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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27화 (12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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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비행기에 탑승할 때 어둑어둑했던 창밖은 금세 어두워졌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첫 번째 서브 된 기내식을 깨작거리며 먹고 나자 창문 아래는 달빛에 비춘 양털 같은 구름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승무원 두 명이 테이블을 깨끗이 치우는 동안, 바흐는 손에 들린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았고 라희는 고개를 돌려 둥근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사이 눈높이에서 보이는 무수한 별들. 각자의 다른 빛과 반짝임으로 수줍게 빛나는 별들이 시야 가득 펼쳐져 있었다. 별빛이 느리게 흐르고, 실내에 내려앉은 고요한 침묵을 뚫고서 밤 비행기가 날랐다. 창가 너머 짙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이 눈 안에 스민다.

라희는 창밖에 둥글게 등을 기울이고 붙다시피 해서 보던 자세를 바꿔 푹신한 좌석에 등을 기대고 헤드레스트에 고개를 얹고서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수한 별 무리 사이, 그 너머 창가에 비친 맞은편 그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내려 비스듬한 시선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어둠속 바흐의 투명한 모습에서 한동안 라희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음료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세라가 정중히 물었다. 라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바흐 앞에 반쯤 비워진 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같은 걸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내 라희의 앞에도 가느다란 샴페인 잔 가득 황금색 액체가 찰랑거리며 담겼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는 기포가 좁은 잔을 타고 뽀글뽀글 솟아올라 와 황금빛 표면 위에 잘게 부서져 터졌다.

말 그대로 스파클링(sparkling:반짝이는) 와인.

시선을 사로잡아 눈을 매혹하는 치명적인 샴페인 잔의 자태를 들여다보며 감상하던 라희가 잔을 들이마시려 하자, 어느 틈엔가 쭉 뻗어나온 긴 손가락에 쥐인 가느다란 잔이 쓱 나타나 챙, 하며 그가 가볍게 부딪혀 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잔을 기울여 마시자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입안 가득 머금어졌다. 첫맛은 섬세하고 크리미한 상큼한 맛이었지만 조금 지나자 고소한 맛이 느껴지는 복합적인 맛의 샴페인이었다.

"맛있어요. 계속 당기는 맛인데요."

라희가 말하자 그는 간단히 말했다.

"크리스탈은 호불호가 갈리지 않거든."

라희는 얼음 버킷에 담긴 샴페인 병을 힐끔 바라보았다. 황금빛 병목에 쓰인 CRISTAL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술에 문외한인 라희가 들어본 이름이면 상당히 유명한 샴페인일 터. 유명할수록 가격이 비싸지는 술의 특성에 따른다면 아마 평소의 라희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가격일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맛은 있었다. 씁쓰름하고 묵직해 도통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레드 와인보다는 입에 잘 맞았다. 마치 청포도 맛 나는 탄산음료 같았으니까. 아까 먹은 느끼한 감자와 기름진 기내식의 잔 맛 싹 씻겨 내려갔다. 어느덧 한 잔이 비워지자 세라가 물었다.

"더 드시겠습니까?"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으니 가격이야 아무렴 어떠랴. 라희는 다시 채워진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액체를 기울여 마셨다.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사치의 맛. 감칠맛 나는 화려한 맛에 중독되듯 연거푸 기울이자 또 잔이 비었다. 이번에는 눈빛만으로도 옆에서 대기 중이던 세라가 빈 잔 가득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라희가 계속 술잔을 들이키는 모습에 맞은편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시선을 들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지난번 런던 아이에서는 그와 함께 마셨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거듭 마시고 있으니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할 거였다. 바흐를 향해 싱긋 웃어준 라희는 고개를 돌려 검은 창밖에 촘촘히 박해있는 별빛을 취한 듯 바라보며 자잘한 기포 올라오는 미끈한 잔을 기울였다.

오롯이 혼자서 감상할 수 있는 구름 위의 탁 트인 밤하늘에다가 사치스러운 맛의 샴페인이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계속해서 마시고 있으려니, 리사가 테이블 위에 한입 크기로 썰린 과일과 예쁜 초콜릿을 가져다주었다. 노란 파인애플과 잘 익은 애플 망고, 백포도와 청포도, 키위, 블루베리, 라즈베리, 체리와 컵케이크 형태의 초콜릿이 예쁘게 담겨 있는 모양이 아무래도 술안주로 준 거 같았다.

이왕 준비된 거, 여러 과일을 모두 맛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라희는 포크를 들어 한 과일을 찍어 입안에 오물거리다가 샴페인 한 모금으로 입안의 단맛을 헹구고 다시 다른 과일을 찍어 입에 넣었다. 다시 샴페인 잔이 비어 세라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바흐의 말에 세라는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인사하고 뒤돌아 객실을 나갔다. 그는 아이스 버킷에서 이제 바닥만 남은 샴페인 병을 꺼내 잔에 따랐다. 병을 전부 비워냈는데도 잔에는 절반도 못 미치는 양이 채워졌다.

