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15화 (115/214)

115

"런던은 쇼핑의 천국이다 (London is a shopper's paradise.)라는 말이있어요.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죠. 왜냐하면, 헤러즈(Harrods)가 있으니까요."

엘리자베스가 창밖을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고풍스러운 7층짜리 베이지색 석조건물아래, 녹색의 둥근 차양이 마치 구명보트처럼 부풀어 수십 개가 드리워져 있고 그 가운데 선명한 황금색으로 헤러즈(Harrods)라고 쓰여있었다.

"더 신나는 건 뭔 줄 알아요?"

엘리자베스는 연한 크림색 에르메스 클러치 안으로 긴 손가락을 넣어 매끄러운 광택이 은은한 검은색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바탕 윗부분에 은색의 볼드체 글씨로 AMERICAN EXPRESS라고 선명히 박힌, 라희에게도 익숙한 바흐의 카드다.

"이렇게. 백지 수표를 들고 쇼핑하는 거에요!"

그녀는 은빛 티타늄 카드의 모서리에 붉은색 립스틱이 매트하게 발린 입술 끝을 맞추었다. 백지수표라, 맞는 말이었다. 아멕스는 정해진 카드 한도가 없으니까. 고가의 수퍼카, 요트, 집, 심지어 제트기나 헬리콥터, 탱크까지도 신용카드로 결제만 할 수 있다면 일시불이든 할부든 그 즉시 살 수 있다.

"전 정말 센츄리온(Centurion: 아멕스 블랙의 공식 이름이) 좋아요. 우리 잘 어울리죠?"

엘리자베스는 검은 카드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얼굴 옆에 세워 들었다. 하얀 얼굴,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금발의 엘리자베스와 손가락 사이의 검은색 아멕스 블랙은 정말 잘 어울렸다. 마치 바비인형의 필수품처럼 보여서,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피 어올렸다.

"라일라에게 코트 빌려주기를 잘 한 거 같아요. 찰나의 선택이 정말 탁월했다니까요."

엘리자베스는 손에든 아멕스 블랙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미소 지었다.

"아무 코트나 2벌 사라고 하다니! 그것도 헤러즈 에서! 얼마나 관대한지! 데이빗 오빠가 주는 신년 선물인가 봐요."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발랄한 모습으로 한참이나 블랙 카드를 들여다보며 정말로 즐거운 모양으로 깔깔거렸다. 라희는 그 모습을 보며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어젯밤에 손님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자마자 저항할 수 없는 졸음이 마구마구 쏟아져내렸다. 아무래도 식사 내내 마신 샴페인과 와인의 취기 때문인듯싶었다. 씻는것도 잊은 채로 라희는 그대로 킹사이즈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언뜻 잠결에 문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몇 번 듣긴 했는데 몸이 질척이는 진흙 늪에 잠긴 것처럼 무거워서 눈꺼풀 하나 들어 올릴 힘이 없어서 그냥 무시했다.

깊은 잠이 들어 정신없이 쿨쿨 자고 겨우 눈을 떴더니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변덕스러운 런던 날씨답게, 어제 비가 쏟아붓던 것과 다르게 오늘은 정말로 쨍하니 화창했다. 침대 위에 따가운 햇살이 비추어 도저히 계속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겨우 눈 뜨고 일어나 대충 씻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1층으로 내려가던 도중 계단에서 위로 올라오던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여느 때처럼 차려입은 채였다. 엘리자베스는 라희를 발견하고서 굉장히 신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안 검은색 카드를 보여주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라일라! 지금 일어나셨네요. 얼른 식사하고 우리 나가요!"

"네? 어디로요?

"당연, 헤러즈 백화점이지요!"

