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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29화 (12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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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에 닿는 뭔가 미지근한 느낌. 물? 라희는 감았던 눈을 찡그리며 떴다. 순간 보이는 낯선 환경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가 침대 가에 앉아 있는 바흐를 발견하고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를 보자 장소 파악이 되었다. 전용기 안 침실이었지.

"?"

방금 그 감촉은 뭐지? 시선을 내려 왼쪽 손을 보니, 둥근 보울에 미지근한 물이 차 있고 그 안에 손가락 끝이 반쯤 잠겨 있었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바흐는 라희가 누워있던 베개 옆에 개어진 가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길래. 표정 보니 정신을 차린 거 같군. 밖으로 나갈 시간이야. 씻어."

그가 잠을 깨우는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손끝에 닿은 미지근한 물의 감촉에 몸의 모든 신경이 깜짝 놀라 깨어났으니까. 라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숙취가 가시지 않았는지 머리가 조금 무거웠고, 아래는 묵직하게 욱신거렸다.

화장실 한켠의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가 미지근한 물에 몸을 내맡겼다. 머리 위로, 얼굴 위로 약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를 맞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선반에 서너 개 놓인 몰튼 브라운(molton brown) 바스 뚜껑 하나가 살짝 비틀려져 거품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바흐가 사용한 흔적.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라희는 손을 뻗어 그가 사용한 바스를 집어 기울여 거품을 냈다.

비행기에서 샤워라니. 물론, 지난번 두바이를 가기 위해 탑승했던 A380 퍼스트 클래스 안에는 샤워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손님들의 샤워시간을 고려한 사전 예약제였고 굳이 사람들 함께 있는 공간에서 샤워하고 나오기는 싫었기에 이용하지 않았다. 그역시도 마찬가지.

오늘은 마일 하이 클럽(Mile High Club)에 가입해서 그도 어쩔 수 없을까. 이런 호사스러운 남자라니. 라희는 몸 안 구석구석 거품을 문지르며 순간, 무언가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마 밖에 소리가 다 들렸을 텐데. 이제 어떻게 리사와 세라를 보지.'

7시간여의 비행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베드룸에서 보내고 중간에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이미 무엇을 했는지는 짐작했을 거다.

"하아.."

마득치 않아 무거워진 마음 때문인지 라희는 샤워 후 아주 긴 시간 동안 머리를 말렸다. 머리카락에 물기 한 방울 남지 않게 바싹 건조한 뒤에야 침실로 돌아와 옷을 챙겨입었다. 침실 문을 느리게 열고 객실 밖으로 나가자, 다행히 바흐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유시간이면 늘 그렇듯,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슬쩍 비치는 액정화면에는 역시나 영어가 한가득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달러표시와 함께 그래프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보고서나 리포트 같았다.

아마도 일이겠지. 라희가 그의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오자 바흐는 손을 내밀어 어깨를 감싸고서 다시 액정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상당히 집중해서 읽고 있는 모습이었길래 라희는 굳이 말을 꺼내 방해하지 않았다.

같이 지내는 동안 옆에서 그를 지켜보니 비록,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출근하지는 않지만 하루 중 거의 모든 여유시간을 빼곡한 보고서를 읽고 정보를 수집하고 머릿속으로 투자전략을 짜느라 골몰하는 것 같았다. 들은 바 대로, 회사 대부분 자산이 본인 것이기는 하지만, 명목상 헤지 펀드(hedge fund)를 운영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바쁜 거다.

비행기 내부 비치된 모니터에 나타난 현지시각은 밤 10시. 라희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둥그런 창 너머 검은 하늘을 응시했다. 시차 때문인지 꽤 오랜 시간을 비행했음에도, 실상 뉴욕에 도착하니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듯 보인다. 실내에는 침묵이 흐르고, 라희는 그에게 숙취로 무거운 머리를 기대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침내 저 멀리 창밖으로 나타난 해안가에 검게 늘어선 좁은 육지가 보였다. 그 뒤로는 촘촘하게 조명을 밝힌 낮은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가 나타났다. 라희는 창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뉴욕은 고층 빌딩 숲일 줄 알았는데..'

밤이라서 도시 특유의 환한 조명을 빛내고 있긴 하지만,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색색의 빛 무리는 그동안 TV나 드라마에서 보아온 뉴욕의 전형적인 이미지 같은 고층 빌딩 숲이 아니었다.

'공항이 외곽이라서 그런가?'

국제공항은 대부분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그럴지도. 비행기가 어두운 밤하늘을 조금 더 날아가자, 저 멀리 잠시 화려한 도시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넓은 강이 보이고서 바로 그 근처 쭉 뻗은 검은 대지 위 광대한 공항 활주로가 갑자기 나타났다. 활주로 위 규칙적으로 박힌 안내 조명을 따라 비행기는 미끄러지듯 활주로 위로 기울어졌다.

