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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잔을 기울이자, 달콤한 샴페인 향이 투명한 안개처럼 얼굴 위로 훅 풍겼다. 라희는 샴페인을 기울이며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의 유리 캡슐 밖의 야경은, 정말로 멋지다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유람선을 타며 보았던 도시의 경관이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공중에서 바라보는 런던은 마치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았다. 다채로운 조명들, 특히 호화로운 황금빛 톤의 따스한 색상으로 반짝였다. 흐리고 습한 날씨 때문에 환한 야경의 색색으로 물든 조명들은 물기를 머금어 어두운 대기 중에 수묵화처럼 번져 있었다. 예전에 런던에 도착해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았던 인상파 화가들의 섬세하면서도 약간 뭉툭한 붓놀림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인 야경. 낯익은 관광 명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자잘한 조명 속 커다란 장식처럼 환히 빛났다.
캡슐 위치가 조금씩 위로 올라감에 따라,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런던이라는 거대 도시를 굽이쳐 흐르는 템스 강의 완만한 곡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희는 새삼 감탄했다. 줄이 길어 마음속 지레 포기했던 런던 아이를 이런 식으로 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또한,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런던의 야경이 이리도 멋질 줄은 정말 몰랐다.
손안에 든 가느다란 샴페인 글라스 안의 오묘한 황금빛 액체 안,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포 너머로 바라다본 꿈결 같은 런던의 야경은 앞으로 절대 잊을 수 없겠지. 더불어 맞은편에서 고요한 눈으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도.
곧은 바흐의 시선에 갇힌 라희가 안개꽃처럼 반짝이는 야경에 감탄하며 샴페인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첫 스타터 메뉴인 랍스터 샐러드가 식탁 위에 놓였다.
하얀 접시 위, 맨 아래 붉은 마요네즈 소스가 마치 미술용 나이프으로 얇게 펴 바른 것처럼 색의 농담을 주어 깔려있고, 그 위로 색색의 여린 잎 샐러드가 놓여있었다. 연한 녹색 양상추 잎과 각종 초록색, 연녹색 모양의 허브 싹들, 그리고 선명한 노란색과 붉은색의 식용 꽃잎도 드문드문 섞여 있어 마치 정성 들여 꾸민 아기자기한 정원처럼 보였다.
여린 잎 위에는 탱탱해 보이는 랍스터 테일이 통째로 먹기 좋은 한입 크기로 송송 썰려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아래 깔린 녹색과 랍스터의 하얀 속살, 그리고 루비처럼 투명해 보이는 붉은 겉살의 대비가 눈부셨다. 그 자체만으로도 시각적인 즐거움이 충분해서 차마 포크로 찍어 망치기가 망설여졌다. 마치 예술 작품 같아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왜."
가만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희를 향해 그가 물었다.
"...너무 예뻐서요."
"흐음."
그는 캡슐 입구 쪽 직사각형 테이블 위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제이콥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제이콥이 활짝 웃어 보이자 다시 라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쉐프에게있어서 최고의 찬사는, 접시를 깨끗이 비워 돌려주는 거라더군."
그가 먼저 포크를 움직였다. 라희도 그를 따라 접시 위 풍성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맛보기 시작했다. 아삭아삭한 여린 잎의 줄기가 부드럽게 씹혀서 신선한 맛이 났다. 살짝 익혔는지 퍽퍽하지 않고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랍스터 살은 들큼한 단맛과 함께 입안에서 탱글탱글 씹혔다. 접시 밑에 깔린 붉은 소스에 찍어 함께 맛보니 상큼하면서도 깊은 맛이었다.
"정말 맛있어요."
라희가 샐러드를 하나하나 맛보며 감탄하자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기울여 마셨다. 약간 머쓱해진 라희도 이내 샴페인을 기울였다.
혀끝에 닿은 크리미한 거품이 상큼하게 터지면서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아찔한 달콤함, 거부 할 수 없는 상큼함에 반해 어느덧 한잔을 다 비워버렸다.
그러자,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샘이 다가와 다시 샴페인잔을 가득 채워넣었다. 마치 고급스러운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전담 웨이터의 섬세한 시중을 받는 기분이었다.
"Thank you(고마워요)."
"'It's my pleasure to serve you."