"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목소리를 높인 라희를 향해 엘리자베스는 빠른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데이빗이 제임스에게 붙들려 서재로 끌려가기 전에 엘리자베스를 불러 카드를 건넸다고 했다. 어제 빌려준 코트를 망친 보상이라면서, 꼭 라일라와 함께 가라고 덧붙였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이제나저제나 라희가 방에서 나오길 기다렸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엘리자베스의 재촉으로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대충 마치고, 서재로 향했다. 햇살이 투명하게 비추는 창가에 앉은 바흐와 제임스는 체스판을 가운데 두고 체스에 열중해 있었다.

"흐음.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폰을 움직여야겠군."

제임스는 아이보릿빛 상아로 만든 체스 말을 손에 들고 한 칸, 대각선 앞으로 움직였다.

"자네 차례야. 어떻게 하나 볼까."

막 체스 말을 움직이려던 바흐가 문득 고개를 들어 분 앞에 서 있는 라희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제임스가 단호하게 말하며 저지했다.

"10판. 이제 2판째니 8판 남았네. 중간에 그만두기 없기로 약속했지 않은가. 자, 계속하게."

"........"

상당히 짜증이난 표정의 바흐는 엉거주춤 일어나려다 다시 앉으며 라희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다시 체스판을 들여다보았다.

"이번 판은 내가 이길 참이거든, 분발하게나."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라희 옆으로 다가온 엘리자베스가 연말이라 헤러즈가 말도 못하게 붐빌거라며 어서 나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엘리자베스의 뜻대로 함께 자가용을 타고 헤러즈로 가는 중이었다. 타고 있던 차가 스르르 Harrods 라고 적힌 기둥옆 문 앞에 정지하자, 엘리자베스는 손에 들고 있던 아멕스 블랙을 다시 클러치백에 집어넣었다.

"어서 오십시오. 헤러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팔머양."

금색 단추 달린 카키색의 롱코드에 H 방패 모양 로고가 박힌 카키색 모자,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단정히 맨 노신사 두 명이 가까이 나와서 정중히 인사하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우아하게 팬텀에서 내렸다. 라희도 뒤따라 내렸다.

헤러즈 백화점 문 앞에 서자, 고풍스러운 외관과 건물 가운데 돔형 지붕 때문에 백화점이 아니라 마치 영국의 고궁이나 박물관같아 보였다. 연말이라 잔뜩 들뜬 사람들이 번잡하게 지나다니는 지하철과 버스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도어맨이 지키고 서서 고급 차들이 지나다니는 한적한 입구와 그 위 줄줄이 게양된 영국 국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입구만 10개에 달한다는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백화점의 거대한 모습이 라희에게는 굉장히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나이츠브리지(Knightsbridge)역과 인접한 헤러즈 백화점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지나쳐 본 적은 있어도 실제 방문은 처음이었다. 라희에게는 방문할 동기가 없었다. 세계 최고급품만을 취급한다고 자랑하는 이곳에서 뭔가를 살 것도 아니었고, 살만한 돈도 없다 생각했으니까.

도피하듯 영국에 도망와서 숨죽이는 주제에 세계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에 갈 이유가 없었다. 이런 사치스러운 곳 대신 우리나라 다이소나 천 냥 마트 같은 파운드랜드(Poundland)는 칫솔이나 바스 타월같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자주 들렀었다.

"자, 어서 가요! 라일라."

엘리자베스는 멍하니 서 있던 라희에게 손짓하며 도어맨이 얼어주는 문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높은 스틸레토 힐을 또각거리며 보석들이 전시된 매장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헤러즈의 GF 내부는 국내 백화점처럼 시야가 탁 트여 매장 안이 전체적으로 들여다보이는 구조가 아닌, 미로 식으로 룸 마다 꾸며져 있어 각 매장을 지나야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1층으로 가기 전에 좀 둘러보다 갈까요. 어디를 가보고 싶어요?"

엘리자베스가 상냥하게 물었다. 라희가 헤러즈를 처음 방문했다는 사실을 배려한 듯 보였다. 영국은 1층을 GF(Ground Floor)라고 부르고 2층부터 층수로 불렀다. 그러니 1F라고 하면 실지 2층이었다.

