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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이 바뀌는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런던 아이가 위치한 주빌리 공원에는 강변을 따라 야시장이 한창이었다. 라희는 그의 손을 잡고 연말이라 화려한 푸른빛 조명으로 장식된 공원길을 걸었다.
막상 템스 강 변에 도착해보니 야시장이라 해보았자, 서른 개 정도의 작은 하얀 천막이 주르륵 늘어서서 불을 환히 켜고 커피나, 스낵, 관광용 기념품, 수공예품 등을 파는 작은 마켓이었다. 그 주위로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양한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사람 정말 많네요."
라희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짧게 동의했다.
"그럴 때니까."
그래. 내일이 NYE(New Year's Eve: 새해 전날)였다. 연말 막바지 무렵이라 그런지 주빌리 공원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데 없이 북적였다. 가만 앉아 템스 강의 야경을 바라보는 사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 야시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치, 바스에서 본 크리스마스 마켓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흡사해서 라희도 흥미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야시장의 끝편에 커다란 회전목마(merry go round)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탑승 줄이 길게 늘어선 런던 아이였다. 회전목마는 금빛 화려한 조명등을 켜고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빙글빙글 돌았다. 오늘이 대목인 모양으로 런던 아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회전목마를 타기 위해 줄을 서며 대기 중이었다. 줄을 지나쳐 회전목마 뒤쪽으로 걸어간 라희는 이내, 길게 늘어선 런던아이 탑승 줄을 보고 질려버렸다.
오늘 런던의 관광객이란 관광객들은 모두다 런던 아이 밑에서 모이기로 약속이라도 했는지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런던 아이는 인터넷으로 탑승 티켓을 팔고 있었는데 이리 올 줄 알았더라면, 미리 표를 사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구석에 걸려 있는 운행 안내 표지를 읽어보니 런던 아이의 운행 마감 시간은 8시였다. 앞으로 두 시간 남짓 남았지만, 지금 늘어선 줄의 상태를 봐서는 절대 오늘 중으로 탑승하지 못할 것 같았다. 탑승 대기 줄의 앞쪽에서 줄어든 만큼,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새로 줄을 섰다.
"줄이 너무 길어요."
라희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늘어선 줄을 보더니 동의했다.
"그렇군."
"그래서 회전목마가 인기인 거네요. 런던 아이 탑승 대기 시간에 기다리느라 지루해하는 아이들이 타고 노느라."
라희가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흐음."
바흐는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푸른 빛의 런던 아이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불쑥 말을 건넸다.
"저쪽, 시티 크루즈는 어때?"
그가 손을 들어 런던 아이 앞쪽 검게 넘실대는 템스 강을 가리켰다. 검은 강 위에는 런던의 야경을 즐기는 유람선들이 드문드문 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런던 아이 앞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유람선 선착장이 보였다. 유람선이 나으려나? 어쨌든 오늘 런던 아이는 탑승이 불가능하니, 포기였다. 조금 아쉬웠다. 나중에라도 탈 기회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요. 가서 타요."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런던 아이 밀레니엄 피어 선착장(London Eye Millennium Pier)으로 향했다. 라희는 런던 아이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템스 강 유람선을 타본 적이 없었다. 배에 갇힌 상태로 단체 관광객과 커플들 사이에서 멀뚱히 앉아 있는 것은 끔찍했으니까.
두 사람은 주륵 늘어선 매표소로 가서 오늘의 마지막 유람선인 6시 표를 끊었다. 시티 크루즈의 운행시간은 한 시간 남짓. 런던아이나 맞은편 웨스트민스터 선착장에서 출발해 그린위치(Greenwich)나 런던 탑(Tower of London)까지 운행했는데, 그린위치는 너무 멀어서 그나마 가까운 런던 탑 코스로 골랐다. 이제 시간은 얼추 저녁이라서 대충 시티 크루즈를 타고 난 뒤 저녁을 먹으러 가면 될 거 같았다.
