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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터보로 공항 밖에는 윙윙대며 낮은 소음을 내고 있는 소형 헬리콥터가 대기 중이었다. 헬리콥터는 검정 바탕에 노란 물결무늬가 들어간 모양으로 두바이에서 탔던 것 만큼 큰 크기는 아니었다. 작은 5인 정원의 헬리콥터에 탑승을 완료하자 이내 하늘 위로 붕 떠올랐다. 바흐는 라희를 보며 눈짓으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라희는 맞은편 앉은 그를 향해 아무렇지 않다는 표시로 싱긋 웃어 보였다.
헬기에 타기 전 조종사로부터 테터보로 공항에서 뉴욕 맨해튼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과연 일이분 날아가니 검은 밤하늘을 뚫고 저 멀리 너울지는 화려한 빛의 파도가 들어왔다. 헬리콥터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빛이 물결지는 모양이 아닌, 검은 강물에 위에 둥둥 떠 있는 밝은 빛의 섬들이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뉴욕은, 뭐랄까,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섬이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 환히 비추는 뭔가가 보였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검의 허드슨강 작은 섬에 설치된 자유의 여신상이 환히 나타났다. 뉴욕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밝게 쏘아지는 조명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접할 때는 크기가 엄청나게 거대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먼저 놀랐고, 뉴욕 도심이 아닌 강 위 작은섬 한가운데 뚝 떨어져 있는 모습에 더 놀랐다. 뉴욕에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어서, 저렇게 강물 한가운데 둥둥 떠 있을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점차 육지로 가까이 가니 높게 치솟아오른 마천루의 빌딩 숲이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즐비한 고층 빌딩을 보며 처음 드는 생각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런던이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이었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화려한 빌딩의 뽀족한 첨탑들은 마치 SF미래 도시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고층 빌딩은 뉴욕을 밝히는 등대처럼 우뚝 밀집해 있었고, 마치 내부로부터 뿜어져 나와 찬란히 번쩍이는 조명의 향연은 잘게 빛나 눈이 부셨다.
"......?"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세 좋게 날아간 헬리콥터는 호텔이 위치한 도심 한가운데의 빌딩 숲이 아닌, 검은 강물의 항구 같은 지점으로 날아갔다. 두바이의 버즈 알 아랍을 생각해 볼 때, 바흐가 묵으려는 호텔에 헬리패드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게다가, 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헬리콥터가 근사한 고층 빌딩 옥상에 부드럽게 착륙하는 장면이 자주 보였는데.
"....러야."
라희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물론 헬기 소리에 묻혀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네?"
라희가 크게 묻는 사이, 헬리콥터는 스르륵 육지로 하강해 착륙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부 헬리포트(Heliport: 헬리콥터 발착장)라고 쓰인 녹색 표지판이 보였다.
"911테러 때문에 맨해튼에서는 헬리포트에서만 이착륙이 가능해."
헬기에서 내린 그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라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콥터도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테러 위협 가능성이 있으니 그러한 조치는 타당하게 들렸다. 헬리포트 건물 앞쪽으로 걸어가니 크고 고급스러운 브라운 색상의 차가 서 있었다. 라희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호텔까지 저 차를 타고 가야 하리라.
가까이 걸어가자 당연하게도 높은 모자를 쓰고 초록색 연미복 같은 수트를 입은 운전기사가 나와 정중히 인사하고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단순한 사설 운전기사가 아닌 호텔 직원 같은 분위기였다. 트렁크에 짐을 마저 옮겨싣고 나자, 자동차는 조용히 출발해 호텔로 향했다. 푹신한 베이지색 톤의 가죽 시트 내부의 차량 안은 부드러운 브라운 계열의 마감재로 인테리어가 마감되어 있었다.
지난번 버즈 알 아랍과 런던에서 사용했던 자동차는 롤스로이스였는데, 지금 타고 있는 차는 처음 접해보는 디자인이라서 라희는 흥미를 느끼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B라고 쓰인 둥근 심볼 양옆으로 뻗어나온 날개 문양이 보였다. B? B는 벤츠나 BMW일까? 하지만, 그 자동차의 심볼은 익숙한데. 약간 통통한 알파벳 B에 날개 모양 심볼로고는 낯설었다.
"벤틀리."
라희가 운전석 핸들의 로고를 힐끔 보고 있으려니 그가 말했다. 벤틀리? 처음 들어보는 외제차 브랜드였다. 하긴, 유명하다던 롤스로이스도 바흐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단 호기심이 해결되자 흥미가 사그라졌다. 라희는 창밖의 화려한 도시로 고개를 돌렸다. 뉴욕의 밤거리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야경으로 눈부셨다. 스파클링 샴페인처럼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뉴욕의 도심을 10여 분쯤 주행하던 차는 이내 현대적인 건물이 아닌, 마치 런던에 와 있는 것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한 거리의 한 지점에 다다르더니 스르륵 멈췄다.