"음."

라희는 이집트 신전같이 꾸민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미궁 같은 거대 백화점 안에서 어디를 가야 하지? 일단 필요한 것은, 코트를 쇼핑하러 온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겉에 걸칠 아우터였다. 오늘은 코트가 아닌, 여행가방 안에 들어있던 얇은 후드 집업을 걸치고 나왔으니까. 어차피, 엘리자베스를 따라 코트 쇼핑을 할 거였기에 그 밖에는... 아, 생각났다.

"휴대폰이 필요하긴 해요."

윌버리 하우스 강물에 빠진 휴대폰은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시커먼 액정 화면은 흉하게 얼룩져서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라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상냥하게 웃었다.

"테크놀로지가 위치한 3F(실제 층수는 4층)로 가봐야겠군요. 헤러즈의 테크놀러지 디파트먼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답니다."

전자기기 파는 데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니?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가? 하지만, 크기로 치면 백화점이 아닌 전자기기 전문 판매점이 훨씬 더 클 거였다. 3F에 도착하자, 라희는 바로 엘리자베스가 한 말의 의미를 눈으로 보고 즉각 알 수 있었다.

탁 트인 넓은 층 안에 각종 전자기기 회사의 제품들이 고급스럽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스플레이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 있는 동안 해외 토픽을 다루는 뉴스에서 접했었고 실제로 보고 만져보았던 번쩍번쩍한 황금빛 금칠된 아이폰들은 이곳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전체 케이스를 24K 금으로 만든 아이폰 뿐만 아니라, 작은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어 휴대폰인지, 보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눈부신 전자기기들이 고급스러운 유리케이스 안에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눈이 돌아갈만큼 비쌌다. 금칠된 아이폰은 커스터마이즈드 (Customised IPHONE)라고 불렸는데 3300파운드(600만원)부터 시작되었다.

번쩍이는 다이아몬드 아이폰은 한정판으로 세계에서 5개에서 10개 정도 밖에 없다고 쓰여있었는데 36000파운드(6천2백만원)부터 68000파운드, 그리고 가장 비싼 75000파운드까지로 대체 이런건 누가 사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곳에 방문한 관광객과 쇼핑객들에게도 정말 신기하고 진기한 풍경인지, 사람들이 유리케이스 안을 들여다보며 감탄하는 가운데, 한 중동풍의 남자가 금칠된 아이폰을 꺼내 손에 들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중을 드는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주로 저쪽 사람들이 선호한다더군요."

라희의 시선을 살피던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두바이 버즈 알 아랍 스위트에 머물면 저런 아이폰과 패드를 투숙기간 동안 제공해주니까. 금으로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만들고 스왈로브스키 크리스탈로 만든 전자기기 전시대를 지나자, 한쪽 구석 평범한 모양의 휴대폰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격은, 최신 Iphone 6가 539 파운드. 한국 돈으로 100만원 가까이 되는 고액이라 당장 라희가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휴대폰은 당분간 포기하고 최신 폰이 아닌 중고 폰을 사서 통화만 하며 쓰거나, 국내에서 휴대폰 약정을 끼고 구매를 해야 할 듯 싶었다. 라희가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가 손에 든 에르메스 클러치를 들어 올리며 미묘한 미소로 물었다.

"확, 긁어버릴래요? 데이빗 오빠는 신경 쓰지 않을 텐데."

그의 카드로? 아니. 그러긴 싫었다. 그가 카드를 건넨 목적은 엘리자베스에게 코트를 사라는 거 였으니까.

"아니요. 휴대폰 전문 판매점에서 사거나, 나중에 귀국해서 사야 할 거 같아요."

