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17화 (117/214)

117

라희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안겨있는 그의 품은 안락하다. 실내라 겉옷을 벗고 있어 얇은 긴 팔 티셔츠를 걸친 등이 그의 가슴에 맞닿아있다.

어두운 사위에 감각이 선명히 살아났다. 이내, 라희의 귓가에 얕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의 숨결이 귓바퀴 위를 약하게 간질이는 것이 느껴지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다. 긴장으로 몸이 바싹 탔다.

그와 옷을 사이에 두고 닿아있는 살갗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그의 호흡이 느껴진다.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그에게 안겨있는 등도 그의 호흡과 함께 조금씩 움직였다.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 그의 팔과 맞닿은 배 부분이 잔뜩 예민해진다.

눈을 감고 있는 가운데, 밀도 있게 주위에 내려앉은 그의 그윽한 체향이 바로 피부 위로 스민다. 티비 소리로 웅웅대는 공기를 타고 그가 만들어 내는 미세한 소리와 진동이 느껴진다. 얕은 호흡, 등 뒤에서 두근거리며 느껴지는 심장박동, 허리를 감싼 팔의 미세한 떨림. 대기를 타고 흐르는 그의 향기, 그의 심장 소리와 함께 뛰고 있는 몸 안의 떨림. 잔뜩 일어선 솜털들. 살갗을 타고 스치는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

몸과 몸이 직접 닿은 것도 아니다. 옷을 사이에 두고서 느껴지는 그의 기운. 따스한 체온은 묵직하게 허리를 감싸 누르고 있었다. 두근거림을 감추느라 호흡이 억눌러지면서, 혈관이 좁게 수축되고 몸이 미미하게 떨린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더 감각이 집중되었는지도 모른다.

라희는 눈을 떴다. 탁 트인 런던의 야경이 눈 앞에 보인다. 라희는 숨을 천천히 내쉬고 다시 들이마셨다. 앞의 야경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점점 출렁이는 마음속 떨림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가슴 한가운데 작은 나비라도 들어앉았는지 작은 날갯짓처럼 두근두근 잘게 떨렸다.

이 넓고 전망 좋은 호텔 스위트 룸에서, 그와 단둘이 몸을 대고 있으려니 숨이 쉬기 힘들고 모든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음속이 간질간질했다. 작은 떨림은 온통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잔뜩 굳은 목 아래로 열기가 차오르고 속이 울렁거린다.

그에게 감싸 안겨있는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접촉은 라희의 겉과 속 모두를 흔들어 놓았다.

라희는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바로 앞, 런던의 야경이 너울지는 전면 창에 비친 방안이 보인다. 호화로운 넓은 거실에 서 있는 두 남녀. 뒤에서 껴안고 있는 그와, 그 품에 포옥 안겨있는 여자.

이내, 정수리 위에 턱을 가볍게 대고 있던 그가 창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창문 어딘가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단단한 팔 안에 갇힌 라희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아 죄는 팔의 힘이 느껴졌다. 벗어날 수 없게 꽉 옭아매는 느낌. 서서히 차오르던 열기는, 순간 그의 움직임으로 거세게 불어왔다.

"..........."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열기 때문에 뜨거운 숨이 막혀와서, 움직일 수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늘 그렇듯, 가만히 창문에 비친 라희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쪽, 잔뜩 굳은 정수리 위에 짧은 입맞춤 소리가 나고 양팔로 감싼 허리가 갑자기 스르르륵 풀렸다.

라희가 몸을 돌려 뒤를 보니, 그가 소파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소파 테이블 옆에는 낯선 쇼핑백이 놓여있었다. 카키색 쇼핑백의 가운데는 Harrods라고 쓰여있는 글자가 보였다. 바흐는 테이블 옆 바닥에 놓인 쇼핑백을 들고서 안을 들여다보더니 조금 놀란 듯 고개를 작게 갸웃했다.

".......왜 그래요?"

라희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묻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제임스가 쓸데없는 것을 넣어 두었군."

"뭔데요?"

호기심을 느낀 라희는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흐는 미간을 희미하게 좁히더니, 쇼핑백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담뱃갑 절반 크기의 작은 종이상자였다. 온통 영국의 국기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바흐는 그것을 소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 눈을 지그시 감고 미간을 찡그리며 짧은 한숨을 흘렸다.

"으음..."

갑작스러운 두통이라도 생긴 걸까? 옆에서 지켜보던 라희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종이상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대체 뭐기에?'

