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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즈베리에서 타고 온 기차는 컴컴해진 런던에 도착해 목적지인 워털루역에 정차했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나와 워털루 역을 걸었다. 워털루 역(Waterloo Station)은 전체적으로 서울역 신청사 분위기와 비슷했다.
모던하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각종 프랜차이즈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안은 매우 붐볐다. 매일 아침과 저녁 런던의 남서부 근교에서 바쁘게 출퇴근하는 통근자들이 드나드는 곳이니만큼 평소에도 굉장히 번잡했다. 아마 런던에서 가장 붐비는 역 중 하나일 것이다. 예전에는 유럽으로 향하는 유로스타도 워털루 역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빠른 발걸음으로 오가는 바쁜 분위기를 접하니 확실히 국제적인 대도시 런던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났다.
"런던이네요."
라희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라희는 지쳐서 뻐근한 목을 가볍게 돌렸다. 한 시간 반 넘게, 거의 두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났더니 어쩐지 몸이 나른했다. 기차 안의 따뜻하고 건조한 열풍에 오랜 시간 동안 노출되어있어서 인지도 몰랐다. 보통의 철도 회사는 일등석을 타면 간단한 스낵인 쿠키나 과자 그리고 커피나 차, 주스 등의 마실 음료를 제공해 주는데 라희가 타고 온 사우스 웨스트 트레인(South West Train)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지치는 것일지도.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가 멍하고 목이 마르니 뭔가 마실 것이 필요했다. 평소라면 차를 찾았을 테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쌀쌀하고 잔뜩 흐린 날이라서 가벼운 차가 아닌 묵직한 것이 먹고 싶었다. 이를테면 커피나, 핫초코 같은. 물론, 진하게 우린 홍차에 크림이나 우유를 첨가해 마셔도 되겠지만, 음료마다 어울리는 분위기와 나름의 용도라는 것이 있으니, 이런 분주한 역에서는 여유로운 찻집보다야 도시 분위기 물씬 풍기는 커피숍에 가고 싶었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넓은 워털루 역 안을 훑었다. 일단, 진출입로 바로 앞에는 라희가 바스에서 다니던 K 어학원 옆에 보였기에 친근한 네로(NERO)커피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테이크 어웨이(take away: 테이크 아웃) 전문 부스였다. 몸도 나른한데 그냥 서서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내, 저쪽에 코스타(Costa)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코스타 커피는 영국을 대표하는 거대 커피 프랜차이즈로, 미국의 스타벅스와 종종 비교된다. 가격 대비 양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커피가 묽다는 평이 있었다. 라희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커피?"
라희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그가 짧게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타벅스요."
아직까지는 영국의 코스타 보다는 미국의 스타벅스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라희는 그와 함께 코스타 매장을 지나쳐 걸었다. 어디선가 워털루 역에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워털루역 출구로 나오니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밝은 조명을 환히 켜고 번화한 워털루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출구 바로 옆은 맥도날드였다. 라희는 스타벅스를 찾아 둘레둘레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다 갑자기 찬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오자 몸을 굳혔다.
런던의 날씨는 역시나, 솔즈베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온도 자체는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듯 느껴졌는데 특유의 습습하고 축축한 기후 때문인지 으슬으슬 등골이 시린 그런 스산한 날씨였다. 지금 라희가 입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코트는 실용성 보다는 심미적인 측면에 기능을 올인했는지 안 그래도 추운 런던의 날씨가 더 생생히 피부 위로 느껴졌다.
"으..."
갑작스레 외기에 노출된 라희가 실내와의 온도 차를 느끼며 몸을 가늘게 떨자 옆에서 그가 손을 단단히 잡고 맥도날드 옆으로 라희를 이끌었다. 맥도날드 바로 옆에 그렇게나 찾던 스타벅스가 바로 보였다.
"핫초코요."
"핫초코 하나, 에스프레소 하나. 다른 거는?"
직원을 향해 주문하던 그의 물음에 라희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았다. 라희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이 그가 주문한 음료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와 맞은 편에 앉았다.
"자."
"고마워요."
그가 건네는 핫초코를 받아든 라희는 뜨거운 음료를 한 모금 삼키며 추위를 달랬다. 달달하고 진한 핫초코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들고 몸이 약간 녹는 듯 느껴졌다. 맞은 편에 가만 앉은 그는 에스프레소 잔을 천천히 기울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 화면을 집중해 들여다 보았다. 라희는 그런 그를 힐끔 살피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분주한 런던 거리. 무채색의 건조한 도시다.
라희에게 런던은 처음부터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다른 평범한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처럼 배낭여행 같은 관광이나 어학연수 등의 학습을 목적으로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쫓기듯 방문한 낯선 도시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는데,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늦가을이면 하늘이 높고 청명한 한국과 달리, 영국, 특히 런던의 가을 날씨는 최악이었다. 라희는 악명 높은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리얼하게 체험했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초여름처럼 쨍하게 밝던 날씨가 정오가 되니 갑자기 흐려지다가 잔뜩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내 부슬부슬한 비를 추적추적 오후 늦게까지 뿌리고 나서, 저녁이 되면 뼛속까지 시린 스산한 바람이 불어 가을인지 겨울인지 도통 헷갈리게 만들었다.