라희가 고개를 젓자, 엘리자베스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는 라희의 팔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갈래요? 우리 저녁에 먹을 간식 사러 갈까요? 저는 여기 케이크 진짜 좋아하거든요. 초콜릿이랑. 아, 맞다 마카롱 좋아한다고 했었죠. GF의 라뒤레(Laduree)도 맛있지만, 헤러즈 것도 먹을만하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이끌려 내려간 지하 식품 매장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는 곳이었다. 와인, 커피, 홍차, 치즈, 초콜릿 등의 기호식품은 물론이고 각종 색색의 아름다운 모양의 컵케이크, 금칠한 조각케이크, 다채로운 마카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빵, 토핑이 듬뿍 든 타르트, 예쁜 파이등의 베이커리 류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엘리자베스는 베이커리 류에서 앙증맞은 컵케이크와 마카롱 등 이것저것을 주문해 포장시키고는 바이 어포인트먼트(By Appointment)로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자, 우리 이제 오늘 여기에 온 소기의 미션을 수행하러 1F로 가요."

1F(First Floor:2층)는 여성복(Womenswear)매장으로 온통 고급스러운 명품이었다. 버버리, 에르메스, 루이비통, 스텔라 맥카트니등의 매장은 명품 특유의 고고한 디스플레이로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언제나 차려입은 엘리자베스와 달리, 후줄근한 후드 집업 차림으로 감히 이런 곳을 지나가도 되나 잔뜩 주눅 들어 위축될 만큼 이질감 넘치는 곳이었다.

코트를 사러 왔다던 엘리자베스는 매장안 즐비한 브랜드 샵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대로 그냥 지나쳐 우아한 자세로 1층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막힌 코너에 다다르자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엘리자베스와 보폭을 맞춰 걷던 라희도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나무의 우드 프레임으로 장식된 입구가 보였다. 그 안으로 BY APPOINTMENT라고 쓰인 글자 밑에 Harrods라는 필기체와, 아주 작은 글씨로 PERSONAL SHOPPING이라 적혀있는 하얀 벽과 그 옆으로 둥근 입구가 보였다.

매장을 보자마자, 라희는 바로 여기가 어디인 줄 알 수 있었다. 아까 식품 매장에서 엘리자베스가 말한 바이 어포인트먼트.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국내에서 바흐를 따라 들어간 L백화점 A관 내부에도 이런 비슷한 곳이 있었다. 퍼스널 쇼핑매장. 아마 L백화점에서 이곳을 따라 만들었겠지 싶었다.

그런데 바이 어포인트먼트 앞에 엘리자베스가 멈춰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입구 앞에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늘씬한 금발 여자가 팔을 가느다란 허리 위에 짚고서 입구를 노려보며 서 있고 그 맞은편 백화점 경호요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정장 입은 남자 세 명이 그녀를 막는 듯이 서서 서로 팽팽한 대치 중이었다.

"어, 음."

엘리자베스가 기척을 냈음에도, 앞을 막고 있는 금발의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경호원에게 눈짓하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경호원들 중 한 명이 표정을 풀고 바라보았다.

"펜트하우스(The Penthouse:5층에 위치한 공용 퍼스널 쇼핑)로 가야 하나요?"

엘리자베스가 묻자, 경호원 한명이 자세를 풀고 눈짓하며 짧게 말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그가 터주는 공간으로 엘리자베스가 사뿐 발걸음을 옮겼고, 라희도 어색하게 뒤따랐다. 바이 어포이트먼트 내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하얀 고급스러운 공간에 안내 데스크가 있고 그 옆으로 안락한 소파가 놓여있었다.

고급스러운 소파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몇 앉아 있었는데 다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잡지를 읽고 있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엘리자베스를 알아본 직원이 데스크에서 걸어나 오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팔머양. 안으로 드시지요."

이어서 뒤따르는 직원의 안내로 안쪽 복도로 향했다. 복도 안쪽에는 6개의 방문이 보였는데 상품과 옷을 든 직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연말이라 바쁘군요. 그런데, 입구에 있던 사람은 알릭시아, 맞나요? 모델."

