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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22화 (12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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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눈앞에는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유진이 서 있었다. 라희 눈에 비친 유진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들은 불쾌한 듯 한쪽 방향으로 진저리를 쳤다.

저 차가운 손바닥에 휘갈겨 쓸린 왼쪽 뺨이 욱신거렸다. 라희는 한 손으로 화끈한 열감이 치솟는 뺨을 매만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바닥이 살짝씩 닿는 작은 마찰에도 부어오른 피부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따끔따끔하다. 충격으로 멍하고 먹먹한 귓가에 유진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너, 내 생일에 전화한 걸로 모자라 여기까지 찾아온 저의가 뭐야? 응? 말해봐."

반말. 그동안 세련된 어투로 포장했던 격식 따윈 집어치운 악에 받친 목소리. 유진은 몰아치듯 외쳤다. 생일? 그리고 전화? 라희는 윌버리 하우스로 향하기 전날, 자정에 걸었던 전화를 기억해냈다. 그날이 생일이었나?

"전화걸자 마자 바로 즉시 너란 걸 밝히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 아니었어? 잠시나마 내게 진욱이 일 거라 기대할 여지를 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렇다면, 너란 걸 밝히는 순간 실망과 좌절이 더 극대화되니까."

아니, 그건 억지다. 라희 입장에서는 용기 내 전화한 거라 뭐라 말해야 할지 망설였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떤 말로 통화를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서. 그날이 유진의 생일이었는지는 알지도 못했고, 알수도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진의 생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얼토당토않는 오해에 라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싸늘히 유진을 노려보았다.

"저의라뇨?"

쏘아보는 라희를 향해, 유진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내가 지금 로드윌 갤러리에서 일하는 거, 알면서 일부러 찾아온 거 아니었어? 설마 여기까지 와서 우연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계속되는 반말. 유진은 불쾌한 듯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서 힘주어 발음했다. 날카롭게 그린 눈썹이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왜? 왜 왔니? 아니, 길게 물을 필요도 없겠지. 그날, 전화 걸었던 날 느꼈던 쾌감을 다시 만끽하고 싶었니? 응? 좋았겠지. 통쾌하게 이긴 기분이었을 테니까. 내 생일 날 그것도 업무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 한진욱이 너랑 같이 있다고 아주 자랑을 해대더니, 그걸로 모자랐니?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너."

독기를 띠며 쏘아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유진은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신경질적으로 팔짱을 꼈다. 하지만 몸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바르르 떨며 분한 듯 말을 내뱉었다

"의도와 상관없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유진은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잘도, 쳐지껄이더라?'

그러다 이내 하, 바람 빠지는 소리와 비슷한, 붉게 비틀어 올린 입술에서 기이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비웃음과 경멸이 한껏 뒤섞인 웃음이었다. 갑작스레 실성한 여자처럼 웃는 유진을 보고 라희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

그렇게 웃고 난 유진의 얼굴은 불쾌함과 혐오로 일그러져 보였다. 하, 비웃음 섞인 헛웃음을 허공에 휘날리던 유진은 한발 앞으로 내디뎌 라희를 향해 다가왔다. 라희보다 키가 큰 유진은 라희를 죽일 듯이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노려보았다. 차갑고 비틀린 시선. 스스로의 흥분을 제어하지 못해 얼굴 빛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그래서 의도와 상관없이 여기까지 와서 뭐? 뭘 더 자랑하게?"

유진은 험악한 인상으로 한껏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너네 둘이 런던에서 내내 붙어있다는 거 듣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아. 눈앞이 이글거리고 살이 타고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 돌아버릴 거 같아. 이 고통은 런던을 떠나는 내일까지 계속되겠지. 한시라도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야. 됐니? 이제 만족해? 그렇게 내 얼굴 보고 확인하고 싶었어?"

마침내 폭발한 적나라한 분을 이기지 못해 악을 쓰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걸 목도한 라희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라희는 다물렸던 입을 열었다.

"이유진씨."

라희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분노로 뱉어낸 독백을 듣자, 이유진 혼자 무슨 소설을 쓰며 본인이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후려친 따귀를 맞아서 뺨은 얼얼했지만, 일단 분한 마음을 다스리며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유진과 같이 휩쓸리기는 싫었다.