라희가 샘을 향해 말하자,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고서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샐러드가 거의 비워졌다. 이내, 제이콥이 즉석에서 썰어 준비한 전채 요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둥근 접시 위에 오렌지빛 훈제연어와 녹색 아보카도가 작은 주사위 크기로 앙증맞게 깍뚝 썰려 바닥에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점점이 찍힌 소스 위에 신선한 블루베리, 라즈베리, 딸기와 함께 어우러져 화려하게 놓여있었다.
하나둘 포크 끝으로 톡톡 찍어 맛보다 보니, 어느덧 30분이 지났는지 런던 아이는 두 번째 회전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캡슐 밖 런던의 야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두 번째 회전이 시작되자, 레드 와인이 글라스에 따라지면서 메인 요리인 양갈비가 나왔다. 카레처럼 걸쭉하고 몽글거리게 익힌 야채요리 위에 도톰하게 썰린 양갈비 3대가 뼈를 위로 뾰족하게 세우고 서 있었다. 그 앞으로는 핏빛 자주색 소스가 붉은 시냇물처럼 아치형으로 그려져 있었고, 마치 냇가 옆 바위와 풀처럼 감자 덩어리와 녹색 민트잎이 다져진 장식이 놓였다.
레스토랑에서 조리해서 보온용기에 보관되어있던 따뜻한 양갈비는 캡슐 바깥의 템스 강에 비치는 국회의사당과 사우스 뱅크의 야경처럼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양갈비에 곁들인 레드 와인의 진한 맛은 양고기 특유의 깊은 맛과 잘 어우러졌다.
평소처럼 별말 없는 조용한 그와 함께 간단히 음식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며 챙, 하고 부딪치는 붉은 와인 잔이 서서히 비워지면서 런던 아이의 2번째 회전은 그렇게 지났다.
2번째 회전이 끝나고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에 캡슐 밖으로 나온 라희는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아주 흐릿해 보였다.
그의 고요한 침묵과 조용한 야경의 분위기에 취해 연신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술이 적잖이 들어간 듯 했다. 거울을 향해 찡그린 눈 앞으로 보이는 시야는 흐릿하고 머리도 약간 어질했다. 라희는 화장실을 나와 차가운 템스 강의 밤바람에 몸을 내맡기고서 술을 깨기 위해 심호흡을 재차 했다.
"괜찮아?"
조금 비틀거리며 캡슐 안으로 들어서는 라희를 향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라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 와인이랑 샴페인이랑 섞어 마셔서 그런가 봐요."
"각각 한 병씩 비웠으니까."
벌써 그렇게 마셨나? 둘이서 각각 한 병씩 마셨다고 쳐도 상당한 양이었다. 더군다나 라희는 평소 주량이 쎈 편은 아니었다.
"많이 마셨네요. 메리어트에서 이미 한잔 마시고 왔는데."
테이블에 앉은 라희는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바깥은 차고 안은 따뜻한 실내의 온도차 때문인지 아니면, 한 시간 동안의 식사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인지, 희뿌연 습기가 유리창에 옅은 막처럼 씌워져 있었다. 곧 회전이 시작되어 에어 컨디셔너가 가동되면 사라져버리겠지만, 습기 찬 창밖으로 보여 아른거리는 런던의 야경도 꽤 운치있었다.
"마지막 회전에도 샴페인과 커피인데. 그럼 커피만 주문할까?"
제이콥을 향해 일어서려는 그에게 손을 살짝 내저으며 라희가 이야기했다.
"아니요. 모처럼의 기회인데 모두 다 즐기고 싶어요."
"흐음."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3번째 회전이 시작되었다. 휴식시간 동안 말끔하게 치워져 깨끗하게 세팅된 테이블 위에는 샴페인 잔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가 놓였다.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알딸딸했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제 배도 부르고, 주위 공기는 따뜻하며 아늑하고, 캡슐 입구에서 지키듯 서 있는 두 명의 낯선 외국인의 존재도 익숙해졌고,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동화 속처럼 환상적이다. 라희는 야경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눈 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예의 단정한 자세 그대로 천천히 하얀색 커피잔을 기울여 마시는 잘생긴 그를 보고 있으니, 눈이 제대로 호강하는 듯싶었다.
