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23화 (123/214)

123

엘리자베스는 라희에게 괜찮으냐고 재차 물었고,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마음은 모욕감과 분노로 시커멓게 타버렸을망정, 메마른 손으로 후려친 따귀 두 짝은 물리적으로 피가 터지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으니까.

그때 계단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림한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오버사이즈 베이지색 라마 코트를 입은 바버라였다.

"바버라."

엘리자베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바버라를 불렀다. 바버라는 발걸음을 돌려서 라희와 엘리자베스 쪽으로 걸어왔다.

"대체 유진이 여기 왜 와 있는 거죠?"

엘리자베스가 신경질적으로 묻자, 바버라는 푸른 눈을 껌뻑이며 명료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로드윌 갤러리의 전시 주체를 보렴. 20세기 현대 미술이잖니, 거기에 미국도 포함되어 있단다. 리즈. 유진은 내 오랜 친구고, 전문 분야가 미국 현대 미술이지. 유진만큼 미국 내 소규모 미술관과 사설 갤러리, 유수의 대학 내 갤러리 그리고 다양한 미술단체들을 알고 있는 딜러는 드물어. 너도 알다시피, 인맥을 통하면, 좋은 작품을 좀더 저렴하게 전시할 수 있거든. 이번 에드워드 호퍼나, 로버트 헨리, 존 슬론 같은 대작들의 섭외는 유진을 통해서 이루어졌단다. 지금 여기 걸린 에드워드 호퍼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해서 지금 유진의 감독하에 2층 제2 전시실에 설치 중이고."

바버라는 힐끗 시선을 던져 라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뺨에 붉은 기를 띤 라희를 바라보더니 눈을 한번 굴리고는 작게 말했다.

"......유감이에요. 미스 송."

불행한 일을 당한 이들에게 늘 그렇게 하듯, 서양인들의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건네졌다. 아마도 대충 상황을 짐작했으리라. 타인에게 부끄러운 치부가 발각된 것 같은 화끈거림이 볼의 열감과는 다른 온도로 얼굴에 확 끼얹어졌다.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셨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엘리자베스가 항의하듯 날카롭게 말하자, 바버라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잠시 따라나오라는 눈짓을 건넸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난 정말 네가 미스 송과 동행할 줄은 정말 몰랐단다. 리즈."

라희가 뺨을 감싸 쥐고 오도카니 서 있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바버라를 따라 전시실 바깥쪽으로 향했다. 라희가 서 있는 쪽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렸다. 전시실 바깥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즈. 넌 유진을 이해해야 해. 그럴 수밖에 없을 거란다."

바버라가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엘리자베스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가뜩이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다가, 다짜고짜 라일라에게 폭력을 휘두른 무례한 여자를 이해하라고요? 바버라. 정말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을 하시네요."

"그게....."

바버라는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록 그녀의 행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위에 누가 있나 없나 확인하느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시간만큼의 뜸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말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네 오해를 풀어주고 싶으니 말을 아끼지 말아야겠구나. 우리 케이틀린 있잖니."

"........"

아마도 엘리자베스는 의문 어린 표정이었을 것이다. 뜬금없는 바버라의 딸아이 이름이 나왔으니까.

"내가 케이틀린을 임신한 중기쯤 되었을 때 말이야. 그때 런던에 데이빗과 유진이 방문했었지, 기억나니? 그날 너희 집에서 우연찮게 유진과 화장실에서 마주쳤단다."

"그것이 무슨 의미죠?"

엘리자베스가 삐딱한 말투로 물었다.

"당시..."

바버라는 마치 중대한 비밀을 누설이라도 하는 듯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더니 재빨리 말했다.

"유진은 입덧 중이었어."

"........!"

엘리자베스가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난 두 사람이 당연히 결혼할 거라 생각했었지.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고, 축복받은 새 생명까지 있었으니까. 한데...."

바버라는 긴 숨을 내쉬었다.

"세상일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더구나. 이 사실은 너만 알고 있으렴."

"..........."

엘리자베스는 놀라 입을 다문듯했다. 라희 역시 순간 너무 놀라 뺨의 얼얼한 아픔 따윈 잊어버리고 즉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라희는 뺨을 감싸던 손을 내려 아무 소리 내지 않도록 입 주변을 틀어막았다.