어쩐지, 조금 꺼려지는 모양새였지만 작은 호기심을 느낀 라희는 손을 뻗어 영국 국기로 덮인 작은 종이 상자를 손에 들었다. 약간 가벼웠지만, 무게는 있었다.

라희는 안에 가벼운 물건이 들어있음에 틀림없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개봉했다. 종이 커버를 열자마자, I ♡ London이라고 프린트된 검정색, 핑크색, 하얀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의 비닐 포장이 겹겹이 쌓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네모난 비닐 가운데 도톰하게 둥근 원형 모양이 도드라진 형태를 보고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콘돔.

물건의 정체를 알아낸 라희가 깜짝 놀라 하며 급히 상자를 닫자, 뭔가가 낙엽처럼 바닥에 휙 떨어졌다. 작은 포스트잇. 상자에 붙어있다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Safety first ! (안전이 최우선이지!)바닥의 노란색 포스트잇에는 멋들어진 필기체가 우아하게 적혀있었다. 라희는 뜻을 해석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소파 테이블에 선물이 있으니까 신경 쓰도록!

조금 전, 제임스가 방을 나가기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아이 러브 런던이라 적힌 콘돔이 제임스의 짓궂은 새해 선물이었나 보다. 난감한 표정이 된 라희가 소파 테이블 위에 도로 콘돔 상자를 올려놓았다.

조금 전, 왜 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렸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라희도 어쩐지 뒤통수를 찔러오는 옅은 두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잔뜩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서 있는데,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바흐는 카키색 헤러즈 쇼핑백 안에서, 역시나 같은 녹색 바탕에 Harrods 라는 글씨가 잘게 프린트된 포장지로 감싼 사각 케이스를 꺼내 라희에게 내밀었다. 크기는 조금 큰 선물용 초콜릿이나, 와인 케이스? 그만한 물건이 들어있으리라 짐작되는 크기의 상자였다.

"뭐에요?"

"새해 선물."

방금 제임스가 남긴 새해 선물은 콘돔이다. 라희는 내밀어 진 상자를 받지 않고 가만 보고 있다가 눈을 들어 바흐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라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엘리자베스에게 부탁했어. 이상한 거 아니니까."

엘리자베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낮에 방문한 바이 어포인트먼트에서 마지막으로 코트를 계산했을 때, 엘리자베스가 사브리나에게 '그것'도 같이 계산해 달라고 부탁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럼 이것이 의문의 '그것'?

사각 상자는 손으로 받아드니 제법 무거웠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라희는 카키색 종이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안에는 검은색 딱딱한 나무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뚜껑 위쪽 정중앙에 금색 글씨로 Harrods라고 쓰여있는 모양이 보였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정색 케이스의 겉면은 단정한 모양에고 광이 반질반질 나는 것이, 딱 선물용 와인이나 초콜릿, 혹은 시가(cigar) 상자처럼 생겼다. 추측되는 셋 모두 라희가 좋아하는 품목은 아니었다.

"열어봐."

그의 말에, 라희는 상자 앞쪽 측면에 달린 버튼을 손가락 끝으로 눌렀다. 달깍,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상자가 조금 열렸다. 위 뚜껑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맨 처음 보이는 것은 검은색 상자 뚜껑 안쪽의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황금색 카드였다. Card of Authenticity, HARRODS TECHNOLOGY라고 적혀있었다.

'품질 보증서?'

라희는 눈을 아래로 미끄러뜨리다가, 깜짝 놀라 순간 눈을 의심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정말 뜻밖에도, 황금색 아이폰이었다. 불과 반나절 전에 엘리자베스와 헤러즈 백화점에서 구경하던 것이다. 투명한 유리케이스 안에 고이 전시된 24K 금칠 된 아이폰. 새것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얇은 투명한 비닐이 덮인 아이폰의 뒤 커버는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이었고, 가운데 애플 마크에는 자잘한 크리스탈이 박혀있었다. 카메라가 달린 맨 윗단과 맨 아랫단 역시 크리스탈로 촘촘히 도배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어떻게.."

라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고정한 채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아이폰을 멍하니 보고 있자, 바흐가 만족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적어도 이런 폰을 쓰고 있으면 쉽게 강물에 몸을 던질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케이스 안에 놓여있던 금빛 아이폰을 꺼내 들어 망연히 서 있는 라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잘 써."

손바닥에 차갑고 묵직한 황금빛 아이폰의 감촉이 느껴졌다. 라희는 눈을 내려 손안에 쥐어진 아이폰을 가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앞에 서 있는 그는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

라희는 다시 눈을 내려 손안에 든 황금빛 24K 아이폰을 응시했다. 이내, 헤러즈에서 이와 모양이 비슷한 아이폰을 사가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돈 많아 보이는 중동인이었다.

