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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린 라희는 휴대전화 화면에 보이는 블로그의 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외국 블로거의 글로, 블로그 포스트 제목은 How to Have Breakfast at Tiffany's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 법)이다.
글은 STEP ONE (첫 번째 단계)부터 STEP SEVEN(일곱 번째 단계)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첫 번째, 가까운 실버카트(Silver cart:음식 가판점)을 찾아서 종이 봉투에 담을 빵과 커피를 사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커피는 길거리 커피여야지 스타벅스는 절대 안 된단다.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나? 글을 읽던 라희도 동의했다.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들고 티파니의 상점을 바라보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두 번째, 택시를 잡아타라고 되어 있다. 극 중에서 오드리 헵번은 택시에서 내려 티파니 상점 앞으로 간단다. 택시라고? 걸어서 5분 내외인데, 이건 패스였다.
세 번째, 티파니 앞에서 선글라스를 살짝 아래로 기울이고 나서 진열장 창 너머를 바라보라고 포즈 설명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지금은 겨울이고 수중에 선글라스가 없다는 거다.
네 번째, 품 안에 든 종이봉투를 열어라. 다섯 번째, 맛있는 빵을 꺼내 한입 베어 물면서 티파니 쇼윈도를 바라보라고, 특히 크루아상(Croissant )이 먹기 좋다고 추천되어 있었다. 크루아상? 아침 식사로 적당하긴 했다.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촉촉하니까.
여섯 번째, 헵번의 드레스 코드를 준수하라고 쓰여 있었다. 길고 검은색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 그리고 검은색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업스타일 헤어스타일까지. 드레스는 소매가 없으면 더 좋단다.
라희는 옷장에 걸려 있는 옷을 떠올려보았다. 검은색 코트는 지난번 엘리자베스와 함께 구입한 것이 있긴 했지만, 검은색 드레스는 없었다. 당연히 진주 목걸이도 없고 선글라스도 없고. 흐음. 없으면 없는 대로 대충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라희는 일곱 번째에 적힌 문장을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STEP SEVEN: The city is yours.(이제 뉴욕은 당신 것).
의역하면 뉴욕을 즐겨라. 이 마지막 문장은 마치, 영화 타이타닉의 극 중에서 디카프리오가 갑판 끝에서 친구와 함께 외쳤던 그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 I am the king of the world! (내가 세상의 왕이다.)라희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옷장으로 다가갔다. 그럼, 검은색 옷으로 차려입고서 뉴욕을 즐기러 나가볼까?
***
"잘 다녀오십시오. 미스 송."
버틀러인 토마스의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세인트 레지스를 걸어나가는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핸드백에 든 백 달러짜리 지폐들과 플래티넘 카드 그리고 혼자라는 홀가분함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물론, 만 달러를 전부 들고 나오지는 않았다. 수중의 돈은 300달러. 그 중 100달러는 토마스에게 부탁해서 쓰기 쉬운 10달러짜리 소액권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호텔 안 금고에 넣어두었다.
호텔 회전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 그리고 어딘지 모를 낯선 도시 냄새. 호텔 정문 앞 건널목을 건너니 푸른색 폴로 플래그쉽 스토어가 황금빛을 번쩍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으로 쭈욱 펼쳐진 5번가는 백화점 명품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폴로 옆으로 차례로 브레게(Breguet 명품 시계), 오메가 (Omega), 아르마니(Armani)가 보였다. 그리고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손에는 쇼핑백이 몇 개씩 들려 있었다..
한 블록을 지나 횡단 보도 앞에 서자 전체가 고급스러운 황금빛 유리로 된 번쩍번쩍한 건물이 건너편에 있었다. 트럼프 타워(Trump Tower). 트럼프 타워의 코너에 위치한 구찌 매장도 함께 번쩍였다. 그리고 그 옆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하늘색 깃발이 펄럭이며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도 보였다. 티파니다.
목적지가 고작 한 블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어쩐지 김빠졌다. 좀 더 설레는 마음으로 뉴욕 거리를 걷고 싶었는데, 고작 3분 거리 남짓한 위치였다니. 라희는 티파니 앞에서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뉴욕 길거리에 흔하다는 푸드 스탠드(가판대)는 보이지 않았다. 5번가의 즐비한 명품샵 앞은 마치 거리 청소를 막 끝낸 듯 깨끗했다. 라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트럼프 타워 쪽에 눈매를 좁혔다.
트럼프 타워 안에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티파니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숍은 스타벅스였다.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빵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헵번 스타일을 구긴다니까 안될 것 같고. 다시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티파니 건너편 루이비통 너머 슬쩍 보이는 센트럴 파크 초입 부분에 가판대 비슷한 흔적이 보였다.
"A Cup of Coffee, and, bagel in a paper bag please."
(종이백에 커피하고 베이글을 담아 주세요.)가판대 앞에 선 라희는 큼지막하게 쌓인 프렛즐과 베이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둥근 빵을 가리키며 말했다. 갈색 노릇노릇한 빛을 띈 통통한 프렛즐은 크기가 너무 컸다. 한 손에 쥐고 가볍게 먹으려면 베이글이 적당해 보였다.
10달러를 받아든 가게 주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라희를 훑어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Hm. Young lady. You're in Black and up style but no sun glass!"
(젊은 아가씨. 검은 옷을 입고 머리까지 올렸는데 선글라스가 없다니!)가게 주인이 건네준 종이백과 거스름돈을 받아든 라희는 싱긋 웃었다.