그를 향한 시선을 느낀 듯, 밤하늘을 닮은 고요한 시선이 마주 해왔다. 템스 강의 검은 물이 흘러가는 듯한 짙고 서늘한 눈매가 라희를 향했다. 예전처럼 그를 마주하고도 무섭다거나, 두렵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라희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바흐, 좋아하세요?"
그가 연주하는 앤티크한 하프시코드의 곡은 대부분 바흐의 곡이었다. 라희가 그의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부르는 그의 별명처럼, 물론 전혀 다른 바흐지만, 바흐를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음, 좋아한다기보다는 익숙하지."
여느 때처럼 간결한 대답. 라희가 더 긴 설명을 기대하며 그를 가만 응시하자,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바흐를 전공하셨어. 쳄발리스트(cembalist: 하프시코드 연주자)셨거든."
그러고 보니, 엘리자베스가 윌버리 하우스의 응접실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라희는 이내, 그의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자연스레 분위기가 무거워지면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좋아하는 작곡가가 바흐가 아니라면, 누구를 좋아하는지 묻고 싶었는데.
라희가 시선을 내려 반쯤 비워진 커피잔을 보고 있을 때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사티를 듣고 있어."
"사티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긴, 중고등학교 때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우기는 했어도 아주 가볍게 배운 터라 연주할 수 있는 곡이 고작 다섯 곡이 채 되지 않는 라희로서는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가가 낯설긴 했다.
"에릭 사티.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대부분의 곡이 피아노지."
피아노. 라희는 그가 사라네 집에서 연주했던 피아노를 떠올렸다. 하프시코드와 마찬가지로 흠잡을 데 없는 매끄럽고 아름다운 선율. 피아노와 하프시코드는 어머니 때문이었나 보다.
"최근에 각광받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어디선가에서 들어봤을지도."
그는 거기서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커피잔을 들어 기울였다.
에릭 사티. 무슨 곡일지 들어보고 싶은데, 당장은 휴대폰이 불능 상태라 불가능했다. 나중에라도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캡슐의 움직임이 멈췄다. 왜? 멈추는 거지? 라희가 궁금해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여기가 정상인가 보군. 10분간."
"아."
테이블 한켠에 놓여있던 브로셔를 눈짓으로 가리킨 그의 말에 맨 처음, 캡슐에 들어왔던 런던아이 직원이 해주었던 설명이 생각났다. 10분간 멈춰서 야경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했었지.
1시간 30분 안에 주어진 10분의 특별한 시간. 이런 시간을 보내기 위한 비용은 과연 얼마일까. 라희는 머릿속으로 궁금해 하다 이내 의문을 지웠다.
바흐니까 가능한 거다. 그와 함께라면 이런 상황이 전혀 이질적이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L백화점 A관도, 퍼스트 클래스도, 헬리콥터도, 사막 한가운데서의 저녁 식사도 라희에게는 모두 낯설고 엄청났던 경험이었지만,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처럼 별거 아닌 듯 보였으니까.
"자."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 글라스를 들어서 라희를 향해 건넸다. 라희도 의자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옆 창가 바로 앞에 그와 함께 나란히 섰다. 앉아서만 보던 야경과는 조금 색달랐다. 아찔하게, 135m 바로 아래 유유히 흐르는 검은 템스 강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바로 앞에 있는 듯 마주 보이는 황금빛 조명의 빅벤과 국회 의사당, 물빛에 비친 고풍스러운 건물의 조명이 강물 속으로 녹아드는 템스 강의 멋스럽고 화려한 야경. 습기 어린 어두운 밤의 은은한 분위기.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는 그.
"Toast(건배)?"
그가 물었다. 라희는 앞으로 비스듬히 내밀어 진 가느다란 황금색 샴페인 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Toast(건배)."
"For What(뭘 위해 건배하지)?"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묻는 그를 올려다보던 라희는 시선을 돌려 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대답했다.
"For this moment.(지금 이 순간요.)"
"Being together? (함께 있는거?)"
챙, 대답 대신 라희가 샴페인 잔을 기울이자, 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어쨌든, 지금 135미터 상공에서 함께 있는 건 맞으니까. 바로 앞 황금빛 카펫같이 펼쳐져 너울지는 야경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그와.
그와, 그리고.......
라희는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얼굴에 열기가 확 몰리는 바람에, 급히 들이킨 달콤한 샴페인은 혀끝에 감미롭게 머금어지다가 상쾌하게 톡 쏘며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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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