-쿠쿵..

순간, 덜컹거리며 동체가 바닥과 부딪치는 마찰과 함께 실제 육지에 바퀴를 굴리는 비행기의 거친 승차감이 생생히 느껴졌다. 빠르게 내달리다가 이내, 속도가 느려졌다. 기체는 불빛 깜빡이는 활주로를 따라 둥글게 선회했다. 조금 있으려니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그러자, 앞쪽 문이 열리고 승무원 둘이서 나란히 나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테터보로 공항(Teterboro Airport: 뉴저지 전용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내내 가슴 졸이며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영업용 미소 외에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 라희는 내심 안심했다.

"바깥에 저희 회사 담당 직원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입국 시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그 길로 둘은 비행기를 승하 계단을 내려 대기 중인 직원의 안내로 걸어서 지척인 아담한 공항 건물로 향했다. 날씨는 영국보다 조금 더 쌀쌀했다. 라희는 코트를 앞을 여몄다. 공항 건물 앞에는 역시나 미국임이 실감 나는 커다란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딱딱한 보도 위를 걸어가면서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터보로 공항은, 황량하고 넓었는데 여타 공항 같은 큰 비행기가 아니라 조금 전 라희가 타고내린 전용기 크기의 비행기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

"이쪽입니다."

깔끔한 비지니스 수트를 입은 직원이 활짝 미소 지으며 입국장이라고 쓰인 유리문을 가리켰다. 문을 통과하니 입국심사장(U. S Customs and Border Protection)이었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제복 입은 나이 든 직원에게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미리 작성해 두었던 입국 신고서와 세관신고서 그리고 여권을 제시했다.

"Welcome to America. ESTA?"

직원이 갈색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ESTA는 미국 전자여행허가증( ESTA: 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으로 사전에 인터넷으로 발급받아야 한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뉴욕으로 떠나오기 전 런던에 샹그릴라에서 미리 신청을 완료하고, 14달러의 수수료는 바흐의 신용카드로 결제했었다. 대답을 들은 공항직원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눈을 들어 형식적인 입국 질문을 시작했다. 그간 영국에 있다가 미국에는 왜 왔는지, 얼마나 있을 것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물었다.

라희는 차례로 관광, 그리고 무비자 관광비자 최대 허용기간인 3개월, 대학생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직원은 뒤에 서 있던 바흐를 향해 힐끗 눈길을 주더니 눈이 마주쳤는지 싱긋 웃었다. 그사이 라희는 앞에 놓인 스캐너에 손가락을 올려 지문 재취를 하고서, 정면 얼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Have Fun. Enjoy your stay in the United States."

(즐거운 시간 보내요.)

마침내 스탬프를 쿵 찍은 여권을 돌려받자 입국 심사가 완료되었다. 미국 입국 절차는 까다롭다 들었는데 생각보다 매우 간단해서 의외였다. 인터넷으로 읽어본 입국심사 후기에 의하면 10분 정도 서서 질문공세를 받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라희가 텅 비다시피한 공항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그 역시 간단한 입국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가 뉴욕인가요?"

뉴욕의 공항은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로 매우 붐빌 줄 알았는데, 이런 유령 나올 것 같은 적막감이라니. 라희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뉴저지야. 뉴욕은 여기서 12마일 떨어져 있어서 차로 이동하면 1시간 걸리지."

어떤 예감이 있었다. 라희는 차로 이동하면 1시간 걸린다고 말해주는 바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굳이, 차로라고 말하는 걸 보니 분명 다른 것을 타는 거겠지. 바흐는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라희의 정수리를 흐트러트렸다.

"좋아하지는 않던데, 차를 타고 갈래?"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거 같았다. 그가 묻는 모양새는 역시나 헬리콥터? 지난번 버즈 알 아랍에 갈 때 타봤으니, 두 번째니까 그렇게 무섭지는 않겠지. 더불어, 밤이니 야경구경도 하고. 그래도 확인차 한번 물어나 볼까?

"무얼 타고 가는데요?"

바흐는 짧게 대답했다.

"블레이드(Blade:리버티 사가 운행하는 뉴욕 헬리콥터 서비스)."

아마 헬리콥터 이름이거나, 회사 이름 일 거 같았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요?"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 그의 고모님이 사는 뉴욕에 왔으니,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뿔테가 했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곧 친인척과 맞닥뜨리게 되겠지.

"세인트 레지스(St. Regis)로 갈 거야."

뉴욕의 호텔 이름? 그가 뉴욕에 머물 때는 고모님 집에서 지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동행이 있어서 호텔인 걸까.

조금 의외의 대답이었기에 라희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지잉,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공항 유리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 도착했나 보군. 나가지."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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