"그쪽이 뭐라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쪽이 써낸 망상과 실제는 무관해요. 난 이유진씨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라요. 단지 그날은 우리가 계약한 2억 때문에 먼저 말해 주려 전화했던 것 뿐이에요."

유진이 크게 고함을 쳤다.

"거짓말! 끝까지 주둥이에 거짓말을 줄줄 흘리는 꼬락서니 하고는. 그깟 1억보다 더 큰돈이 탐났겠지. 돌아서서 계산기 두들겨보니, 1억이 밑지는 장사라 생각된 거 아니었어? 선우와 달리 네 천하디천하고 역겨운 몸뚱이를 들이미는 것을 방해할 가족도, 부모님도 안 계시고 말이야!"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유진의 악다구니를 들으면 들을수록 잔뜩 끌어모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유진이 크게 쏘아붙이듯 소리를 내질렀다.

"너! 진욱이를 완전히 홀렸다고 자만하는 모양인데, 네 미끄덩한 몸뚱이, 반반한 낯짝, 그거 얼마 안 갈 거야. 뭣보다, 진욱이가 유일하게 따르는 브랜다가 네까짓 것 받아 줄 거 같아? 꿈도 꾸지 마."

"이유진씨."

라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라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나직하게 뱉어냈다

"전후 사정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말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라희가 경고하듯 건조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메마른 눈빛이 유진을 싸하게 쳐다봤다. 그에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껏 입꼬리를 비틀어 끌어올리며 한껏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이 지나친다고? 그게 네가 할 말이야? 네 행동은 어떻고? 여기까지 와서 보란 듯 뻐기고 싶어? 응? 그런데 어쩌니? 시간은 네 편이 아니라서. 그 짓거리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데. 네 몸뚱어리가 앞으로 얼마나 갈 거 같아? 아주 보자 보자 하니까. 천박한 수준으로 노는 꼬라지 하고는. 얕은수 쓰느라 여기까지 와서 얼굴 디밀 생각이나 하고. 네 작은 머리통에 뭐가 들어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워. 하, 당연히 쓸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겠지."

유진은 한껏 비꼬며 조소했다.

"본능? 욕망? 잠자리 기술? 네 몸뚱이 같은 저급하고 천박한 거 돋보이게 할 구린내 나는 똥덩어리만 쳐 넣고 다니느라 다른거 들어갈 공간이나 있겠니?

그때였다.

-짝!

라희가 뻗어낸 손바닥이 유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먼저 유진이 있는 힘껏 라희를 내려쳤기에, 라희 역시 인정사정없이 유진을 뺨을 후려쳤다. 순간, 꼿꼿하게 서서 내려다보던 유진의 몸이 휘청이고, 턱이 옆으로 홱 돌아갈 정도로 쎈 힘이었다. 순식간에 온힘을 쏟아낸 라희는 손바닥이 얼얼해 미간을 찡그렸다. 뺨을 때 렸는데 되려 때린 손바닥이 더 아팠다. 뭉툭한 감각이 손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잘게 떨리는 손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유진은 뜻밖의 일격에 놀랐는지 일순 몸을 움찔했다. 라희는 분노로 물든 눈이 훑어내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쏘아보며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쪽은 모르니까."

후려쳐 맞은 뺨이 얼얼한지 얼굴을 감싸 쥔 유진은 씩씩거리며 눈앞의 라희를 찢어 발길 듯 노려보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가에는 독살스러운 빛을 띠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은 라희를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두 사람은 팽팽한 대치 속에서 서로를 집어 삼킬 듯 쳐다보았다. 유진은 가슴이 들썩이고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숨을 몰아쉬며 라희를 쏘아보고 있었다. 라희가 저릿한 손바닥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싸늘하게 입을 열려던 찰나, -찰싹!

매서운 손바닥이 눈앞에 날아들었다. 고개가 옆으로 꺾일 정도의 강한 타격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아득해졌다고 해야할까. 눈가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따끔거리는 피부를 온몸으로 느끼며 간신히 눈을 깜빡였을 때는 머릿속까지 얼얼했다. 라희는 뺨을 감싼 채 유진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유진의 입술이 실룩 비틀어지며 앙칼질 외침이 흘러나왔다

"감희 내게 손을 대? 네 깟게 뭐라고. 언니라고 잘도 부르더니 이제는 그쪽? 웃기고 있네. 가진 것이라고는 남자들의 눈을 혹하게 하는 반반한 낯짝과 딱 그 짝에 딱 어울리는 몸뚱어리뿐인 주제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진은 표독한 음성을 흘리며 사나운 눈길로 라희를 쏘아보았다. 유진이 다시 한 발짝 라희를 향해 다가와서 한 대 더 치려는 듯 다시 팔을 힘껏 위로 들어 올렸다. 그때, 라희의 뒤쪽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유진! 대체, 뭐하는 거에요?!"

