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14화 (11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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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건물들은 모두 켄싱턴 궁전(Kensington Palace) 주변에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살았고, 현재는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이 사는 소박한 궁전은 하이드파크와 켄싱턴 가든을 끼고 있는데, 이 궁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지역을 사우스 켄싱턴이라 불렀다. 각국의 대사관과 로얄 앨버트 홀, 과학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위치해있고 그 박물관들만큼이나 유서깊은 저택이 즐비한 퀸즈 게이트 거리 아래 팬든 백작가의 타운 하우스가 있었다.

"사우스 켄싱턴, P파크 하우스로 가주십시오."

그가 목적지를 말하자, 검은색 택시는 런던 아이에서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 버킹엄 궁전 주위를 지나 사우스 켄싱턴으로 향했다. 윌버리 하우스에서 런던으로 떠날 때 편의상 여행 가방과 짐을 팔머 남매에게 맡겼다. 택시 뒷자리에서 가녀린 어깨를 단단히 감싼안은 그를 향해 라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기댔다.

택시에 타기 전부터 달아오른 몸 안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기분 나쁜 떨림이 아닌, 뽀송한 솜사탕 같은 두근거림이었다. 라희가 고개를 슬며시 기대오자, 그도 고개를 그녀 위로 기울여 머리를 가볍게 맞댔다. 비에 차게 젖은 이마 위에 옅게 내려 앉아 살갗을 간질이는 그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비 오는 런던의 밤, 거리는 취기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물기에 흠뻑 젖어 온통 흐느적거렸다. 거리의 야경을 지나는 검은 택시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는 마치, 가슴속 심장이 뛰는 소리 같이 들렸다.

택시는 한참을 달려, 3-4층짜리 새하얀 저택이 즐비한 거리에 스르륵 멈췄다. 택시를 나와 하얀 건물과 기둥 사이, 고풍스러운 아치의 검은 창살이 드리워진 문 앞에 섰다. 작은 초인종을 누르니, 잠시 후 안쪽 정원에서 커다란 골프용 우산을 쓴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가 문을 여는 동안 라희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그와 함께 어디로 가든지, 무얼 하든지 간에 먼저 짐부터 찾아야 했다.

"오셨습니까. 미스터 한."

커다란 우산을 쓴 남자가 들고 있던 우산을 앞으로 기울여 두 사람을 향해 건넸다. 이내 남자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우산을 펼쳐 들었다. 바흐는 큰 우산을 받아들고 인사에 답했다.

"밀튼. 반갑네."

"손님을 동반하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미스 송이시지요? 저는 파크 하우스의 총 관리인 밀튼이라고 합니다. 두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밀튼은 라희를 보며 아는 체를 하다가 이내 손짓하며 앞장서 걸었다. 팔머가의 타운하우스 관리를 맡고 있는 밀튼을 따라 검은 대문을 지나 잔디가 넓게 깔린 정원을 걸었다. 조금 더 정원 안으로 깊숙이 진입하자, 아까 택시에서 내려 거리에서 보았던 새하얀 건물과 비슷한 닮은꼴의 3층짜리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비록 윌트셔 윌버리 하우스의 1/10도 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가장 비싼 노른자 위 땅 한가운데 이렇게 넓은 정원으로 둘러싸인 저택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파크 하우스라는 말이 괜히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넓은 잔디 정원과 숲으로 둘러싸인 주위를 둘러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더불어 택시 기사에게 상세한 주소를 불러줄 필요도 없는, 아주 유명한 저택이라는 것도.

아름드리 석조 기둥이 두 개 서 있는 현관문을 지나자, 하얀 대리석 바닥이 깔린 현관이 나타났다. 벽에는 마치 미술관처럼 관람용 조명 아래 고풍스러운 액자에 걸린 커다란 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낯선 집안에 들어선 라희가 주위를 둘러보며 두리번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단정한 정장을 입은 고용인들이 나타나 비에 젖은 두 사람에게 커다란 타월을 건넸다.

"지금 안에 먼저 온 손님이 계십니다. 미스터 한과 구면이시라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미스터, 미시즈..."

밀튼이 타월을 든 바흐를 향해 말했다. 라희도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현관에 서서 물기를 대충 닦았다. 집안의 공기는 훈훈하고 따뜻했지만, 걸치고 있는 코트며 옷은 비에 흠뻑 젖어서 축축했다. 되도록 빨리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로드윌과 따님인 케이틀린 양입니다. 밤이 늦어 곧 돌아가실 예정이십니다. 지금은 도련님과 아가씨와 함께 응접실에 계실 겁니다. 잠시 도련님이 계시는 응접실로 드시지요."