"한 병 더?"

그의 물음에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서양 한가운데를 날아가는 구름 위 전용기 안에서 이렇게 맛있는 샴페인을 언제 다시 맛보겠는가.

"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스 버킷 안에 들어 있던 크리스탈 샴페인 병을 꺼내 개봉했다. 펑, 하고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는 발포성 소리와 함께 졸졸졸 사치의 황금빛이 좁고 가느다란 잔 안으로 하얗게 부서져 쏟아져 내렸다.

"Cheers?"

(건배?)

챙, 원래 앉아 있던 맞은편이 아닌, 바로 옆에 앉은 그가 잔을 부딪쳐왔다. 지척에서 그의 그윽한 체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순간 느껴지는 아찔한 기분. 등의 잔털이 오소소 일어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Cheers!"

(건배!)

순간적인 당황과 어색함을 감추려 라희는 잔을 기울여 쭈욱 들이켰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 톡 쏘는 탄산의 짜릿한 청량감과 아찔한 단맛. 맥주의 구수하고 드라이한 맛과는 전혀 다른 달콤한 유혹. 혼자서 거즘 한 병을 비우고서 또다시 마시는 샴페인은, 라희가 원해서 마신다기보다는 술이 술을 마시는 단계 같았다.

투명한 달이 얼굴을 비추고, 달빛에 반사된 구름 떼가 저 아래 깔려있고 검푸른 밤하늘 속 별이 총총이는 대기권 상층 위에서 단둘이 달달한 샴페인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하늘을 나르는 로맨틱한 양탄자를 탄 기분이다. 기분이 붕 뜨는 알딸딸한 취기 때문일까. 평소 고요한 침묵의 달인인 바흐에게 뭔가 말을 시켜보고 싶었다.

"있죠."

챙, 라희는 잔을 기울여 그의 잔과 부딪쳤다. 그가 눈을 들어 라희를 응시했다.

"술과 관련된 말 아무거나 해볼래요? 건배 말구요."

바흐는 잠시 눈을 내려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라희가 잔을 들고 기다리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영어였다. 와인은 입으로 들어온다? 너무 평이하잖아. 그럴싸한 말을 해줄 줄 알았건만, 라희가 실망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희미한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그리고 사랑은 눈으로 온다.)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그것뿐)Before we grow old and die."

(나이 들어 늙어서 죽기 전에)시 같았다. 운율이 딱딱 맞는 명시.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라희가 머릿속으로 뜻을 해석하고 있는 사이,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나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바흐는 잔을 들어 올렸다.

"I look at you,"

(그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잔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라희를 곧게 응시했다. 짙은 눈빛과 취기에 몽롱하게 풀어진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화륵. 술기운인지 뭔지 모를 열기가 몸을 타고 솟구쳐올랐다. 손끝이 찌릿 거리고 눈 아래까지 차오른 열기에 볼이 뜨끈해지는 느낌. 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다. 단정한 입매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

"-and sigh. " (그리고 한숨 짓는다.)챙, 멍하니 있는데 술잔이 맑은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달아오른 뺨의 열기가 확 치솟았다. 머리끝까지 솟는 열기에 라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잔을 크게 기울여 홀랑 비우듯 마셨다.

"그거, 시죠?"

술잔을 비운 라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급하게 묻자, 그가 답했다.

"예이츠. 술의 노래."

(A Drinking Song - William Butler Yeats) 역시, 추측이 맞았다. Mouth, Truth, Eye, Die 문장의 끝 부분이 저렇게 딱딱 떨어지는 운율은 대부분 시였다. 후끈한 취기를 다스리기 위해 라희는 빠르게 말을 꺼냈다.

"어쩐지, 익숙해서요.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았어요. 저, 화장실 좀."

통 로쪽 앉은 그가 일어서 자리를 터주자 라희는 좌석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인 움직임에 몸이 조금 휘청했지만, 이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좌석을 짚고서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발아래 느껴지는 감각이 둔탁한 것이 생각보다 많이 취한듯했다.

"화장실은 저 방 너머 뒤쪽에 있어."

방. 저기 보이는 하얀색 벽에 문이 방인가 보다. 그러보니, 아까 제임스의 카드에 뒤쪽에 더블 베드룸이 있다고 쓰여있었다. 더블 베드룸과 연관되어 쓰여있던 마일 하이 클럽(Mile High Club)을 떠올리자, 좀 전에 치솟듯 달아올랐던 몸에 다시 뜨거운 기운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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