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11화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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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아이로 가나요?"

블랙 캡 택시가 출발하자, 라희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아니, 정확히는 런던 아이가 아니야. 목적지를 다시 말해야 할 것 같군."

그리고 나서, 택시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 I want to change my destination. I need to get to Marriott County Hall near the London eye."

(목적지를 바꾸고 싶군요. 런던 아이 근처의 메리어트 카운티 홀로 가주십시오.)택시기사는 알겠다고 했다. 연말의 템스 강 변은 교통체증으로 조금 막히긴 했지만, 이내 익숙한 런던 아이가 보이고 바로 옆의 고풍스러운 외관의 메리어트 카운티 홀 호텔에 도착했다.

밤하늘 아래 푸른 조명을 환히 밝힌 메리어트 호텔은 마치 교과서에서 본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커다랗고 높은 기둥이 템스 강을 향해 일렬로 반원을 그리며 늘어선 모양이었다. 영국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이 고풍스럽고 위압적인 외관이었다.

"여기서 저녁을 먹을 건가요?"

라희가 궁금해하며 묻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 먹을 건 아닌데, 일단 여기에 들어가긴 해야 하지. 시간을 보니 조금 있으면 나와야 할 것 같군."

바흐는 라희의 손을 잡고 호텔 정문 현관이 아닌, 기둥들 옆의 조그마한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갔다. 레스토랑과 바를 겸한 길레이 (Gilray's) 라고 쓰여 있었다. 바의 입구에 들어서자, 메리어트 호텔 종업원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네. 데이빗 한입니다."

그가 이름을 밝히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토랑 안쪽의 바(Bar)로 안내했다. 화려하고 촘촘한 샹들리에 아래 두꺼운 대리석 스탠딩 바가 길게 펼쳐져 있고 사방이 금빛 기둥으로 장식되어 품격있고 호사스러워 보이는 바였다. 두 사람은 번쩍거리는 바테이블 앞에 섰다.

"샴페인과 칵테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런던다운 고풍스러운 흰 정장을 셔츠에 검은색 조끼를 겹쳐 입은 바텐더가 물었다.

"어떤 거?"

그가 라희를 향해 나직이 묻자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녁 식사 대신 여기서 술을 먹나요?"

"아니. 저녁 먹기 전에 가볍게 식전주로 제공되는 거야."

식전주?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마신다는 술? 그럼 여기서 밥을 먹는 건가.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에는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는 듯 바의 곳곳에는 여느 호텔 레스토랑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라희가 잔뜩 고민하고 있자, 그가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

"샴페인으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계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희는 그의 손에 이끌려 둥근 호선 모양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템스 강의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조금 전 배에서 보았던 것과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분위기는 괜찮네요."

창밖을 바라다보던 라희가 중얼거렸다. 그는 가볍게 호응했다.

"흐음."

그런데, 곧 나가야 한다는 소리는 또 뭐람. 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가느다란 샴페인 잔이 담긴 검은색 사각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접시 위에는 경성 치즈 약간과 신선한 딸기가 얇게 슬라이스 되어 놓여있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직원이 말하고 사라지자 그는 샴페인 잔을 들어 기울였다. 라희도 앞에 놓인 잔을 기울여 마셨다. 달고 상큼한 사과 향이 톡 쏘는 청량한 맛이었다.

"맛있네요. 스파클링 주스 같아요."

라희가 말하자, 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상 다 먹지는 못하겠지만, 입에 맞다니 다행이로군."

"무슨 시간이요?"

라희는 진지하게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나갈 시간."

그는 짧게 대답하며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들어오자마자 나간다고? 밥도 먹지 않고?

"어디로 가는데요?"

그와 함께 할 때면 늘 묻게 되는 질문. 라희는 또 이런 질문을 하게 되자 조금 짜증이 났다. 라희는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곧게 응시했다.

"글쎄? 지금 말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될거야."

웃는 낯에 침 뱉으랴는 속담 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하던 예전과 달리, 오늘은 그가 대답하면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기에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면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10분 이내로."

