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21화 (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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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화려한 막이 올랐군. 소식 듣고 달려온 참이네."

라희가 대충 씻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서 거실로 나오니, 눈에 보이는 넓은 소파에 제임스와 엘리자베스가 앉아있었다. 그들 앞에는 바흐가 주문했음이 분명한 3단 트레이의 에프터눈 티가 차려져 있었다. 바흐와 제임스는 가까이 앉아서 대화 중이었다. 아니, 일방적인 제임스의 독백을 바흐가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CME(Chicago Mercantile Exchange:시카고상품거래소) 크게 한 껀 했다지. 대체 얼마만큼 자산을 늘리려는 건가? 목표는 피터린치인가? 마젤란이 아닌 콜럼버스라도 운용하려는 겐가."

"음."

바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찻잔을 기울여 마셨다. 제임스는 턱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에 나타난 라희를 발견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라일라. 사흘 만에 보는군요. 그간 방법은 배웠습니까?"

"네?"

급작스럽고 의미 또한 모호한 말에 라희가 바로 되물었다. 제임스는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바흐를 향해 턱짓하고서 말을 이었다.

"마이더스(Midas: 황금손)와 사흘을 보냈으니, 돈 버는 방법을 전수받았느냐는 말입니다."

라희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자, 자리에 앉은 제임스가 바흐를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워렌 버핏과 점심식사를 예약할 게 아니라, 오늘 자네와 저녁 식사를 해야겠군. 지난 사흘 내내 이곳에서 숙박을 연장하며 틀어박혀 있다기에, 난 짐짓 걱정했지 뭔가. 자네가 하룻밤 14,000파운드의 스위트 룸에서 계속 지내다간 거지꼴을 면치 못할 거라, 언젠가는 말이네, 생각했었네.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축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어제 하루 동안 S&P 500 선물(Futures)로 뉴욕 맨해튼 집 한 채 값을 벌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것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One57 펜트 가격으로 말일세."

라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바라보고 있자, 제임스 옆에 앉아 소파 위 3단 트레이의 2번째 칸에 놓여있는 하얀색 레몬 머랭 타르트(lemon meringue tart)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던 엘리자베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1억 달러를 말하는 거에요. 라일라. 제임스 오빠는 어제 시장에서 돈을 꽤 잃었거든요. 첫 개장 날이라고 잔뜩 들떴다가 제대로 털린 아주 불쾌한 하루였답니다. 사기당했다고 온 집안이 울리도록 악을 썼으니 말 다했지요. 그러다 오늘 오후쯤 브로커에게서 데이빗 오빠 소식을 들었으니 오빠가 저리 흥분한 것을 이해해주세요."

엘리자베스의 심드렁한 말에,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만 그녀가 말한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1억 달러? 1억 달러면, 1달러가 1000원이 넘으니까 일단 뒤에 0을 3개 덧붙이면...

한국 돈 1천억도 넘는 돈이었다. 전에 오피스텔에서 그 정도 액수를 노트북 화면 너머로 본 적 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만. 순간, 라희는 귀를 의심했다. 1천억이 그가 어제 하루 동안 번 돈이라고? 바흐는 어제 오후 나절 해가 질 무렵까지만 휴대폰을 쓰면서 전화를 몇 통 걸었을 뿐인데? 라희가 놀란 눈으로 바흐를 곁눈질했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제임스를 나무라는 중이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사 돈일세."

"맙소사. 데이빗, 자네 회사의 거의 모든 자본금이 자네 것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말게나. 그쯤 되면 겸손도 가증스럽게 느껴질 테니."

바흐가 껄끄러운지 미간을 찌푸리는데도 제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과 금리율, 그리고 양적 완화 종료와 국제유가 폭락 등 주가와 직결되는 경제이슈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앞으로의 시장 추이에 대한 예측을 말하면서 바흐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라희가 거실 분위기를 살피며 쭈뼛거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제임스는 열띤 대화를 이어나갔다. 실상,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옆에서 오빠가 떠는 것을 들으며 3단 트레이의 맨 아래의 스콘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흥미를 잃는 표정으로 접시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짧은 숨을 쉬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서 라희에게 시선을 맞췄다.

"오빠는 저녁 식사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제임스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화약, 돈, 체스, 친구인데요. 지금 그중 두 가지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까요. 돈과 친구요. 그래서 말인데요.."

엘리자베스가 싱긋 미소 지으며 입꼬리를 늘렸다.

