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33화 (13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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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운 창틀을 통과해 비쳐 들어온 찬란한 햇살이 넓은 킹사이즈 침대 시트 위로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늦은 아침. 라희는 고개를 돌려 침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랭클린 초상화가 그려진 빳빳한 100달러 지폐 100장과 진욱 한이 쓰인 플래티넘 신용 카드. 뉴욕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바흐가 건넨 거다.

티파니 스위트에서 이틀을 묵고 난 이후 일주일 동안 바흐와 라희는 세인트 레지스의 디자이너 스위트를 차례로 순방하듯 묵었다. 1203 디올(Dior) 스위트, 1503 벤틀리(Bentley)스위트 마지막으로 밀라노 스위트까지.

"뭐에요?"

밀라노 스위트에서 새벽 내내 그에게 시달린 라희가 잠이 덜깬 얼굴로 묻자, 멀끔하게 차려입은 바흐는 새것 같은 100달러 뭉치와 신용카드를 침대 바로 옆 모던한 디자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출근해야 해."

출근.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주일간, 그와 함께 지내면서 지켜본 결과 뉴욕에서 바흐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동안 라희와 영국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은 그에게는 정말로 한가로운 휴식과 여유의 시간이었구나 느껴질 만큼.

뉴욕에 도착한 첫날 고모 집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다음 날부터 그는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 뿐이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라희가 관찰한 바흐의 일과는 대강 이런 식이었다. 라희가 쿨쿨 자고 있는 6시에 일어나 씻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벨보이가 아침마다 문고리에 걸어둔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을 읽으면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웹으로 BBC’s Wake Up to Money 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했는데 메일 도착 알림과 메세지 알림이었다. 이메일과 메세지를 확인하고서 전화를 걸어 무언가 복잡한 단어를 써서 통화했다.

9시 30분이 되면 미국 주식시장이 오픈한다. 그러면 정말 책상에 정자세로 미동도 없이 앉아서 모니터를 주시하다가 아침 11시, 라희가 잠에서 깨서 씻고 앉아 있으면 식당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간간이 전화통화를 했다.

4시가 되면 장이 폐장하는지 모니터를 덮고 다시 긴 전화 통화를 했다. 5시가 되면 모든 일을 마치고 거실 소파로 돌아왔다.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었다. 그렇게 있다가 관계를 갖기도 했다. 관계 후 저녁을 먹고, 그는 집에 가봐야 한다며 외출했다. 그리고 늦은 밤에 돌아와 관계를 갖거나 잠자고 일어나서 새벽에 관계하고 다시 하루의 반복.

그동안 라희는 느지막이 일어나 룸서비스로 식당에서 느긋하게 밥을 먹고, 티비를 보거나, 휴대전화기로 웹에서 놀다가 버틀러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 가끔씩 책상에 앉아 집중하는 그에게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서 갖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멀리는 아니고, 그가 일하는 시간 동안 호텔 1층이나 근처에 내려가 구경하다 돌아오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간 뉴욕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라고는, 세인트 레지스 뉴욕호텔 1층에 드비어스(주얼리) 샵이 있다는 것과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아덴 빌딩이 근처에 있다는 것 정도다.

두 블록 건너, 그러니까 걸어서 5분만 가면 그 유명한 티파니 본점이 있다는 것을 알긴 했으나 거기까지 가보지는 못했다. 낮에는 바흐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나갈 시간이 안 되는 데다가 그가 고모 집에 가느라 외출하는 밤에는 바깥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필시 총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뉴욕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 때문일 거다.

그러던 일주일째 아침, 그가 출근한다고 말하니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호텔에서 전화와 노트북으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락하며 내내 일하듯 생활했으니까, 차라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편이 그에게는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뉴욕인데?

"헨리 벨델에서 써. 현금 부족하면 카드로도 뽑아 쓰고. 비밀번호는 생일 6자리로 설정해 두었으니까."

헨리 벤델? 무슨 소린지 몰라 갸우뚱하다가 지난번 티파니 스위트에서 창밖으로 건너다본 고풍스러운 건물의 이름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슨 명품 브랜드나, 가방이나 구두를 파는 곳 이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 체인이 있는 악세서리 등을 파는 부티크 백화점이었다. 뉴욕 5번가의 건물이 본점으로 미드 가쉽걸에도 나와 젊은 층에서는 유명한 곳.

라희가 테이블 위의 지폐 뭉치와 신용카드를 보며 잠기운으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그는 침대로 다가와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일이 밀려 있어서, 오늘부터는 회사에 나가봐야 해. 푹 자고."

라희는 침대맡의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아침 6시 30분. 이렇게 아침 일찍 나가본다고? 라희는 시트를 잡고 있던 손을 뻗어 바흐의 팔을 붙잡았다. 빳빳한 셔츠 소매의 금속 커프스 링크가 손바닥 잡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돌연한 행동에 그가 조금 의외라는 듯, 내려다보았다. 라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회사는 서울에 있지 않아요?"