도무지 말해주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대답을 들은 라희는 곁눈질로 고풍스러운 바의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라희는 약간의 호기심, 그리고 조금 답답한 마음으로 앞에 놓인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바흐의 말대로 10분 가량의 시간이 지나자, 호텔 직원이 다가와 정중히 일어나실 시간이라고 알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라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라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입가를 조금 끌어올렸다.

"가지."

그의 손을 잡고 조금 전 들어온 길레이 바의 입구로 나가니,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호텔 직원이 정중히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고 라희와 바흐는 차에 탔다. 운전기사의 환영인사와 함께 차는 곧 출발했다. 라희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뭔가 단서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옅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만 지었다.

차는 호텔에서 출발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스륵 멈췄다. 바흐를 노려보던 눈을 돌려 창문 밖을 보니 아까 그 붐비던 회전목마 뒤쪽이었다.

런던 아이 탑승장 앞. 8시가 지나 런던아이의 영업시간이 종료된 만큼, 런던 아이는 고요히 빛을 내며 멈춰 있었다. 런던 아이 주위는 산책 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 줄을 서거나 대기하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여기는 대체 왜? 이미 영업시간도 끝난 모양인데. 라희가 궁금해하는 사이, 앞에서 운전기사 차 문을 열고 내려 뒤로 다가와 정중히 뒷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나와 잠깐 서 있으려니, 런던 아이 탑승구 쪽에서 회색 점퍼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손에 파일을 들고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 오후에 예약 확인 전화 주신 미스터 한, 맞으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흐를 노려보았다. 바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라희의 손을 단단히 잡고서 상냥하게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텅 빈 탑승로를 지나, 철제 계단을 올랐다. 확실히, 의심할 필요도 없이 런던 아이로 승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업이 끝난 런던 아이라니. 라희는 설마 설마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쇠로 된 승강장 입구를 지나자, 정지되어 서 있는 런던아이 캡슐이 보였다. 25명을 수용할 수 있는 투명한 유리캡슐은 어지간한 집의 침실 크기로 상당히 크고 넓었다. 승강장에서 서서 들여다본 캡슐 안쪽의 불은 꺼져있고,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었기에 외부 빛이 반사되어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직원이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띠고서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되었군요. 이제 탑승하시겠습니다."

직원이 말하면서 위쪽을 향해 손짓하자, 꺼져있던 캡슐 내부 등이 환히 켜졌다. 라희는 강한 빛이 터져 나오자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환한 불빛 아래 타원형의 유리 캡슐 안쪽 창가 앞에는 흰 테이블 보가 정갈하게 덮여있고 그 위로 음식 접시가 놓인 둥근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주위로 의자가 두 개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역시나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직사각형 테이블 위에, 커피잔과 칵테일 잔, 그리고 와인 잔과 술병, 음식과 각종 상자가 놓여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타원형 캡슐 문을 활짝 연 직원이 말했다. 라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 서 있자, 바흐는 라희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가지."

사방이 유리인 벽과 달리 바닥은 딱딱한 금속 재질이었다. 라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캡술 안으로 들어가 둥글고 투명한 캡슐 안을 살폈다.

런던아이 직원의 안내로 테이블에 앉자, 이내 두 명의 조리사 복과 웨이터 복을 입은 직원이 캡슐 안으로 들어와 간단한 스낵이 놓여있던 하얀색 테이블 위에 글라스와 잔, 식기, 그리고 접시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런던아이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테이블 앞에 서서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런던 지상 135M 위의 하늘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다이닝 135 (Dining at 135)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이닝 135는 총 3번의 회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각 회전은 런던 아이 고유 운행 시간인 30분입니다. 8시 30분에 출발한 첫 회전에서 스타터를 드실 수 있고, 이어 9시에는 메인 코스가 제공될 것입니다. 메인 코스 뒤 10분간 휴게시간을 갖습니다. 그 뒤 9시 40분에 다시 탑승하셔서 마지막 회전이 시작되며, 디저트와 커피가 제공될 것입니다. 9시 55분에 정상인 135미터 상공에서 10분간 정지해 멋진 야경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밤 10시 20분에 오늘의 모든 일정은 종료됩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에서 브로셔를 꺼내 각각의 자리 앞에 놓았다.