엘리자베스가 은밀한 말투로 물었다.

"예. 맞습니다."

"흐응. 라시드 씨가 새 여자친구와 여길 왔나 보네요."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직원은 대답 대신 활짝 웃으며 닫힌 방문 하나를 열었다.

환한 창문을 미색의 커튼으로 커버해 놓은 방안은, 전면이 유리인 탈의실과 디스플레이 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디스플레이 룸의 천정에는 금사를 늘어뜨린 것 같은 샹들리에와 그 아래 안락한 3인용 소파가 놓여있었고, 소파 옆으로 금칠한 둥근 협탁 두개 그리고 앞에는 유리로 된 소파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자, 직원이 정중히 물었다.

"샴페인으로 드릴까요?"

"아니요. 삼페인은 저녁에도 마실 거라, 그냥 가벼운 허브 티로 주세요."

직원이 라희를 바라보자 라희도 같은 거로 달라고 말했다. 정중히 고개를 까닥인 직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브리나가 곧 들어올 겁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럼."

직원이 나가고, 방안에 단둘이 남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문 쪽에 힐끔 시선을 던지다가 거두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쪽 방 어딘가에 라시드 씨가 왔나 봐요."

"라시드 씨요?"

"라시드 알 무르. 아랍 왕족인데, 미남에다가 젊고 스타일리쉬해서 요즘 런던에서 인기 상한가거든요. 얼마 전 모델 알릭시아와 사귄다고 들었는데, 그새 갈아치운 모양이에요. 만나다 갑자기 결별 당하면 상처는 피멍으로 남겠죠.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었어야 하지 않나요? 파티광인 돈 많고 멋진 남자들의 행동 패턴이란 뻔하죠."

"아.."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까 입구 앞을 지키고 있던 여자는 남자친구의 변심을 항의하는 의미로 시위하고 있는 거였다.

"이번에도 금발의 모델이려나. 그런 남자들의 취향은 묘하게 일관성 있다니까요. 디카프리오를 봐도요."

엘리자베스가 궁금한 눈초리로 방문을 힐끗거렸다. 라희는 디카프리오라는 말이 나오자 피식 웃었다.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는 정말 일관된 여성 취향으로 유명하다. 알려진 십여 명의 여친들 모두 하나같이 예쁘고 늘씬한 금발의 모델이었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지조 없이 양다리죠. 제대로 된 이별 통보도 없구요. 한참 빠져 있다가 저렇게 뒤통수 맞으면 기분 나쁠 거 같긴 해요."

엘리자베스는 알릭시아를 동정하듯 말했다. 이어서 일방적으로 결별 당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방문이 열리고 하얀 정장 원피스를 입은 통통한 체격의 여자와 그 뒤를 수행하는 서너 명의 직원들이 각양각색의 코트가 가득 걸려있는 행거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맨 뒤에 뒤따라 들어온 직원이 은쟁반에 담긴 예쁜 홍차 잔을 소파 테이블 위에 차례로 내려 놓았다. 찻잔에 절반가량 찬 따뜻한 허브 티가 상쾌한 향을 피워올려 기분을 산뜻하게 해 주었다.

"사브리나."

엘리자베스가 하얀 옷을 입은 직원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브리나가 엘리자베스를 포옹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이 주만인가요?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팔머 양."

"으응. 오빠와 본가에 들렀다 오느라고요. 런던에 어제 도착했거든요."

사브리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엘리자베스는 궁금한 눈으로 라희 쪽을 바라보던 사브리나를 라희에게 소개시켰다.

"라일라, 이쪽은 내 퍼스널 샤퍼(personal shopper). 사브리나에요."

"사브리나, 여긴 라일라 송. 내 친구랍니다. 한국인이에요."

엘리자베스의 소개말이 끝나자, 사브리나는 놀랍게도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미스 송,"

"한국말 할 줄 아세요?"

