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08화 (108/214)

108

미약하게 느껴지는 약한 진동. 간접 조명으로 밝은 실내. 탁 트인 창밖으로는 흐린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스쳐 지나간다. 윌트셔를 벗어난 기차는 쭉 뻗은 선로를 따라 미끈하게 움직였다.

지금 타고 있는 기차는 런던행이다. 라희에게 영국 기차는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비행기에서 막 내려 런던에 도착해 거의 한 달 동안 망가진 몸을 이끌고 사라네 집에 홈스테이를 하기 위해 바스로 향했을 때. 그때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몸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았기에 이런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간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웠다. 거기다 영국 특유의 억양과 발음 때문에 미국식 영어와 다르게 들려서 같은 영어라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낯선 곳. 혹시 불시에 무슨 일을 당해도 도와줄 사람 하나 없고, 심지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찾을 사람이 없다는 불안감에 줄곧 날카롭게 주위를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덕분에 2시간 조금 넘는 기차 여행을 마쳤을 때는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을 정도로 지쳐버렸었다.

바스로 향했을 때도 여자 혼자 타는 거라서 일등석 표를 구입해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었다. 오늘도 그때와 같은 일등석 창가자리. 하지만, 이번 여행은 혼자가 아니다. 그와 함께다. 이 낯선 생면부지의 땅에 누군가 아는 사람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

라희는 자신의 손을 줄곧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응시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와 함께 런던행 기차를 탈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 잠에서 깬 그가 런던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 했을 때, 비록 데이트 신청이라는 간질거리는 말을 듣긴 했지만 라희는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었다.

강요도, 의무도 아닌데 굳이 북적이는 연말에 그와 함께 런던으로 갈 이유는 없었다. 그러다 사라의 집에서 마주칠 소피를 떠올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고 네가 나쁜거야, 라는 말을 퉁명스레 내뱉었던 무서운 여자.

소피를 떠올린 라희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을 때, 그가 이마에 키스하며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런던에 함께 가자는 말을 건넸다.

"왕이요."

"왕?"

라희가 꺼낸 말에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궁금함을 표했다.

"왕 게임에서의 왕. 만약 왕을 할 수 있다면, 갈게요."

"좋아."

그가 동의했다.

"그리고 둘이서만 가요."

런던에 같이 가는 조건으로 하루 동안 그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지난번, 그와 함께했던 두바이 여행이 떠올랐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휘둘려 무작정 따라가야 했던 막막함. 그리고 참을 수 없었던 답답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그도 느끼게해주고 싶었다. 더불어 영국에서 혼자 우울했던 기억들과 불행한 기억을 덧씌워 뇌리에서 깨끗하게 지우고 싶었달까. 적어도 그와 함께라면 혼자는 아닐 테니까.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윌버리 하우스의 고풍스러운 다리를 벗어난 라희는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는 그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택시에 올라타 가장 가까운 솔즈베리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창구에 도착해 런던행 기차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런던까지 거리는 기차로 1시간 30분 남짓. 운행이 빈번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런던으로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순순히 런던으로 가기에는 너무 억울한데. 라희는 옆에서 가만 손을 잡고 서 있는 그에게 물었다.

"솔즈베리에 와 본 적 있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가 영국에 와서 아마 유일하게 만났을 지인인 제임스의 윌버리 하우스는 이곳 솔즈베리에서 택시를 타도 20여 분이나 걸린다. 평소 생활 모습을 생각해 볼 때, 바흐가 영국에서 비행기를 제외한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리는 만무하고, 분명 개인 승용차를 타고 이동했을 거였다. 그럼 여기저기 돌아다닐 리 없이 깔끔하게 목적지만 충실히 방문했겠지.

라희는 기차 시간표를 올려다보다가 그녀가 걸어들어온 솔즈베리 역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라희도 처음이고 그도 처음인 낯선 외국의 작은 도시. 마침, 시간도 점심시간. 라희는 그의 손을 잡고서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밥 먹으러 가요. 오늘은 왕이니 제가 살게요."