중동인? 거기까지 떠올리자 아주 자연스럽게도, 바이 어포인트 입구 앞에서 경호원과 눈싸움을 하며 버티고 서 있던 늘씬한 금발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도 중동인과 사귀었다고 했지, 모델이라고 들었다. 상대 남자 이름이 라시드였나? 어쨌든, 젊고 잘 생긴 스타일리쉬한 부자.

엘리자베스 말로는 라시드라는 남자가 양다리라고 했었다. 양다리라. 동시에 두 명의 상대를 만날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라희의 눈이 좁혀지며 바흐를 향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바흐도 그랬다. 비록 친절하게도, 계약에 앞서 먼저 이유진의 존재를 알려주긴 했지만, 그녀과 만나는 상태에서, 당당하게도 라희에게 돈을 건넸었다. 그리고 바로 호텔로 직행했었다.

화륵, 바흐와 함께했던 첫 사흘을 떠올린 라희의 두 뺨에 열기가 몰렸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구어졌다. 라희는 계속 생각했다.

조금 특이한 점은, 유진도 라희의 존재를 이미 알고는 있었다. 뿔테의 형수 생일 날 친히 오피스텔까지 왕림해서 얼굴을 마주 보기까지 했으니까. 그래서, 그 뒤 그렇게 1억을 건네받았고.

지금은 바흐와 이유진이 결별했다고 들었다. 그건, 사실일까? 라희가 알고 있는 내용은 윌버리 하우스에서 소피가 신문기사를 검색해서 스치듯 알려준 것이 전부였다. 라희는 이내 미간을 좁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진이 순순히 녹취 파일이 들어있는 휴대폰을 건넸을 리 없으니까.

라희는 다시 눈을 들어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깊고 짙은 검은 눈동자, 남자답게 높고 오뚝한 코, 단정한 입술. 키 크고 잘생겼다. 그리고 의심할 필요도 없는 엄청난 자산가.

라희와는 생활 반경도 생활 수준도 생활 양식도 다르다. 라희는 팝 음악이나 가요를 좋아하는데, 그는 이름도 낯선 클래식을 듣는다. 라희는 바이올린을 아주 조금 그것도 음계나 겨우 잡고 간신히 외운 곡만 켤 수 있을 뿐이지만, 그는 당장에라도 연주회장을 대여해 개인 독주회를 열어도 될 만큼 피아노와 하프시코드에 능했다. 대학도 다르고, 사는 동네도, 만나는 사람들조차 전부 다르다. 그와는 공통점이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식성마저 다르다.

여기 와서 깨우친 영국식으로 표현하자면, 계층이 다르고 계급이 다르다. 라희에게 있어서 바흐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인종이지만, 엄연히 다른 이질적인 외국인 같은 존재. 유일한 공통점은, 글쎄.......

서로의 육체를 너무도 잘 안다는 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몸이 끌리고 있다.

라희는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오랜 연인인 유진이 있음에도 태연히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유진의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만약 라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언제까지라는 보장은 없었다. 천하의 엘리트 미녀 이유진도 고작 육체가 끌리는 어린 여자에게 자리를 빼앗겼으니까. 만약, 그에게 정말로 빠지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다.

-만나다 갑자기 결별 당하면 상처는 피멍으로 남겠죠.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었어야 하지 않나요? 파티광인 돈 많고 멋진 남자들의 행동 패턴이란 뻔하죠.

엘리자베스가 한 말이 뇌리를 떠다녔다.

-그리고 대부분 지조 없이 양다리죠. 제대로 된 이별 통보도 없구요. 한참 빠져 있다가 저렇게 뒤통수 맞으면 기분 나쁠 거 같긴 해요.

만약, 바흐에게 앞으로 또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결국, 바이 어포인트먼트 앞에 연인의 변심에 침묵으로 시위하며 서 있던 그 늘씬한 금발 모델 같은 신세가 되는 거겠지.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이유진도 끝내 피하지 못했던, 예정된 파국(破局).

어디까지일까. 아니, 언제까지 지속될까. 일주일? 한 달? 반 년? 아니면, 그가 처음 돈을 건넸을 때 시한으로 제시했던 일 년?

길어 봐야, 최장 일 년일까.

그가 보일 흥미의 지속기간, 그리고 육체적인 끌림의 허용 기한.

