳빳한 수트 아래 하루 동안 내내 분주히 움직였을 법한 몸에서 풍겨 나오는 짙은 체향.
평소의 엷은 듯 그윽한 향취가 아니라 조금 농밀한 체향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라희는 손을 내밀어 그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면서 가슴이 짓눌리듯 단단한 품에 푹 안기자, 이상하게도 좀 전까지 소파에 축 늘어져 있던 전신의 노곤한 기운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스르르 눈이 감기는 포근함.
"...저녁은요?"
라희가 작게 묻자, 그는 대답 대신 라희의 허리를 끌어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도톰하게 솟아오른 작은 엉덩이를 감싸 쥐고는, 한참있다가 낮게 속삭였다.
"나중에."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밀라노 스위트는 설정 사진에 올려 놓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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