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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13화 (113/214)

113

10분간의 정지 시간이 끝나고 마지막 15분이 시작되자 샘이 다가와 반쯤 비워진 커피잔에 뜨거운 커피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이어서 제이콥이 직접 하얀 접시 위에 앙증맞게 놓인 핑크색 마카롱 한 접시를 들고 왔다.

"추가 주문하신 마카롱입니다."

이미 디저트로 멋스러운 화이트 초콜릿 컬이 얹힌 조각 케익 모양으로 좁게 썰린 초콜릿 가나슈와, 그 옆에 곁들여진 시럽 흥건한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콤포트(compote:설탕조림)를 먹은 터라서, 속은 다디달았지만, 좋아하는 마카롱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브로셔에 마카롱은 없었는데요."

라희가 지적하듯 말하면서 마카롱을 집어 한입 씹어 먹자,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한다기에."

"배는 부르지만. 입이 반기네요. .....고마워요."

마카롱은 사랑스러운 핑크빛에 어울리는 장미 향이 물씬 풍겼다. 라희는 입안 가득 바삭거리며 부서지면서 쫀득하게 씹히는 마카롱을 부드럽게 흘려넘기려고 테이블 위 커피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에 힘이 빠졌는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커피잔을 집어 입가로 가져가려던 손이 일순 기울어지면서 커피를 아래로 잔뜩 흘리고 말았다.

"아.."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들이킨 샴페인과 와인의 취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라희가 당황해서 아래를 보고 있을 때, 입구 쪽에 서 있던 샘이 그걸 보고 냉큼 달려와 냅킨으로 바닥을 닦아내 치우기 시작했다. 이내, 샘이 완벽히 치운 바닥은 다시 말끔해졌다. 그런데 하필, 의자에 걸쳐 둔 코트에 커피 물이 튀어 자잘한 얼룩들이 진하게 남았다.

'어쩌지. 엘리자베스 코트인데........'

라희가 난감한 얼굴로 냅킨을 들어 코트의 얼룩을 꾹꾹 눌러 찍어내는 것을 본 그가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세탁 맡기면 되니까. 얼룩이 묻지 않았더라도, 빌려준 이상, 세탁은 하려고 했을 거야."

"그래도......"

라희는 둥글게 튄 얼룩 자국을 보며 자신 없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다 조금씩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튄 얼룩이니까. 그의 말대로 세탁해서 돌려주면 될 거 같았다. 아니면 세탁비를 엘리자베스에게 주던가. 아마도 그녀의 평소 이미지를 생각해 볼 때 실제로 돈을 받지는 않을 테지만.

'정말 그래도 될까. 상당히 고가의 코트로 보이는데. 부들부들한 촉감의 재질이 뻣뻣한 양모는 아니고, 캐시미어? 라마?'

라희는 얼룩을 바라보며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어떤 고급 코트들은 세탁을 자주 하면 옷감이 상한다고 들었던 거 같기도 했다. 테이블 위 놓인 핑크빛 로즈 마카롱의 존재조차 뇌리에서 지운 채로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 디저트 접시 위 남아있던 찐득한 베리 컴포트 국물을 한 스푼 떠서 코트 위에다 뚝뚝 흘렸다.

"뭐, 하는!"

진득하고 끈끈하게 묻어 붙은 진한 붉은빛의 설탕 시럽을 본 라희가 놀라 외쳤다. 그러자 바흐가 말했다.

"자, 이제 완전히 더럽혀졌으니 그냥 한 벌 사주면 되겠군. 엘리자베스도 더 좋아할 거야. 입던 코트라 이미 질렸을 테니까."

"......."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였다. 라희는 이제 손 쓸 수도 없이 짙은 설탕 시럽이 얼룩진 코트를 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세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런던아이 캡슐이 서서히 멈춰서 완전히 정차했다. 저녁 식사 내내 세심히 보살펴준 샘과 맛있는 요리를 정성껏 준비해준 제이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이 캡슐의 유리문이 열렸다.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오늘의 운행은 이로써 종료입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뵈었으면 좋겠군요."