라희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서 있는 길고 단단하며 건장한 젊은 육체.

라희는 저 몸을 잘 알았다. 맞닿으면 얼마나 뜨거울지, 정신이 아득해질만큼 황홀할지, 끝없이 취하고 싶을 만큼 감미로울지도.

'......거부, 할 수 있을까?'

이제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2억이 마음속에 따끔한 가시처럼 걸리긴 했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 객관적으로는 2억이 키스 값이라던 그의 구두 언급도 있었고, 옥죄는 법적 계약서도 없으니 두 사람은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깨끗한 관계였다.

거부하려면 얼마든지, 거부해도 된다. 하지만, 그를 밀어낸다고 해도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며 다가오겠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명백하게 육체적으로 이끌리고 있으니까.

눈앞에 마주하고 서 있는 바흐는 언제나 그렇듯, 조용했고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서로 내밀한 대화는 커녕 일상적인 대화조차 없는 관계다.

오로지 육체적인 끌림? 아마, 그게 전부가 아닐까.

라희는 가만 그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흥미로운 눈초리가 라희를 향했다. 짙고 새카만 눈동자는 이채를 띄고 있었다. 라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뒤에 놓인 소파로 이끌었다. 그는 넓은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의 앞에 선 라희는 곧고 짙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라리 나았다. 감정이 너덜거려 추저분한 것보다야.

단순하고 명료한 이유.

몸이 원한다.

시선을 마주하고서, 그의 앞에 서 있던 라희는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가는 팔을 뻗어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양손을 짚고서, 눈을 내리깔아 가만히 그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서서히 고개를 비틀어 아래로 내렸다.

".....!"

단정한 입술 위에 뜨겁게 벌어진 작은 입술이 와 닿자, 이내 벌어졌다. 따스하고 촉촉한 속살이 느껴졌다. 라희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깊이 맞물렸다. 뜨겁게 서로를 빨아들이던 입술은 얼마 되지 않아 곧 떨어졌다.

"....?"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라희를 올려다보았다. 라희는 그를 향해 유혹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마음을 정했다. 달콤한 육체의 맛을 알아버린 이상,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 어차피, 그는 다른 세계 사람. 잠시 혼미하게 정신을 빼앗기는 화려한 놀이동산에 놀러 왔다 치고 흠뻑 빠져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젊음과 무모함이라는 비루한 핑계 뒤에 숨어서.

다시 고개가 그를 향해 기울어졌다. 작고 좁은 턱이 그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작은 입술 틈으로 내밀어 진 분홍빛 촉촉한 혀가 뾰족하게 끝을 세웠다. 이내, 단정한 입매를 혀끝으로 덧그리듯 핥아 냈다. 그러다 새하얀 앞니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당겨서 혀끝으로 날름 간질였다.

잇새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 혀끝에 닿는 따스한 속살. 뜨거운 욕망의 맛. 달콤하고, 맛있다.

라희는 그의 입술을 입안으로 가득 삼켰다. 물컹거리는 살덩이를 정신없이 빨아내자, 이내, 말캉거리는 뜨거운 감촉이 입안 가득 느껴지며 그의 혀가 파고들어 와 작은 혀와 질척이며 엉켜 들어갔다.

맞물린 입술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숨결이 얼굴 위를 뜨겁게 스친다. 열기로 가득한 입안. 입술과 입술이 깊게 맞물리고 혀와 혀가 찰박이며 매끈하게 얽히고설킨다. 말캉하고 미끌거리는 혀를 서로 쓸어내리고 쓸어올리면서 뿌리까지 핥고 빨고 또 빨아들였다. 진한 베르가못 향의 타액이 목구멍으로 흘러들고 달콤한 흥분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 응..."

기분 좋은 신음이 새어나온다. 혀끝이 서로를 탐할 때마다 짜릿짜릿한 감각이 피어나 척추 끝이 저릿해 온다.

그가 팔을 앞으로 길게 뻗어 순식간에 라희의 가는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천천히 허리선을 매만지던 커다란 손은 뒤쪽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에 닿았다. 그는 둥근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엉덩이를 감싼 바지의 천 아래로, 서서히 움직이는 단단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동그란 엉덩이 사이 골에 단단한 손가락이 닿자,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아, 응.."

라희가 야릇한 느낌에 몸을 뒤틀자, 엉덩이를 떠난 손길은 이내 앞으로 이동해 바지의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툭, 바지 단추가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농밀하고 뜨겁게 키스하는 사이, 라희의 바지는 속옷과 함께 발목에 스륵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