가을용 카디건이 아니라 두꺼운 후드 집업이 필수였다. 비가 오면 번거롭게 우산을 가지고 다니며 펼치는 것보다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비를 피하는 편이 나았다.
이런 날씨 덕분인지, 런던에 머문 초기에 크게 앓았었고 그 후, 홈스테이를 구하고 플랫에 머무는 동안 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아 급기야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
라희는 그때를 회상하며 핫초코를 기울여 마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런던이 달갑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다. 완전히 낯선 곳에 의지할 사람,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이 홀로 방황하듯 유명 관광지를 하염없이 돌아다녔었다. 딱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런던에 오면 누구나 한번쯤 방문하게 된다는 관광코스인 버킹엄 궁전에 가서 근위병 교대식도 보고, 윌리엄 왕자가 결혼식을 올린 웨스터민스터 사원도 들어가 보았다.
영국의 위인들 동상이 쭈욱 늘어선 트라팔가 광장과 너무도 유명한 대영 박물관, 영국 박물관, 브리티시 뮤지엄 그리고 내셔널 갤러리 등의 문화시설은 물론이고,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로 향하는 기차를 탈 수 있다고 나온 킹스크로스 역의 9와 4분의 3 정거장까지도 방문했었다.
물론, 실지 킹스크로스 역에는 그런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모형으로 만들어둔 여행용 카트가 절반쯤 벽에 묻혀있는 가짜 정거장이 포토존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역사 직원의 도움으로 홀로 멋쩍은 인증사진까지 찍었다.
라희에게 런던이라는 도시는 관광지로서 매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대부분 혼자 방문해 보았으니까. 한군데를 제외하고.
".........?"
라희는 창밖에 고개를 돌려 앞쪽을 바라보았다. 워털루 역은 워털루 다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바로 앞은 유명한 빅벤과 타워브릿지가 있는 템스 강. 템스 강 주위에서 빅벤만큼이나 인기 높은 명소 한 곳은 차마 가보지 못했다.
라희는 눈을 살짝 들어 맞은편 앞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그는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생각 난듯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며 일어서서 카페 입구 쪽으로 걸어가 통화를 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라서 무슨 전화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제임스나 엘리자베스의 연락이거나, 음. 모르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희는 어제 물에 빠져 침수된 자신의 휴대폰을 떠올렸다. 운만 따라준다면, 아무리 강물에 휴대폰이 빠졌었다고 해도 이 삼 일간 완전히 말려 건조시킨 후 전원을 켰을 때 고장이 나지 않고 의외로 멀쩡할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라희는 휴대폰을 쓸 수 없다. 운이 나쁘다면, 아예 새로 하나 장만해야 할지도 몰랐다.
라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핫초코를 마시고 있는 사이, 전화 통화를 끝낸 그가 테이블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가만 앉아 라희를 바라보던 그는 짧게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어?"
라희는 거의 비워진 핫초코를 입가에 댄 상태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렸다. 그렇게 순순히 알려줄 리가. 힐끗 시선을 아래로 내려 테이블 위를 보니 그의 에스프레소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음료도 다 마셨겠다, 몸도 얼추 녹였겠다. 일단 밖으로 나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나가요."
스타벅스를 벗어나 다시 실외로 나와 걷는데도 뜨거운 음료로 속을 달래서인지 찬바람을 맞아도 아까보다는 덜 추웠다.
라희는 곧장 앞으로 걸어나갔다. 워털루역에서 5분여만 걸으면, 템스 강이 나온다. 그리고 워털루 역 방면 템스 강 기슭에는 라희가 혼자서는 차마 가보지 못했던 거대한 런던의 랜드마크, 둥근 자전거 휠을 닮은 대관람차인 런던 아이(London Eye)가 있다.
런던 아이는 총 32개의 투명한 캡슐로 된 회전 관람 탑승기구다. 한 캡슐당 약 20명 가량 탈 수 있는데, 거대한 크기 덕에 한 바퀴 관람하 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으로 굉장히 길었다. 20명의 사람들이 대부분 커플이나 단체로 들어와 관람하는 동안 혼자서 반 시간을 멀뚱히 서 있을 자신이 없었기에, 관람차 안에 들어가 탈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라희는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그를 곁눈질 했다. 이렇게 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런던의 관광코스는 혼자서 전부 클리어했으니, 이제 런던 아이만 타면 런던 관광을 끝낸 셈이 된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알아챈 그가 눈을 내려 라희를 응시하자, 라희는 고개를 앞으로 향해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앞을 보며 걷던 라희는 저 앞에서 너울진 환한 조명들과 사람들이 붐비는 소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시간에 대체 템스 강가에서 뭘 하는 걸까.
"야시장이야."
그가 답을 알려주려는 듯 낮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런던 아이 주변에 야시장이 선다고 들었었다. 야시장이라니, 색다른걸. 라희는 그의 손을 앞으로 이끌었다.
"저기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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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