"여기 일정표와, 오늘 제공되는 식사 메뉴가 적혀있습니다. 운행중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Dining at 135

19:30 - Marriott county Hall, enjoy a Champagne reception in Gilray's Bar.

20:15 - Depart Marriott County Hall.

20:30 - Board the London Eye. Your starter is served on the first rotation.

21:00 - The second rotation commences, and you are served your main course.

21.30 - Comfort break.

21:40 - Re-board the London Eye for the third rotation. Dessert and coffee is served.

21:55 - The London Eye stops for 10 mins just for you to enjoy the view at 135 metres above London.

22:20 - Depart the London Eye.

라희는 테이블 위의 브로셔를 펼쳐 확인했다. 직원의 말대로의 일정이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그럼, 오늘의 식사를 책임질 제이콥과 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호명하자, 저쪽 직사각형 테이블에 서 있던 하얀 조리사 유니폼을 입은 제이콥과 아까 메리어트 웨이터 복과 동일한 복장을 입은 샘이 다가와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루바브 푸드 디자인(Rhubarb Food Design)사의 쉐프 제이콥입니다. 이쪽은 진행을 맡을 샘이구요. 저희는 오늘, 두 분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이콥은 라희와 바흐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테이블에는 프리코스(Fricos:치즈 과자), 치즈 스틱(Cheese straws), 빵 스낵(Crispy bread croutes)이 제공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3코스의 음식으로는 미리 주문하신..."

그는 조금 말을 흐리고서, 조리복 주머니를 뒤적여 메모를 꺼냈다. 그리고 메모를 손에 들고 눈매를 좁히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스타터로는 붉은 마요네즈를 첨가한 랍스타 샐러드 (Fresh Lobster salad with baby leaves and bloody Mary mayonnaise), 메인 메뉴로는 라따뚜이를 곁들인 양갈비구이(Rack of English lamb with creamed ratatouille, parchment wrapped new potatoes in minted oil with a redcurrant jus) 마지막 디저트로는 초콜릿 가나슈 (Chocolate ganache wedge with berry compote and white chocolate curl)입니다. 모두 주문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맞는지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이콥의 요청에 바흐는 고개를 끄덕여 짧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술은 요청하신 기본 샴페인(Pommery Brut Royal Champagne)과 레드 와인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전 준비 사항을 확인한 제이콥은 샘과 함께 자신이 서 있던 직사각형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를 잡자, 런던아이 직원은 입꼬리를 상냥하게 올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곧 운행을 시작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런던 아이 직원은 정중히 인사하고 캡슐을 빠져나갔다. 이어서 캡슐의 문이 닫히고, 천정을 밝히던 환한 조명이 은은한 빛으로 바뀌었다.

이내,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런던 아이 캡슐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얀 장갑을 낀 샘이 다가와 샴페인을 잔에 조르르 따랐다. 좁고 긴 샴페인 잔에 하얀 거품이 가득 고이더니 이내 아랫부분은 황금빛 샴페인 술로 바뀌면서 퐁퐁퐁 작은 기포를 하얗게 덮인 표면 위로 솟아 올렸다.

샴페인을 서브한 샘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바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보글보글 상큼한 기포가 솟아오르는 차가운 샴페인잔을 들어 라희를 향해 눈짓했다. 라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눈짓대로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테이블 위로 들어 올렸다.

"오늘 저녁 식사가 마음에 들기를."

그는 가느다란 샴페인 잔을 살짝 앞으로 내밀어 부딪쳐왔다. 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잔 속에 든 황금빛 샴페인 위 하얀 거품이 크게 출렁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런던 아이 저녁식사는 5000파운드부터 시작하더라구요~돈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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