"저녁 식사시간까지, 우리 나갔다가 올래요? 사흘 동안이나 이곳에 갇혀 있었다니 좀 답답하기도 했을 거 같은데, 마침 제가 답답함을 풀 좋은 장소를 알 거든요."

"글쎄요."

라희가 작게 중얼거리며 망설이자, 엘리자베스는 주저하는 라희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약간 찡그리는 듯한 미소로 말했다.

"실은, 제가 오늘 오후 가야 할 곳이 있었는데 데이빗 오빠를 만나러 갈 거라는 오빠의 말을 듣고 신나서 이리로 따라나선 거거든요. 라일라가 보고 싶어서요. 나도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그러니, 우리 잠시 나가서 저녁 식사 전까지 데이트할래요? 따분한 경제이야기 듣는 것은 뉴스에서도 충분하잖아요."

아름답고 우아한 엘리자베스가 이렇듯 말하니 차갑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제임스는 바흐를 영영 놓아주지 않을 작정인지 계속해서 국제 원유가격 폭락에 따른 미국 경기호황 기조에 관련한 경제 관련 이야기를 꺼냈기에,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붙들고 있던 손을 재차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지난번 듣기로는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 친한 친구는 몇 없다고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가만 생각에 잠겨있던 라희가 물었다.

"어딘데요?"

"갤러리에요.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멋진 예술작품으로 가득한 곳이지요."

갤러리? 초기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내셔널 갤러리를 몇 번 방문하긴 했었다. 넓고 고풍스러운 갤러리 내에 걸린 유명한 명화들을 감상하면서 다채로운 색감에 매료되어 시각적 유희에 흠뻑 빠져들었었다. 그때의 산뜻했던 기분을 떠올린 라희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가보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괜찮을 거 같아요. 혹시, 내셔널 갤러리인가요?"

"아니요. 사설 갤러리에요. 하지만, 런던에서는 꽤 규모가 있는 유명한 곳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잠깐 저희 집에서 만났었죠? 바버라요. 바버라 로드윌. 유서 깊은 로드윌 갤러리를 맡아 운영하고 있어요."

"아.."

라희는 런던 아이에서 식사를 했던 날, 짐가방을 찾으러 엘리자베스네 집에 갔다가 거기서 마주쳤던 가족을 떠올렸다. 로드윌 부부와 그 딸. 그리고, 가늘어진 차가운 푸른 눈이 쏘아내던 불쾌감도.

라희가 안색을 살짝 흐리자, 이를 의아하게 살피던 엘리자베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차기 전시회 건으로 바버라를 만나야 하거든요, 4층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텐데 혹시 바버라와 만나기 꺼려지는 거라면 1층과 2층의 갤러리에서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고 있으실래요? 현대 미술인데 전시회 규모가 커서 꽤 이슈가 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금방 끝내고 내려올게요."

라희는 부슬 비 오던 그 날의 밤 대화를 기억해냈다. 바버라가 윌버리 하우스의 소장 미술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했었고,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께 물어보고서 답을 가지고 방문하겠다고 일렀었는데, 오늘이 약속했던 그 날인듯 했다. 라희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간곡히 청했다.

"갤러리에 잠시 들르고 나서 우리, 라뒤레(Laduree)와 피에르 에르메(Pierre Herme)로 가요. 라일라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한 상자 씩 사오게요. 지난번 헤러즈에서 산 마카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서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그날 저녁에 차라리 1층의 라뒤레 것을 살 걸 하고 후회했답니다. 제게 잘못된 선택을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네?"

"네. 방에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구요."

라희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활짝 웃었다.

***

밖은 해가 저물어 어둡기는 하였으나, 시간은 5시로 아직 저녁 식사 시간도 채 되지 않은 늦은 오후에 불과했다. 어스름이 짙게 내려앉은 런던 시내를 가로질러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운전사의 도움으로 승용차에서 엘리자베스와 함께 내리자, 그중 현대적인 4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층에는 전면 유리 디스플레이 창 너머로 두 점의 큰 작품이 걸려있었고, 그 위로 로드윌 갤러리라는 고급스러운 현판이 붙어 붙어있었다. 입구 한 켠에는 20세기 현대 미술(Twentieth Century British, European & American Art)이라는 현재 전시회의 주제가 보였다.

"음, 아무래도 전시회가 어제 시작되어서, 위층은 추가작업을 하고 있나 봐요. 조금 시끄럽네요."

건물 앞에 선 엘리자베스가 창이 열려있는 위층의 갤러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라희도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니 위층에서는 무슨 작업을 하는지 공구와 드릴 소리가 들려왔다.

"저, 4층 사무실에 잠깐 다녀올게요. 갤러리 관람하고 계실래요?"