저쪽 편에서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는지, 조용한 실내에는 적막이 흘렀다. 전시실 실내가 너무도 조용했기에, 비록 조금 떨어진 공간에서 하는 이야기였지만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와 내용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맙소사. 그런데 왜..."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엘리자베스가 겨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야, 두 사람만이 알지 않겠니? 그날 데이비드가 세심히 유진을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으니 나도 그 이후의 일은 모르겠구나."

바버라가 건조하게 답하자, 엘리자베스가 급히 말을 꺼냈다.

"아, 맞아요. 그때쯤 조금 이상한 일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고, 이상했었다는 느낌만 약간 남아 있네요. 아마, 호기심쟁이에다가 참견쟁이인 우리 오빠라면 내막을 속속들이 알 텐데. 전 그때 사춘기여서,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거든요."

"네가 아무리 사교계에서 간접경험을 익혔다지만, 넌 아직 한참 어리고, 또 남녀 관계란 막상 자신의 일이 돼야지만 그 밑바닥까지 알 수 있는 법이란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으로 유진을 속단하지 말렴. 난 오늘 유진이 무언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믿으니까."

다시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엘리자베스 혼자 전시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자베스는 빠른 걸음으로 라희를 향해 다가와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이 불쾌한 장소는 어서 벗어나자고요. 라일라. 일단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어떻게든 해봐야겠어요."

***

"음,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군요."

저녁식탁. 엘리자베스 옆자리에 앉은 제임스가 라희를 힐끔 보더니 약간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을 건넸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미지 변신을 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화장품의 마법이 덧씌워진 듯하군요. 그것도 전문가의 손길로요."

라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제임스 옆에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아무런 말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미리 약속한 대로 입을 꾹 다물고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떨어뜨려 식탁 위 놓인 저녁 메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손에 들린 나이프를 우아하게 움직여 접시 위 굵은 그릴 자국 나 있는 두툼한 양 갈비 스테이크를 가로로 썰었다.

"네. 기분전환이 필요해서요."

라희가 말하자, 제임스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흐음, 아마도 리츠 살롱(The Ritz Salon)에 다녀오셨겠군요. 엘리자베스가 단골이니까요."

제임스가 지적하듯 말했다. 라희는 그가 맞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아, 그러지 마십시오. 데이빗이 아주 싫어할 거니까요."

갑자기 제임스가 정색하며 말했다. 하지만, 무표정하고 거만한 평소의 눈매보다 끝이 조금 가늘어진 눈빛은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네?"

라희가 미간을 미미하게 좁히며 말꼬리를 올리며 묻자, 제임스가 맞은편 바흐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거든요. 남자는 연인이 다른 사람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보내는 것을 보면 질투로 눈이 멀어 버리니까요. 가뜩이나 평소와 다르게 묘한 모습일 때는 더욱더 말입니다."

그의 말만 따라, 라희의 옆에 앉은 바흐에게서 왼쪽 뺨이 다시 화끈거릴 정도로 곧은 시선이 쏘아졌다. 라희는 고개를 약간 아래로 숙였다. 그 바람에 귀 뒤로 넘긴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뺨 위에 가볍게 스쳤다.

실상, 얼굴에 화장한 이유는, 엘리자베스의 손에 이끌려 따라간 에스테틱에서 급히 쿨링 마사지를 받은 후 붉은 기를 가리기 위해서였는데, 제임스의 지적으로 화장한 얼굴이 주목받아서 뭔가 엄청나게 어색해져 버렸다.

"제임스."

바흐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이, 맞은편 제임스를 향해 낮게 이름을 부르며 경고했다. 제임스는 어깨를 살짝 으쓱 올리며 알았다는 몸짓을 보였다. 그리고 바로.

움찔.

순간적으로, 라희는 뺨 위에 와 닿는 긴 손가락의 예기치 못한 감촉에 몸을 움츠렸다. 바흐는 말없이 라희의 뺨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을 집어 다시 귀 뒤로 매만져 넘겨주었다.

아주 짧고, 찰나에 불과한 접촉인데도 섬세하고 세심한 배려의 행위였다.