배 시간에 늦지 않게 선착장에 서서 강바람을 맞으며 유람선을 기다렸다. 앞쪽으로 펼쳐진 템스강 너머로 황금빛 조명에 둘러싸여 빛나는 빅벤(Big Ben)과 그 옆으로 국회 의사당(Palace of Westminster)이 보였다. 두 건물의 화려한 조명이 검은 강물 위에 너울너울 비쳐서 아주 장관이었다. 특히 15분마다 종을 울리는 빅벤의 둥근 시계 창이 노란 눈동자처럼 환하게 빛을 냈다. 선착장 바로 앞에 보이는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도 다리의 조명도 차분한 색으로 멋졌다. 고풍스럽고 거대한 건물을 둘러싼 화려한 불빛의 향연을 보고 있으려니 과연 런던의 유명한 템스 강 야경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주위를 감상하며 서 있자, 붉은색 넓적한 시티크루즈 선이 서서히 다가와 선착장에 정박했다. 마치 평평한 바지선 같이 생겼다. 2층짜리 크루즈는 먼저 웨스트민스터 선착장에서 출발해 맞은편 런던아이로 오기 때문이기도 이미 먼저 타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막지막 배편이라서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바흐는 붐비는 사람들에 치이지 않게 라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로 이동했다. 크루즈의 2층 오픈된 공간은 탁 트여 있어서 야경을 보기에는 훌륭했으나, 쌀쌀하고 스산한 날씨 때문에 매우 추웠다. 두 사람은 2층에 잠시 서 있다가, 라희가 몸을 가늘게 떨자 1층 통유리로 둘러싸인 선실로 향했다. 선실 안은 난방 중이라 따뜻했다. 운 좋게 창가 쪽 비어있는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이내 배가 검은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출발했다.
선미에 선 뚱뚱한 가이드 아저씨가 마이크로 간략한 설명을 말해 주는 가운데, 납작한 유람선은 관광 명소들을 찾아 천천히 떠다녔다. 사진을 찍으라는 배려인 듯, 맨 처음은 런던아이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정박해 잠시 멈춰 있다가 이내 템스 강을 유유히 떠다녔다. 어차피 휴대폰도 침수된 상태였기에 남들이 사진 찍는 동안 라희는 가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 손을 잡고 있는 그도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검은 강물 위로 강기슭 늘어선 다채롭고 밝은 조명이 비쳐 넘실대는 화려한 템스 강의 야경 사이로 몇몇 유람선들이 함께 움직였다. 시티 크루즈는 템스 강의 야경을 감상 시간을 주려는 듯이 느리게, 하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유람선은 둥근 아치 지붕이 마치 부풀려 놓은 베레모같이 보이는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과 뾰족한 굴뚝같은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을 지나 런던 브릿지를 차례로 지났다. 그리고 흰색과 푸른색 조명으로 고풍스러운 타워 브릿지 앞에서 잠시 정박해서 다시 포토타임을 가진 후 런던 탑 선착장에 (Tower Millennium Pier) 완전히 멈춰 섰다.
"내리라는 걸까요?"
사람들이 주섬주섬 배에서 내리기 시작하자, 문득 궁금해졌다. 런던 아이로 돌아가서 내리는 게 아닌가?
"여기가 종착지라는군."
가이드가 빠르게 말하는 안내 멘트를 들은 그가 알려주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건가? 그러고 보면 거의 한 시간 여 동안 말없이 앉아 창밖 너머 야경만 감상하고 있었음에도 꽤 만족스러웠다. 아마 혼자였다면, 유람선을 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라희는 그의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렸다.
"뭐 먹고 싶어요?"
저녁 식사 시간이니 뭔가 먹긴 먹어야 할 터였다. 라희의 물음에 그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조금 좁혔다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음. 뭘 먹고 싶은데?"
그가 되물었다. 먹고 싶은 거? 라희는 생각하느라 어두운 허공에 시선을 던졋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글쎄요. 런던에 왔으니까,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 그거 아직 안 먹어 봤거든요. 대구살(Cod)이 맛있다고 하던데요."
"피쉬 앤 칩스라..."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인가 보다. 하긴, 짭짤하게 튀긴 감자와 튀긴 생선살이 전부인 느끼한 요리니. 잠시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다른 거는?"
다른 거? 글쎄.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었다. 런던에서 음료나 빵을 제외하고 뭔가 요리를 먹은 기억이 없다. 오죽하면 장염으로 입원까지 했겠는가. 라희는 상관없다는 표시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렸다.
"아무거나요."
라희의 대답에, 바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그럼, 피쉬 앤 칩스는 다음에 먹기로 하고, 일단 움직이지."
"어디로요?"
어쩐지 주도권을 뺏긴 기분이라 조금 불쾌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말없이 입매를 옅게 올리며 택시를 잡았다. 이내 런던의 명물인 블랙 캡(Black Cab) 택시가 바로 앞에 멈춰 서자 라희를 먼저 태우고 그가 올라탔다.
"Where are you headed?(어디로 가십니까?)”
택시기사가 묻자, 그는 궁금해하는 라희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목적지를 말했다.
"London Eye, please.(런던 아이로 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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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