조심스러운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1층에 보이는 그림들의 알록달록한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안에도 이런 비슷한 색감의 작품들이 잔뜩 벽에 걸려있는 있을거라 생각되니 유리 창 너머에 흥미가 생겼다.

"그래요. 그럼. 그림 보면서 아래에 있을 테니, 천천히 볼일 보고 와요."

현관 입구에서 헤어져서 엘리자베스는 바로 앞에 보이는 리프트(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라희는 전시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드윌 갤러리의 1-3월까지의 정확한 전시 주제는 영국, 유럽, 미국의 회화와 조각( A Selection of Modern British, European and American Painting and Sculpture)인데 1층은 조각이, 2층에는 그림이 걸려있다고 안내되어있었다.

라희는 1층에 전시된 도자기 소품과, 나무 조각품, 그리고 각종 소재의 조형물을 감상했다. 특히 청동 재질의 인물 토르소가 눈길을 끌었는데 갓 소년티를 벗은 청년의 근육과 주름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정말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실물감이 놀라웠다.

그 옆에 스탠드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접시와 하얀색 그릇들은 대체 뭘 뜻하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옆에 조그맣게 적힌 [Edmund DE WAAL (b. 1964)‘9 Circles II’, 2011] 이라는 작품명을 보고 다시 들여다보니 최소한 작품 비슷한 모양새였기에 가만 서서 작품의 의도를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포기했다. 라희가 일견에 이해하기에는 현대 예술이 지나치게 난해했다.

각 조각상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나니, 1층에 전시되어 있던 약 30여 점이었던 작품을 전부 관람을 마쳤다. 라희는 전시실 안쪽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눈길을 던졌다. 건물 앞쪽 디스플레이 되어있던 현란한 색감의 그림들은 저 위쪽에 전시되어있을 터였다. 처음 건물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약간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웠던 공구소리는 잦아들어있었다.

'작업이 끝났을까? 계단에 차단 바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올라 가봐도 되겠지?'

발걸음을 옮겨 고풍스러운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니 2층의 전시실이 보였다. 현대적인 대형 미술 작품이 벽에 주르륵 걸려있는 바로 앞 전시실은 조용했다. 아마 작업은 다른 곳에서 하고 있었던 듯, 열린 창문도, 공구들도 보이지 않았다.

라희는 은은한 관람용 조명이 깔린 벽을 따라 걸으며 주륵 벽에 단정히 걸려있는 작품을 감상했다. 모퉁이를 도니 마치 미국 영화의 스냅샷 같은 그림들이 걸려있다.

늦은 밤 길거리 델리숍에서 커피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나, 볕이 비추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도시를 바라보는 슬립 입은 여자, 그리고 침대에 팔꿈치를 걸치고 바닥에 내려앉아 고개 숙인 여자. 굉장히 정적이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여서 라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 액자 속의 회화를 들여다보았다. 밑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작가 이름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라고 쓰여있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씩 먹먹해지는 차분한 그림들이라서, 고개를 기울이고 그림 속 묘사된 장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는가 싶은 바로 그때였다.

-짝!

얼얼했다. 아니, 불에 덴 듯 따가웠다. 벌에 쏘인 것처럼 화끈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커다란 소리와 함께 뺨을 세게 내리치는 차가운 손길에 라희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너!"

씩씩거리며 분을 못 이긴 목소리. 한국말이다. 라희는 눈을 치켜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 맹랑하구나?"

싸늘한 눈초리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라희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유진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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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별말 없길래, 기사가 오보인 줄 알았는데요. 음,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 송."

조금 떨떠름해 보이는 말투였다. 타인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자, 라희는 한껏 들떴던 몸과 마음이 일순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새해 다음날부터 새로운 전시가 시작이니까, 그전에 오면 좋고. 아니면 당일이라도? 윌버리 하우스의 고풍스러운 소장품을 전시하면 로드윌 갤러리의 품격이 한층 더 고양될 거야. 이번 연도 야심 찬 상반기 프로젝트가 윌버리니까. 최근에 컨템포러리만 다뤄서 조금 지루했거든. 이번 전시도 20세기 현대 미술이라서(Twentieth Century British, European & American Art)."

-114 편 내용중. 바버라가 유진과 만나고 혹은 연락하고 있음이 언급되어있지용 ^^ 헤어졌다는 기사가 오보인줄 알았대자나용. 그리고 갤러리 전시 주제가 미국 현대 미술. 유진의 전문 분야랍니다 ^^ (작가의 친절 돋는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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