'.......배려라.'

라희는 갤러리에서 엿들은 바버라의 말을 떠올렸다. 입덧하고 있던 유진을 세심히 배려했었다고 했었지. 케이틀린이 7살 반이 되었다고 했으니 어림잡으면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다. 언뜻, 라희의 머릿속에 두바이 알 마하 리조트에서 우연치 않게 보게 된 두 사람의 사진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런 모습이었겠지. 지갑 안 스냅 사진 속,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다정한 모습. 누가 보아도 행복한 연인이었던 두 사람.

'지금도?'

라희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유진과 헤어진 지금도 둘의 사진이 지갑 속에 담겨 있는지. 라희는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바흐를 바라보았다. 라희가 마주한 식탁 위에는 더 샤드의 레스토랑에서 스페셜 오더한 음식이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근사한 음식 냄새에 식욕이 동하지도 화려한 데코레이션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바흐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아니, 지금이 아니라 유진과 갤러리에서 조우하고 나서, 원래 계획했던 마카롱 샵이 아닌, 리츠 호텔의 에스떼띡 살롱에 들러서 부어오른 피부를 진정시킨 후 예정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스위트 룸에 들어선 순간부터였다. 라희의 주의는 온통 바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올려다본 눈과 마주치자 그는 잠시 라희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히다가,

"데이빗, 아까 이야기했던 미국 증시는 말일세..."

제임스가 부르는 소리에 대꾸하려 고개를 돌렸다. 잠시 증권 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제임스와 바흐는 이내, 엘리자베스가 오블릭스(Oblix)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에 대한 맛 품평을 시작하면서부터 다 함께 메뉴에 대해 대화를 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영국산 신선한 양 갈비 스테이크와 상큼한 연어샐러드 그리고 산양치즈로 만든 카프리제에 대한 까다로운 평가가 내려졌다. 라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바흐의 옆모습을 가만 응시했다. 짙은 눈썹 깊은 눈매, 높고 곧은 콧날과 단정한 입술. 남자다운 턱선과 얼굴선.

그녀의 남자였던, 그.

이제는 과거시제다.

오늘 갤러리에서 마주친 유진은, 그간 얼굴 위에 덮어쓰고 있던 차가운 가면을 집어 던져버릴 만큼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혀서 악다구니를 쓰며 패악을 부렸다. 라희가 바흐와 함께 있는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오늘 거침없이 라희를 향해 날아든 세찬 손찌검은,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항상 자신의 자리라 굳게 믿고 있던 연인 자리를 박탈당한 분노. 그리고 질투.

'그와 내가 함께 있는 소식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고 눈앞이 이글거리고 살이 타고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돌아버릴 거 같다고 했었나?'

라희는 유진이 처절하게 이성을 놓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둘의 과거가 어쨌건 간에, 라희가 개입해서 끝난 관계도 아니고 영국으로 떠나 있는 동안 당사자들 사이에서 정리된 관계다.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제삼자에 불과한 라희가 오늘 따귀를 맞을 합당한 이유 따윈 없었다. 단지 유진의 일방적인 분풀이였을 뿐.

-네 깟게 뭐라고.

머릿속을 멍멍하게 울렸던 유진의 앙칼진 목소리. 네 까짓 거? 그러는 그쪽은 얼마나 잘나고 대단하길래 상대방을 그 따위 호칭으로 깔아뭉개는 거지.

영국처럼 신분제가 구분된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유진과 라희를 가르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단지, 자본주의의 질서인 돈과 연공서열인 나이뿐. 돈은, 실상 쥐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유진에게 빚은 진 것도 아니고 돈을 꿀 것도 아닌데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나이. 라희는 미간을 찡그렸다. 나잇값을 한참 못하는 연장자에게 대접해줄 필요가 있을까?

-천박한 수준으로 노는 꼬라지 하고는. 얕은수 쓰느라 여기까지 와서 얼굴 디밀 생각이나 하고.

지금도 유진이 목소리가 쟁쟁히 귓속을 울리는 것만 같다. 라희는 앞에 놓인 양 갈비 스테이크를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깨물었다. 유진의 참람한 말을 떠올리자, 겨우 다스렸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