밀튼의 안내를 따라 라희는 바흐의 손에 이끌려 현관을 지나쳐 넓은 집안 로비를 지나 그 옆 길게 뻗어있는 복도로 향했다. 복도 바로 옆에 육중한 문 앞에 밀튼이 멈춰 섰다. 이내, 밀튼에 의해 금칠된 육중한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높은 천장, 우아하고 모던한 느낌의 샹들리에가 매달린 아래 화려한 금사 은사로 수 놓인 4인용 소파 두 개가 가운데 유리 테이블을 사이를 두고 마주 보고 놓여있고, 그 주변으로 사람 키만 한 고풍스러워 보이는 스탠드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는데 스탠드 곁에는 안락해 보이는 하이 암체어가 함께 놓여있었다. 한쪽 대리석 벽난로에는 타닥타닥, 불길이 낮게 타오르고 있었다.

탁 트인 앞은 윌버리 하우스 응접실 절반만 한 공간,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더 현대적인 파크 하우스의 응접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파에 가장 가까운 화려한 붉은색 하이 암체어에는 제임스가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편안하게 앉아있었고, 마주 보는 넓은 4인용 소파 중 한쪽 소파의 중앙에는 엘리자베스가, 맞은편에는 낯선 부부와 부모를 꼭 닮은 금발의 꼬마아가씨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좀 전 밀튼이 말한 로드윌부부와 그 딸인 케이틀린으로 보였다.

"오. 데이빗. 이제야 도착했군. 밖에 비가 많이 내리나 보지? 두 사람 다 흠뻑 젖었군."

바흐를 발견한 제임스가 아는 체를 하며 암체어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던 부부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흐와 라희를 향해 다가오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반갑네. 데이빗."

로드윌씨가 가까이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나이는 3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마르고 키 큰 로드윌 부인이 입가에 사교적인 미소를 가득 띄우고서 말을 건넸다.

"반가워요. 데이빗, 우리 이렇게 직접 보는 게 8년만인가요? 그런데....."

로드윌 부인은 바흐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라희를 발견하고서,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어색한 눈길이 마주쳤다. 단순 낯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웠고, 경계의 기색이 드리워진 차가운 푸른 눈이었다.

"반갑군요. 로버트, 그리고 바버라. 이쪽은 라일라 송입니다."

바흐가 라희를 소개시키자, 미시즈 로드윌, 바버라의 푸른 눈 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인사말을 건넸다.

"오우. 별말 없길래, 기사가 오보인 줄 알았는데요. 음,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 송."

조금 떨떠름해 보이는 말투였다. 타인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자, 라희는 한껏 들떴던 몸과 마음이 일순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시즈 로드윌."

비록 쫄딱 젖었고 기분도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라희는 초면의 격식에 맞춰 인사했다. 그때, 로드윌 부부 옆에 얌전히 서 있던 금발의 꼬마 아가씨가 하품하다 눈을 비비며 높은 목소리로 바버라를 불렀다.

"mummy, I'm sleepy. So sleepy. (엄마. 졸려요.)"

"오, 케이틀린. 아가. 곧 갈거란다."

바버라가 고개를 숙여 케이트를 다독이며 달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흐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을 건넸다.

"혹시, 이 꼬마 아가씨가 그때.."

"네, 맞아요. 임신 중이었을 때 보고 지금 처음 보는 거죠? 데이빗. 벌써, 7살 반이랍니다."

"예쁘군요."

바흐는 낮고 짧게 말하면서 케이틀린을 유심히 살폈다. 아이는 낯선 동양인이 자신을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엄마의 뒤로 몸을 잔뜩 웅크리며 숨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나갈 참이었네. 가기 전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어서 좋군."

약간 고지식해 보이는 푸른 눈의 로버트가 말했다.

"정말 두 사람 오랜만이겠군. 나의 절친한 친구 두 명이 한자리에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좋은걸. 데이빗, 자네가 막대한 부를 쌓아올리는 동안 로버트는 착실히 로드윌씨의 로펌을 거의 물려받았네. 비록 아버지 뒷배이긴 하지만, 벌써 런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라니 세월 참 빠르지? 로버트에게 우리 불쌍한 루퍼스 일을 맡길 참이야."

제임스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하자, 엄마 뒤에 숨어있던 케이틀린이 재차 칭얼거렸다. 보통 저만한 나잇대의 영국 아이들이 8시 이전에 잠이 드니, 지금은 케이틀린으로서는 정말 피곤하고 졸린 시간임이 틀림없었다.

"그래, 가자. 아가. 리즈?"