라희가 놀라 하며 묻자, 그녀는 방긋 웃으며 다시 영어로 답했다.

"인사말 정도밖에 몰라요. 헤러즈에 오신 손님들의 국적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국의 인사말은 모두 외우고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라희가 짧게 말하자, 이내 미소 짓던 사브리나는 뒤로 돌아 직원들에게 눈짓했다. 직원들은 코트를 꺼내 들어 소파 앞쪽 창가에 드리워진 디스플레이 봉에 걸기 시작했다.

"음, 팔머양, 아침에 전화 주신 말씀을 듣고 최근에 인기몰이를 했던 겨울 코트 몇 벌을 가져와 보았는데요..."

사브리나는 뒤에 즐비하게 걸린 코트가 하나하나 앞쪽 디스플레이 공간에 전시되자,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옷감 재질과, 소재, 디자인의 특장점, 브랜드명과 디자이너 명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하나하나 상세하게 포커스를 맞춰서 설명했다. 엘리자베스는 마음에 드는 코트를 손짓으로 골라 즉석에서 입어보며 방 한쪽의 전면 거울에 이리저리 자신의 몸을 비춰보았다.

"어때요? 라일라. 이건요?"

엘리자베스가 라희를 향해 의견을 물었다. 심플하면서도 단아해 보이는 디자인으로 무난한 검은색 코트였다. 허브차를 마시고 있던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다른 코트도 입어보고 다시 의견을 물었다. 라희는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실제로, 늘씬하고 키가 큰 데다가 금발에 푸른 눈인 엘리자베스는 모든 옷이 잘 어울렸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라일라의 마음에도 드나요? 어때요? 입어보면?"

"오, 어서 입어보세요. 사이즈가 맞으실 거 같군요."

옆에 서 있던 사브리나도 권했다. 강권에 못이긴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가 입었던 코트를 차례로 걸쳤다. 모두 가볍고 따스하고 깔끔해 보여서 과연 명품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텍에 붙어있는 가격을 본 순간 얼굴이 굳었다. 가격은 모두 상상 이상이었다.

"예쁘네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빨리 코트를 벗어서 건네주자, 엘리자베스가 다시 하나씩 걸쳐 입고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이 코트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라일라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라희의 말은 들은 엘리자베스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비춰보고는 창가에 전시된 코트를 훑어보다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다 잘 어울리니 그것도 고민이에요. 이럴 때는.."

엘리자베스가 장난스럽게 눈빛을 빛냈다.

"가장 비싼 가격순으로 두 개 고르면 후회가 없겠죠."

"오우. 그것참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이로군요."

사브리나가 가볍게 맞장구치자, 엘리자베스는 자랑스럽게 클러치 안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사브리나에게 건넸다.

"이게 있으면 무적이거든요. 제일 비싼 코트와, 그 아랫것으로 계산해주세요. 각 두 벌씩이요."

사브리나가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자, 엘리자베스가 뭔가 생각난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 그리고 그것도요."

"그거, 아, 예. 알겠습니다."

라희는 가만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두 벌? 잘 못 들은 걸까? 라희의 표정을 힐끗 본 엘리자베스가 입매를 끌어올렸다.

"설마, 저 때문에 데이빗 오빠가 순순히 카드를 건넸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라일라."

놀라 하는 라희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말을 이었다.

"데이빗 오빠가 라일라 코트도 신경 써서 골라주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보다시피, 다 멋진 코트들이라서 그냥 가격순으로 고르는 편이 무난할 거 같았어요. 비싼 건 항상 비싼 값어치를 하거든요."

엘리자베스는 앉아있는 라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쁜 듯 외쳤다.

"이제 임무를 마쳤으니 당당히 귀환할까요. 오후니 곧 해가 지겠네요! 집으로 가서 모두를 데리고 샤드(The shard)로 가야겠는걸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자게 길군요. 두 개로 자를까 하다 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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