흐린 하늘 아래의 솔즈베리(salisbury)는 작은 전원풍의 도시였다. 영국에서 가장 큰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관광지도 아니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실상, 외부인들에게 솔즈베리라는 도시는 근교에 위치한 스톤헨지를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유명 관광지여서 고풍스러운 석조건물들이 즐비한 바스와는 다르게, 아기자기한 붉은 벽돌과 검은 기둥으로 지어진 아담한 건물들이 주를 이뤘다. 도심은 현대적인 상점이 늘어서 있었지만, 건물들이 낮고 작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담한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였다.

둘 다 처음인 낯선 도시를 손잡고 묵묵히 걸었다. 골목과 인도는 오래된 도시답게 매우 좁았고 상점들은 아기자기하고 낮은 건물에 주륵 늘어서 있었다.

어디서 밥을 먹을까 하며, 상점을 유심히 살피는데 버거킹, 맥도날드, 서브웨이 등의 프랜차이즈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타이, 중국 음식점 등이 눈에 띄었다. 인기 있는 관광코스인 스톤헨지로 향하는 경유지이다 보니 레스토랑은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조금 더 지나니 케밥 전문점 옆에 중국 음식점, 인도 음식점,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마루 ma:ru>라는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식당? 기대하지 않던 장소에서 한식당을 보니 반가웠다. 바스에는 한식당이 없는데 이곳은 스톤헨지로 유명하니까. 영국 여행 온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 하는 식당으로 보였다.

라희는 바흐의 손을 이끌었다.

"어서 오세요."

반가운 한국말이 들려왔다. 식당 주인은 당연하게도 한국사람이었다. 밝게 대답하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있으니 테이블 위에 따끈한 보리차와 메뉴판이 놓였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음식 가격은 관광지 물가인 데다가 여기서는 접하기 힘든 한국 음식이다 보니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한 끼 가격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 라희는 주머니 속 돈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이왕 내뱉은 말이니 어쩔 수 없지 싶었다.

그가 가만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라희는 포토 메뉴들을 찬찬히 넘기며 살폈다. 한국 음식이 사진과 영어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메뉴판은 된장찌개, 육개장, 김치찌개 등의 식사류와 김치전, 생선전, 육전 등의 전류, 그리고 떡볶이와 어묵탕이 보였다.

그냥 무난한 음식을 골라 먹을까 하다가 눈을 들어 앞을 보니 그가 유심히 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고요한 눈과 시선을 맞추고 있으려니 갑자기 은근한 심술이 돋았다.

"김치찌개 두 개하고, 김치전, 그리고 떡볶이 주세요."

오늘은 왕이니까. 그는 붉은 김치나 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희는 주문을 마치고 메뉴판을 덮은 다음 테이블 맞은편 가만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한국 음식이 그리웠는데. 잘됐네요."

"음."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미하게 좁혀진 미간이 풍기는 기색을 보니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내 식탁 위에는 밑반찬인 김치와 담백한 콩나물 무침, 그리고 달짝지근한 양상추 겉절이가 깔렸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메인 메뉴인 밥과 김치찌개가 갈색 뚝배기에 담겨 보글보글 끓는 채로 각자의 앞에 놓였다. 이어서 손바닥만한 김치전과 한눈에도 매워 보이게 새끈한 붉은색으로 온통 목욕 중인 통통한 떡볶이가 나왔다.

"와아. 정말 맛있겠는데요?"

라희는 테이블 위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입매를 과장되게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맞은편 그를 힐끔 살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글보글거리는 김치찌개 뚝배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색하게 앉아있는 그를 두고서 라희는 먼저 수저를 움직였다. 김치찌개는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달면서도 굉장히 매웠다. 추운 날씨에 대충 한 끼 먹기에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맛이라서, 순식간에 밥 반공기를 뚝딱 비울 수 있었다.

먹는 데 열중하다가 눈을 들어서 그를 보니, 그는 예의 단정한 식사 자세로 앉아 김치찌개와 숟가락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집어 반찬 삼아 밥을 먹는 중이었다.

역시나 싶은 반응에 속에서 쿡,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꾹꾹 억눌렀다. 라희는 웃음기를 지운 짐짓 태연한 얼굴로 그를 향해 매우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건넸다.

"정말 맛있는데, 손도 대지 않으셨네요.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그리고 약간 실망이라는 투로 작게 덧붙였다.

"이거 비싼 건데.... 제가 사는 거라구요."