바버라는 딸을 달래며 뒤에 서 있던 엘리자베스를 애칭으로 불렀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사이인 듯 보였다.

"네? 바버라."

엘리자베스가 대답하자, 바버라는 자신에게 몸을 기대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빠르게 말했다.

"윌버리 전시회 건은 충분히 생각해보고 긍정적으로 답해주길 바란다고 전해드려. 알겠지?"

"그럴게요. 조만간 답을 들고서 브롬튼에 들를게요."

"새해 다음날부터 새로운 전시가 시작이니까, 그전에 오면 좋고. 아니면 당일이라도? 윌버리 하우스의 고풍스러운 소장품을 전시하면 로드윌 갤러리의 품격이 한층 더 고양될 거야. 이번 연도 야심 찬 상반기 프로젝트가 윌버리니까. 최근에 컨템포러리만 다뤄서 조금 지루했거든. 이번 전시도 20세기 현대 미술이라서(Twentieth Century British, European & American Art)."

"알았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어머니께 여쭤보고 곧 답해 드릴게요. 아마 바버라의 부탁이라면, 흔쾌히 허락하실 거에요."

"mummy.."

(엄마...)

아이가 참을 수 없이 졸린 지 옆에서 계속 칭얼거렸다. 로드윌 부부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며 서둘러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제까지 들은 대화 내용을 종합해 보면, 제임스의 절친 로드윌 씨는 집안 대대로 변호사로 루퍼스 일을 맡게 될 예정이었고, 그의 부인인 바버라는 브롬튼 가에서 로드윌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두 사람 다 바흐와는 아는 사이인듯했고, 아마도, 바버라는.......잔뜩 경계 어린 태도와 흘리듯 했던 말을 종합해보면 유진과 관련있겠지.

라희는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며 미간을 좁혔다.

로드윌 부부와 인형 같은 딸아이가 현관문으로 사라지고 난 뒤, 배웅하고 돌아온 제임스가 두 사람을 향해 밝게 말을 건넸다.

"이런, 나도 모르게 자넬 젖은 채로 세워뒀었구먼. 어서 씻고 마른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자네 방은 위에 여전하고, 라일라를 위해서는 손님방을 준비해 두었네."

"라일라, 위층 게스트룸으로 안내해드릴게요. 같이 가요."

팔머 남매는 마치, 런던에 왔으면 자신의 집에 당연히 머물러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제임스, 우린 단지 짐을 가지러....."

바흐의 말을 중간에 끊고, 제임스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무슨 소린가, 지금 연말이라네. 보나 마나 NYE(새해 행사) 때문에 런던 내 모든 호텔이 만실이겠지. 더군다나 늦은 시각, 밖에는 비까지 오고 있네. 다른 날도 아닌 이런 날, 우리 집을 찾아온 귀한 손님이 나가서 밖의 빗길을 헤매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제임스는 짓궂은 표정으로 바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디가 됐든, 장소는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닌가? 추위와 비를 피할 아늑한 곳이면 충분할거 같은데.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렇네만."

에둘러 말했지만, 뜻은 충분히 명확했다. 제임스의 말을 들은 라희는 순간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의식에 가깝게, 입술이 잘근 깨물어졌다.

"아니. 그냥 짐만 가지고 나가겠네. 어디든 방은 있을 테니까."

바흐가 재차 말하자,

"이 매정한 친구 보게나. 날 밝으면 지난번 이야기했던 셰일 오일 투자 건으로 긴히 할 이야기도 있는데. 그렇게 냉정하게 간다 고집하면..."

제임스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낮게 투덜거렸다. 그 사이, 라희는 그의 손을 꼭 쥐고서 신호를 보냈다. 몽환적인 야경과 알코올의 마법이 진즉 끝나버렸는지, 이제는 그럴 기분이 영 아니었다. 바흐가 위에서 라희를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눈을 맞춘 라희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짧게 한숨 쉬었다.

"......."

그가 침묵하는 사이, 라희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말을 건넸다.

"엘리자베스, 방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엘리자베스는 바흐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금 망설이다가 라희가 눈짓하자 이내 대답했다.

"어, 음. 그래요. 그럼. 올라가요."

라희는 바흐의 손을 놓으며 그를 향해 작게 말했다.

"먼저 올라가 쉴게요. 내일 봐요."

작은 손을 꽉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은 좀처럼 힘을 풀지 않고 있다가 라희가 조금씩 손목을 비틀자, 그제야 서서히 놓아주었다. 라희는 우뚝 서 있는 그를 지나쳐 앞서 가는 엘리자베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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