마치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속 세트장과 같이 현실감 없어 보이는 커다란 건물의 직사각형 차양 지붕 위로는 성조기를 포함한 깃발 3개가 펄럭였고 그 아래는 짧고 검은 휘장 가운데 세인트 레지스(St. Regis) 호텔 이름이 황금빛으로 박혀 있었다. 그리고 현관 양옆 호텔의 출입문은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 위로 온통 금칠한 유리 회전문이 번쩍였다. 이제 제법 익숙해 질법도 했건만, 금빛 조명으로 고고히 빛나는 호사스럽고 위압스러운 호텔의 위용 앞에서 라희는 주눅이 들었다.
"반갑습니다. 데이빗. 오랜만이신 거 같은데요? 근 한 달 만에 뵙는군요."
그와 함께 호텔 내부로 들어가자 데스크의 매니저가 밝게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페드로."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바흐는 이곳의 단골인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 고모집 뿐만 아니라 호텔에서도 묵었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페드로? 데이빗? 스스럼없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영국과 조금 다른 문화적 충격이었다. 영국은 아무리 자주 보는 사이더라도 친구가 아닌 이상 꼬박꼬박 성으로 불렀는데 뉴욕은 직원과 손님인데도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부르다니.
"늘 묵으시던 스위트로 준비해 드릴까요?"
"글쎄요....."
바흐는 데스크 매니저에게 확답하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신 옆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라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희는 움직임을 멈추고서 바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
그의 말에 라희는 눈을 깜빡였다. 지난번? 무슨 뜬금없는 지난번? 그는 말을 이었다.
"목걸이를 하고 다니지 않던데, 원숙한 브랜드라서?"
라희는 어색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두바이로 떠나기 전 L 백화점 A 관에서 그가 사준 카르티에 목걸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거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런 고가의 목걸이는 정장이나 깔끔한 원피스에나 어울리는데 라희가 상시 입는 옷은 얇은 티셔츠에 청바지가 고작이었다. 평소 복장에도 어울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수준에 맞지 않는 고가품이었기에 선뜻 착용할 수 없었다. 몸을 판 대가라고 훈장마냥 자랑스럽게 목줄처럼 걸고 다닐 것도 아니고. 당연히 하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오기 전 택배 박스 안에 봉인해 미련없이 충주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원숙? 무슨 뜻이지? 라희가 곰곰이 생각을 떠올려보니 그때 그가 마주 위치한 불가리와 카르티에 매장을 번갈아 보면서 너무 노티나느냐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까르띠에 브랜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문제가 아닌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라희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바흐는 입매를 살짝 올려 피식 웃었다.
"역시. 티파니?"
그가 내린 결론은 뜬금없었지만, 어찌 반론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그가 티파니를 맨 처음 말하긴 했었다. 건물이 달라서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지. 그런데 대체 왜 지금 이 순간, 뉴욕의 호텔 데스크에서 이런 느닷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바흐는 의아한 표정의 라희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더니 호텔 데스크 직원을 향해 말했다.
"동행이 있으니 평소와 다른 곳에 묵고 싶군요."
"아. 네 알겠습니다."
빠릿빠릿해 보이는 페드로는 눈빛을 반짝이며 아첨하듯 덧붙였다.
"햅번만큼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페드로는 데스크 담당 매니저다운 영업상의 과장된 밝은 미소를 띠고서 시선을 낮춰 데스크 모니터를 체크했다.
라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햅번? 무슨 말이지? 햅번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보면 딱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오드리 햅번.
그런데 왠 햅번이지? 햅번과 티파니? 티파니는 보석 브랜드인데 여기는 호텔이다. 라희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 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도통 암호문 같아서 쉬이 이해할 수 없다.
"얼마나 묵으실 예정입니까. 데이빗. 체크해보니 이틀간은 가능하지만, 그 이후로는 예약이 잡혀 있어서요. 아시다시피 워낙 인기가 높지 않습니까."
"그럼, 먼저 이틀간은 제가 사용하지요. 나중은 그 이후에 결정하겠습니다."
직원은 활짝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번 기회에 저희 호텔의 유명한 디자이너 스위트(Designer Suites)를 두루 묵어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2주 정도 일정에 맞춰 예약을 잡아주십시오."
라희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디자이너 스위트? 뉴욕이라는 도시도 처음인데다가 세인트 레지스라는 호텔도 처음이어서 도통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릭."
모니터에서 고개를 든 페드로가 근처에 서 있던 호텔 직원을 불렀다.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호명을 받고 다가왔다.
"미스터 한과 햅번양을 안내해 드리게."
"어디로 모시면 됩니까?"
릭의 물음에 페드로는 활짝 미소 띤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며 답했다.
"티파니 스위트(Tiffany suite)로."
티파니 스위트? 그게 뭐지?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라희를 향해 페드로가 손을 흔들어 바이바이 인사를 건넸다.
"Enjoy your stay, Audrey!"
(즐겁게 지내요, 오드리!)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걸이 사러간건 28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