그는 미간을 희미하게 좁히며 눈을 내려 테이블 위 식어가는 김치찌개를 응시했다. 한참을 가만 보고 있던 그가 마침내 오른손을 움직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라희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김치찌개를 떠서 입에 넣었다.

그의 표정은 순간, 극약이라도 삼킨 듯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아마 지금 그의 모습을 만화로 표현한다면 이마에 땀방울 수십 개는 그려 넣고 먹구름과 세로 선으로 도배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이었다. 입에 넣은 김치찌개를 차마 삼키지 못하고 가만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흐응..."

라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유심히 바라보자, 그는 마치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이 눈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뜨며 입안에 든 김치찌개 국물을 힘들여 꿀꺽 삼켰다.

"쿡...!"

라희가 고개를 숙인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거리는 사이, 그는 테이블 위의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다 사레가 걸렸는지 콜록콜록 크게 기침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될 때까지 기침하던 그가 숨을 고르며 목을 여러 번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라희가 진지하게 물었다. 바흐는 속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잠긴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라희는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가 손을 움직였다.

"그럼..."

라희가 그를 향해 떡볶이를 하나 집어 내밀었다. 쇠젓가락 끝에 붉은 고추장 소스를 뒤집어쓰고 큼지막한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박힌 통통한 떡볶이 하나가 걸렸다. 라희도 아까 하나 집어 먹어보았지만, 정말로 매웠다.

김치찌개는 달기라도 했지, 이 떡볶이는 간이 너무 쎄서 매운맛밖에 나지 않았다. 평소 떡볶이를 좋아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미 먹은 절반은커녕, 한입 먹고 입도 대기 싫은 매운 요리였다.

".......!"

라희가 내미는 떡볶이를 본 그의 눈동자는 바로 날카롭게 좁혀졌다. 이 남자. 긴장하고 있다. 라희는 목구멍에 걸린 웃음을 꾹 억눌렀다. 당연하게도, 입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 해볼래요?"

라희는 최대한 상냥하게 눈을 위로 올려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쩐지 재미있어서 장난스럽게 눈도 몇 번 깜빡여 보았다. 마치 만화 속 등장 인물처럼 속눈썹을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아?"

라희가 목소리를 잔뜩 위로 올리며 물었다.

"....."

이젠 곤혹스러운 표정.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이 거울에 금이 가듯 쨍하고 균열이 생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떡볶이에 눈매를 좁히며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싫어하는구나.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끔찍해하는 기색. 그렇다면....

"........네?"

라희는 다시 한 번 속눈썹을 잔뜩 깜빡이며 물었다. 그는 떡볶이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벌렸다.

라희가 젓가락을 움직여 그의 입안에 떡볶이를 넣어주자. 정말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 천천히 씹었다. 경직된 표정으로 줄곧 식탁 위 물컵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마침내 다 씹었는지 힘들게 삼켰다. 마치 꿀꺽 소리가 효과음 처럼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극적으로 떡볶이 하나를 먹어치운 그는 그대로 바로, 손을 앞으로 거칠게 뻗어 물컵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하아......"

물을 몇 컵이나 마셔도 매운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정말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눈가까지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있자,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라희는 테이블 위 덩그러니 놓인 김치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 저것까지는 무리일 테지. 김치전도 만만치 않게 매우니까.

아쉽지만. 포기하니 후련한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리고서,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데 그가 벌떡 일어나 손에 들린 계산서를 낚아챘다.

의아해하며 올려다보는 라희를 향해 그가 힘들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Let me serve you. Your majesty. (제게 맡겨두십시오. 폐하.)"

새삼, 김치전을 먹이질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차는 쉼 없이 달렸다. 창가에 앉은 라희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그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하루종일 잔뜩 흐렸던 하늘은 이제 늦은 오후가 되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 이내 컴컴하게 어두워졌다. 3가 넘어가면 벌써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 영국 특성상, 점심을 먹고 역으로 돌아와 기차를 탔으니 시계를 굳이 보지 않더라도 이제 곧 있으면 런던에 다다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런던이라.....

라희는 어두운 차창에 비치는 그녀 옆에 앉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내, 차창 너머에서 눈길이 마주치자 라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의 어깨에 가볍게 기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3회에 매운음식 싫어하는 바흐가 나와요 ㅋ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