"음."

그는 생각할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지난 하반기에 뉴욕에도 회사를 만들었지."

"아."

그를 잡은 라희의 손이 스륵 풀렸다. 지난해 하반기라면, 여름 이후. 그럼 지난번 두바이에서 뉴욕으로 건너가 회사를 차렸나 보다.

"여기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야. 파크 애비뉴에 있어."

다시 짧게 이마에 키스한 그가 조용히 말했다.

"특별한 일없으면 저녁쯤 돌아올게. 그동안하고 싶었던 거 하고."

뒤돌아 침실을 나서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라희는 눈을 껌뻑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그를 따랐다. 현관 앞에서 출근하는 그에게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말을 건넸다.

"다녀오세요."

그가 저녁 시간 고모 집으로 외출 할 때마다 연습처럼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갔다 올게."

그가 말하고 스위트 현관문이 닫혔다. 다시 침실로 터벅터벅 걸어와 푹신한 마시멜로 촉감의 매트리스에 몸을 묻고서 시트를 목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하고 일어난 늦은 아침.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스위트 룸은, 라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뉴욕에서 처음으로 보내는 혼자만의 하루의 시작.

-촤르르

라희는 빳빳한 지폐를 손에 쥐고 은행원들이 흔히 하듯 부채처럼 펼쳐서 주르르 넘겨보았다. 통통한 프랭클린 아저씨가 그려진 100달러짜리가 100장이니, 만 달러.

'한국 돈 천만 원 가량?'

라희는 눈을 들어 테이블 위 은색 신용카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거기다 신용카드까지. 바흐가 현금이 부족하면 빼서 쓰라고 친절히 알려주었지만, 지금 드는 예상으로는 앞으로 현금이 부족할 일은 결코 없어 보였다. 자그마치 천만 원이니까.

-촤륵

라희는 다시 한 번 지폐 뭉치를 손가락으로 빠르게 훑어 넘겨 보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놀이동산에 자유이용권을 가지고 입장한 기분이랄까. 처음으로 손에 쥐어본 푸르스름한 100달러짜리 지폐는 외국돈이라서 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기에 더욱 그런 기분인지도 모르겠다.

뉴욕에서 무얼 해야 할까. 유진에게서 따귀 맞고 바흐를 따라온 뉴욕이니 솔직히 말하면, 머릿속에 현재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으...."

라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가 저녁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거의 온종일 혼자 보내야 한다. 어차피 입장한 놀이동산이니 그냥 머릿속을 비우고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일단.

'호텔은 지겨워.'

라희는 호화스러운 스위트 룸을 싸늘한 눈으로 둘러보며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는 좋았다. 세세한 실내장식과 호사스러운 가구들, 24시간 상주해 편의를 봐주는 버틀러. 아침에 버틀러에게 맡겨 놓으면 저녁 무렵이나 그 다음 날 마치 상점에서 막 사온 것처럼 착착 각 잡혀 흰 포장지에 싸여 돌아오는 세탁물. 24시간 어느 때고 가능한 룸서비스. 1층에 위치한 미슐랭 3 스타의 알랑 뒤카스(Alain Ducasse)의 아두르(adour) 레스토랑에서의 화려한 식사도 다 좋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 일주일가량 지나다 보니 모두 익숙하고 지겨웠다. 육신의 안락함은 이제 당연했고 룸서비스나 레스토랑에서 먹은 프렌치, 이탈리안 음식들은 알록달록 예쁜 모양새를 자랑했지만, 맛은 달거나, 기름지거나, 부드럽거나, 크리미할 뿐이었다.

'아침은 색다르게 나가서 먹어야지.'

라희는 욕실로 걸어가 번쩍번쩍 금칠한 황금빛 수도꼭지를 돌렸다. 쏴아, 미세한 거품으로 부드럽게 쏟아져 나오는 하얀 물줄기가 세면대에 찰랑거리며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침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오는 저녁 시간까지 호텔 밖에서 지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간 인터넷으로 본 것이 고작인 뉴욕의 길거리 음식은 실제 어떨까.'

문득,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 도착한 다음 날, 그가 일하는 동안 티파니 스위트에 비치된 DVD 타이틀로 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의 오드리 헵번처럼, 비록 촥 달라붙고 깊게 파인 검은색 지방시 블랙 드레스는 아니지만, 나름 블랙톤의 옷을 차려입고서 근처 길거리 델리에서 산 빵과 커피를 들고서 티파니 상점 앞에서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거다. 뉴욕 5번가의 티파니 본점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심심치 않게 그런 행동을 한다고도 들었으니까.

'좋아. 아침은 티파니에서.'

무얼 할지 계획이 서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주머니에 돈도 두둑하고, 혼자서 즐길 시간도 넉넉하니 걱정 없었다. 오랜만에 산뜻한 기분.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거품 바스를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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