런던아이 직원이 상냥하지만 사무적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늦은 시간인 만큼, 직원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조금 지쳐 보였다.

"오늘 하루 종일 흐리더니 조금 전부터 빗방울이 약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면서 직원이 말했다. 과연, 바깥은 저녁 식사를 위해 캡슐로 들어가기 전보다 기온이 낮아져 굉장히 추웠다. 거기다 부슬부슬 안개 같은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라희는 런던아이의 푸른빛 조명이 번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마치 흐린 금빛 추상화 같은 템스 강의 야경을 살폈다.

런던의 이 이상한 날씨는, 공항에서 내려 이곳에 머물던 몇 달 전에도 수없이 겪었었다. 그때는 가을용 도톰한 후드 집업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정처 없이 걸어 마냥 거리를 쏘다녔었다. 무심코 아래로 미끄러뜨린 시야에, 코트 자락에 묻은 얼룩이 보였다. 어차피, 더러워진 코트. 거기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새로 사준다 하지 않았는가.

".....걸을까요."

택시를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든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라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위로 들어 어두운 하늘을 살폈다. 그러고 나서, 손에 든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라희는 맞잡은 따스한 손을 앞으로 이끌어 황금빛 멈춰선 회전목마를 지나 사우스뱅크 강기슭에 길게 늘어진 산책로로 향했다.

연말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은 조명 장식이 나무마다 촘촘히 박혀있어 빗물에 번져 보였다. 비가 와서인지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도 저 멀리 야시장의 불빛이 환히 보여서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의 축제에 온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산책로에 띄엄띄엄 서 있는 침침한 가로등을 걸을 때면 이름 모를 올드팝이 들려왔다.

조용히 라희가 발길 가는 데로 따르는 그의 손을 잡고 조금 더 앞을 향해 걸어가자 두 뺨과, 머리 위로 내려앉은 안개 같은 부슬비가 축축이 쌓이는 게 느껴졌다.

지난번 비 오는 런던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걸었을 때는 가을이었지만, 비 때문인지 겨울만큼 추웠었다. 겨울인 지금은, 연말 분위기에 흠뻑 취한 사람들이 왜 길가에 굳이 나다니지 않는지, 걷기 시작한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정말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강바람에다가 부슬부슬한 빗방울까지 맞기 시작하자 이젠 뼛속이 시리도록 추웠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손바닥을 제외하고는 몸 안에 남아있는 온기란 온기는 얼음장 같은 대기가 전부 깡그리 흡수해버리는 것만 같은 냉기였다. 라희가 아래턱을 잘게 떨며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조용히 뒤따르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그만 가지."

서늘한 눈매로 내려다보는 그를 잠시 올려다본 라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집을 부리기에는 정말로 추웠다. 런던에서 비 맞으며 혼자 걷던 기억을 그와 함께 덧씌웠으니, 이만 가도 되겠다 싶었다. 이 상태에서 더 걷겠다고 우기는 것은 되지도 않는 만용이었으니까.

"저쪽으로."

그는 런던 아이 오른편에 위치한 런던 수족관 앞 대로를 가리켰다. 관광객들이 오가는 자리이다 보니 길가에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던 라희는 눈가를 덮기 시작한 부슬비에 미간을 찡그려 눈매를 가늘게 늘였다. 좁혀진 시야에 보이는 그의 얼굴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어 어둡게 음영져 보였다.

얼굴의 윤곽선만 또렷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그의 뒤로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작은 빗방울들이 새하얗게 흩날렸다. 귓가에는 좀 전부터 느릿하게 흐르던 올드팝이 들려왔다. 참 아이러니했다. 여긴 런던의 한복판인데, 노래의 가사는 바다 건너의 파리, 파리를 외쳤다.

"...for woman loving people. for all the baby dreams that could come true....lovers, .. Paris was made for me and you..."

꿈결 놀이동산 같은 아른한 멜로디와 함께 외치는 올드팝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귓가에 가득 스몄다.