잔뜩 놀라 날카롭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엘리자베스의 것이었다. 유진은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좁혔다. 어느새 계단을 올라와 라희와 유진이 있는 코너로 뛰다시피 걸어들어온 엘리자베스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1층에 라일라가 없어서 올라와 봤더니, 세상에!"

엘리자베스는 라희에게 재빨리 다가와 라희의 얼굴을 살피며 푸른눈을 크게 떴다.

"라일라. 어머! 이럴 수가. 볼이 새빨개요! 맙소사. 방금 그 큰 소리는 따귀를 때리는 소리였군요."

엘리자베스는 걱정 어린 얼굴로 손을 뻗어 라희의 뺨을 어루만지고서 눈을 들어 유진을 쏘아보았다. 두 사람은 키 차이가 나지 않아서, 대등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원래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런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네요. 유진."

유진은 엘리자베스가 등장하자, 이내 끓어오르던 분노를 감추고 평정심을 되찾은 듯 무표정했다. 가슴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여파로 들썩이고 있었지만, 적어도 싸늘하게 식힌 얼굴만은 그래 보였다.

"엘리자베스. 오해에요."

호흡을 다스리려 깊은숨을 연신 내쉬던 유진이 건조한 말투로 변명하며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자, 엘리자베스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려 차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해라구요? 라일라를 대체 왜 때린 거죠? 폭력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어요. "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유진의 잘못으로 데이빗 오빠와 끝난 거 아니었어요? 제가 듣기로는 그런데요. 그렇지 않아요? 미국 대학생활 내내 유진만 바라보며 헌신한 데이빗을 버리고 떠났을 때는 언제고, 그렇게 뻔뻔하게 돌아와서 옆자리를 차지하다. 막상 라일라에게 뺏기니 분한 거죠?"

"엘리자베스, 그건 정말 잘못 알고 있는 거에요. 난 데이빗을 떠난 적 없어요."

"그럼, 그건 뭐에요? TGH그룹 회장과 염문설은요? 유진때문에 이혼까지 했고 곧 결혼할거라는 설이 파다했잖아요? 심지어 데이빗 오빠가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일 때문에 데이빗 오빠 차 사고 나서 죽을뻔한 거 알기나 해요?"

유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붉은 입술이 비틀어져 열렸다.

"아니, 그건 사업상 만남이었을 뿐이라구요. 그리고 이건 내 사생활이라 엘리자베스에게 일일이 해명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건조한 푸른 눈으로 유진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유진, 벽에도 눈과 귀가 달려 있어요. 비밀은 없죠. 특히 이쪽 사람들이 속한 사교계는 좁고, 더 그래요. 예전부터 유진에 관한 소문은 적잖이 듣긴 했지만, 그냥 흘려 넘겼어요. 하지만, 올해 TGH그룹 회장과의 깊은 관계는 간과할 수가 없더군요. 두 사람, 정말 오랜 관계 아니었나요? 어쩌면 데이빗 오빠를 만날 때부터 만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쪽이었어요? 데이빗에게 소문을 흘린 사람이?"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턱을 한껏 치켜들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유진의 뻔뻔한 태도에 기가 찬 듯, 코로 짧은 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저는 아니었어요. 데이빗 오빠와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데이빗 오빠의 몇 안되는 측근 중 친구를 아주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 한 명 있지요."

유진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고개를 잘게 저었다. 그리고 한껏 꾸민 세련된 억양으로 말을 이었다.

"엘리자베스. 거듭 말하지만, 그 일은 오해에요. 사실이 아니라구요."

엘리자베스가 차가운 푸른 눈을 가늘게 좁히며 유진을 쏘아보자, 유진은 크게 숨을 내쉬고 나서 말없이 엘리자베스 뒤에 서 있는 라희를 죽일듯이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위층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전시실 안에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크게 울리다가 이내 잦아들어 멀어져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피 뉴 이어 ^^! 복된 새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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