"Well, It's winter."
(글쎄요. 겨울이잖아요.)
"Oh. have fun. Audrey."
(오, 즐겁게 지내요. 오드리.)
"Thanks. bye."
라희는 가판대를 향해 짧은 인사를 한 뒤 관광객들과 지나가는 행인들로 북적대는 맨해튼 5번가의 거리를 걸어 다시 티파니 앞으로 걸어왔다. 하늘색 넥타이를 맨 도어맨이 회전문을 지키고 있는 정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쇼윈도가 눈에 들어왔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라는 영화와 똑같은 그 모양, 그 모습 그대로.
라희는 쇼윈도 앞에 서서 천천히 진열장을 들여다보았다. 사각의 진열장 안에는 심플하지만 번쩍거리는 반지와 팔찌 그리고 목걸이로 이루어진 세트가 디스플레이되어 있었다. 여느 고급스러운 보석상과 다를 바 없는데, 극중 오드리 헵번이 아침마다 택시에서 내려서 굳이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던 이유는, 아마도 티파니가 내포하는 의미 때문일 거다.
저런 번쩍거리는 귀금속을 아무렇지 않게 소유할 수 있는 능력. 비일상적인 사치의 일상.
티파니에서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한낮이었지만, 라희는 커피와 베이글을 각각 손에 들고 먹으면서 천천히 그 순간을 즐겼다. 마지막 두툼한 플레인 베이글 한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고 커피로 넘기고 나니 배는 제법 불렀고, 커피는 절반가량 남아 있었다. 남은 커피는 센트럴 파크에 가서 먹을까 싶어서 쇼윈도에서 몸을 돌려 앞을 향해 걸으려던 찰나였다.
"어멋!"
쿵, 갑자기 앞을 막아선 뭔가와 툭 부딪혔다.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손에 딱딱한 것이 부딪치는 바람에 커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쏟아졌다.
라희의 시야 가득, 바닥에 떨어진 푸른색 쇼핑백과 그 주변으로 흐르는 진할 갈색 커피 물 그리고 그것을 보며 당황해 놀라 하는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괜찮아? 누나!"
이어서 티파니 회전문에서 들려오는 놀란 남자 목소리. 한국말? 라희가 눈을 들자, 회전문에서 빠져나와 여자에게 다가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여자와 남자는 모두 한국인으로 보였는데, 나이는 대략 여자는 30대, 남자는 라희 또래로 보였다.
"어휴, 그럴 줄 알았어. 앞 좀 보지."
바닥에 떨어져 흉하게 커피 얼룩진 쇼핑백을 집어드는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핀잔 어린 말을 던졌다.
"야, 누가 이럴 줄 알았어? 맨날 내 탓이래."
여자는 씩씩거리며 라희를 쏘아보았다. 시선을 받을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쪽은 고작 커피가 엎질러 진 거지만, 저쪽은 사각 티파니 케이스를 포장한 흰색 리본은 물론 그 상자를 담고 있는 쇼핑백도 온통 얼룩으로 엉망이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의 케이스가 보통 목걸이나 팔찌라고 생각할 수 없는 큰 부피인 것으로 보아 혹시, St. 레지스 티파니 스위트에서 보았던 티파니 크리스털 제품이나 컵, 잔 같은 것일지도. 그럼 내용물이 깨졌을지도 모르는데.
"어, 저기. 미안해요."
라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여자가 표정을 풀면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 한국인이세요?"
"아, 네...."
라희는 머뭇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진 커피컵을 주워들며 대답했다. 그러다 남자 손에 들린 얼룩진 쇼핑백을 보며 다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게 바닥에 떨어졌었는데 혹시..."
"아, 이거요?"
남자는 더러워진 블루 박스를 힐끗 보더니 밝게 말했다. 약간 곱슬머리,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귀염상의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시 들어가서 포장해달라고 하면 되니까요."
"안에 든 물건이.."
라희가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러게, 다행이지. 니가 권한 피쳐가 아니라 아이스 버켓이어서. 피쳐였으면 벌써 깨졌을거야. 누차 말했다시피, 혜영이도 나처럼 덤벙댄다니까. 역시 결혼 선물로는 오래가는게 최고야. 그딴거 선물하면 깨져."
"네네. 그러세요. 그래서."
남자는 누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라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괜찮을거 같네요. 이거, 아이스 버켓이라 깨질 염려는 없거든요. 아, 물론 크리스탈이 아니라 스터링 실버에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남자가 라희의 얼룩진 바지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숙여 커피가 종아리 부근 바지를 살폈다. 바지는 원체 검은색이라 티가 나지 않았지만, 신고 있던 구두에 커피가 튀어서 닦긴 닦아야 할 거 같았다.
"조금 닦기만 하면 될거 같아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계산했다고 앞뒤 안가리고 무소의 뿔처럼 뛰쳐나간 누나 탓도 크죠."
"내가, 뭐."
누나라는 여자가 툴툴거렸다. 그러다 라희에게 뭔가 할말이 있는지 시선을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
여자가 뭔가를 떠올리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을 이었다.
"혜영이가 딱 좋아하게 생긴 얼굴."
여자의 말을 들은 라희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리자, 여자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아니에요. 앞으로 커피 들고 다닐때는 조심하라는 말 하려고 했는데, 딱히 나도 잘한게 없는 거 같네요. 그럼."
"아, 네...."
라희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남자는 싱긋 미소 지으며 누나를 이끌고 티파니 정문 회전문으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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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