술에 취한 걸까. 음악에 취한 걸까, 아니면 추위로 머릿속이 얼어버린 걸까. 움직임 없는 라희가 그를 조용히 올려보자 그도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만 멈춰있었다. 가로등이 만들어낸 음영에 가려져 그의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지도.

라희는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아래쪽으로 힘주어 끌어내렸다. 서서히 그의 그림자가 라희에게 드리워지며 그늘이 얼굴을 덮어왔다.

".........."

걸었던 내내 빗방울을 맞고 있어 차가워진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살포시 닿았던 입술을 벌려 작은 혀가 내밀어 지자 예기치 못한 감촉에 놀란 그가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 뜨거운 온기를 가진 입김이 새어나오며 얇은 피부와 피부가 서로 맞물리고 혀와 혀가 만나 엉켜 들었다. 말랑거리는 혀와 타액이 농밀하게 섞인다. 미세한 진흙의 진득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같은 속살이 은밀히 얽히고설키며 서로를 휘감았다.

말캉한 혀가 애타게 빨고 빨아들이면서 느껴지는 달콤한 맛. 그와의 키스는 저녁 식사 마지막 코스의 디저트였던 진한 초콜릿 맛이다. 동시에, 희미한 부케 향의 달콤한 샴페인의 흔적이 예민한 혀끝에 스쳤다. 그의 부드럽고 따스한 혀는 맛있었다. 오늘 맛보았던 그 어떤 요리보다도, 촉촉하고 야들하며 부드러웠다. 아니, 굳이 혀끝에 느껴지는 감미로운 맛 때문이 아니더라도, 몸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이토록 또렷하게.

"하아, 흡, 아, 으흡.."

라희는 그에게 매달려 매끌매끌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끝을 연신 핥아내고 또 깊숙이 빨아들였다. 열띤 숨결이 추위를 덮고 서로 섞여들었다. 라희의 팔이 그의 목을 둘러 힘주어 감았다. 깊게 파고든 그는 달았다. 미칠 듯이 달았다. 질퍽거리며 혀와 엉겨든 촉촉하고 뜨거운 속살은 마치 시럽처럼 꿀물이 뚝뚝 흘렀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혀끝에 맞닿은 그를 놓치기 싫었다.

"흐읍...."

입안을 적시는 타액이 목구멍에 흘러들었다. 감미로운 그의 타액은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났다. 숨이 막혀 느껴지는 아득한 현기증. 목덜미를 타고 머리끝까지 치솟는 짜릿한 느낌. 동시에 척추를 타고 흐르는 아찔함. 라희는 그의 혀끝에 매달려 애타게 깊이 빨아들이면서 휘감아 옭아맸다.

"아, 으읍,.. 읍.."

위로 들린 고개 때문에 벌어진 코트의 목깃 틈으로 잔 빗방울이 차게 떨어져 내렸지만, 차오른 열기로 몸이 달아올라 추운지 몰랐다. 입안에 섞여든 미끌미끌한 타액처럼 몸의 깊숙한 곳이 서서히 뜨겁게 젖어들어갔다. 정신이 어질하다. 달아오른 열기에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하, 아..."

마침내 떨어진 입술에서 참았던 숨이 길게 터져 나오면서, 벌린 입술 사이로 격한 숨소리가 연신 내뱉어졌다. 호흡하느라 가늘게 떨리는 입술 끝은 물고 빨려서 잔뜩 달아올라 예민해져 있었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입술 위를 식히듯, 찬 빗방울이 위에서부터 투둑, 떨어져 닿는 느낌이 났다. 조금 전보다 살짝 굵은 빗방울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은 숨을 고르며 차가운 빗방울을 그대로 맞았다.

"어디로."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 그 안에 담긴 지독한 열기. 라희는 곧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비에 젖은 길바닥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옷이."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겨우 나온 말. 짧은 숨을 몰아쉬고서, 라희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요. ......짐 가방부터요."

손이 아닌,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둥글게 감싸 안아 단단한 몸에 기대게 한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칫거리던 라희도 이내 팔을 뻗어 그의 허리께 코트를 붙잡고 차가운 비 내리는 저 앞의 대로를 향해 걸어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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