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107화 (10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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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리부터요."

라희는 윌버리 하우스 현관 앞에 서서 저 멀리 네더강 위에 서 있는 팔라디오 풍 다리를 가리켰다.

원래 계획은, 예전에 한마디 말없이 이리저리 라희를 끌고 다녔던 바흐처럼 행동하려 했었는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상대방이 곁에 있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던가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절대 열지 않던가 하는 나름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그처럼 침묵을 오래 연마해 의뭉의 달인이 된 것도 아닌 라희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라희가 본래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해 짧은 한숨을 삼키며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가 힐끗 다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분부대로(At your service)."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라희가 먼저 다리를 향해 움직이는데, 갑자기 뒤에서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우뚝 멈춰선 순간, 라희의 몸이 약간 휘청이면서, 그에게 밀착되었다. 허리 부근에 손길이 느껴지자 라희는 잠시 숨을 멈췄다.

오늘 라희가 입고 있는 코트는 엘리자베스 것으로, 그녀에게서 잠시 빌린 코트였다. 라희의 한 벌 밖에 없는 외투는 젖은 상태 그대로 제임스가 검식을 의뢰한다며 가져갔다. 라희보다 키가 큰 엘리자베스의 코트는 기장은 길고 품은 좁았다. 팔머 남매와 짧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윌버리 하우스 현관문을 나와 찬 기운에 몸을 떨며 급히 단추를 여며 잠그자, 코트는 그야말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에 딱 달라붙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상태로 그가 허리께에 팔을 감아오자, 몸과 밀착된 코트 때문인지 마치 맨살에 팔이 닿은 것 같아서 느낌이 조금 묘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그와 함께 걸을 때는 늘 이 자세였다. 불편했지만, 내색하거나 거부하지 못했다. 그땐 감히 그에게 말조차 건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2억이라는 액수가 마음속 무겁게 내려앉아 목구멍에 콱 걸리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키스 값으로 치른 셈 치면 바흐와는 현재 그 어떤 관계도,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어제 거의 죽었다 살아나 너덜거리며 넝마주이가 되기 직전인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철면피 같은 뻔뻔함이 간절히 필요했다.

라희는 몸을 비틀어 그의 팔에서 벗어났다.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서 조금 의아한 듯 바라보는 그를 곧게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불편해요."

그는 깊은 눈매로 작게 중얼거리는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이면 잔뜩 무서워했겠지만, 그의 눈빛은 전처럼 강요하는 기색도, 소피처럼 사악한 악의도 담겨있지 않았다.

서로 멈춰 서 있는 거리는 딱 한 걸음.

라희가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대신 손, 잡아요."

조심스레 내민 작은 손을 마주 잡아오는 커다란 손. 그의 크고 긴 손안에 작은 손이 쏙 들어갔다. 손으로 마주 닿은 온기를 느끼며 두 사람은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

말없이 손만 잡고 걷다 보니 정말로 어색했다. 라희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돌려 저만치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느꼈던 것처럼, 오늘은 어제와 달리 날이 아주 흐렸다. 영국의 겨울은 대걔 영하로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 한국과 비교해 그다지 추운 편은 아니지만, 이렇듯 흐리고 습습한 날에는 약간 으슬으슬하게 몸에 감겨오는 특유의 추위가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라희가 실외와는 다른 낮은 온도에 몸을 약간 떨자, 그가 라희를 힐끔 내려보더니 마주한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바닥으로 따스한 감촉이 전해졌다.

햇빛 없이 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인지 발밑에 밟히는 잔디도 차게 굳어 서걱거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윌버리 하우스 앞 너른 잔디 광장을 지나 네더 강기슭에 이르렀다.

흐린 날 때문인지 맑은 날 로맨틱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룩진 세월의 흔적들이 고풍스러워 보이기보다는 음침하고 조금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다리가 가까이 보였다. 라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다리로 걸었다. 그는 옆에서 고요히 묵묵히 따랐다.

오래된 석조 다리 초입에 다다르자, 라희는 이곳에서 어제 루퍼스를 마주했던 것을 떠올렸다. 정확히 하루 전, 끔찍했던 기억. 하지만 아침에 잠든 그를 올려다보며 내내 생각했던 일을 해야 했다.

지나간 과거는, 결코 바꿀 수 없으니까.

지난번 사라가 사다 준 마카롱을 먹으며 결심했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서 벌벌 떨다가 막 벗어나자, 이제는 정말로 그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불쾌하고 악몽 같았던 기억을 덧씌워 편안하게 회상할 수 있는 추억으로 만들어 갈 거다. 먼 훗날, 나중에라도 죽기 직전,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모두 회한은 아니기를.

라희는 굳은 눈을 들어 괴괴히 놓여 있는 다리를 응시했다.

일단, 윌버리 하우스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인 이곳부터. 아름답다 소문난 고택의 로맨틱한 다리를 떠올릴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회상하기는 싫었다. 라희는 다리를 보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 상상만큼 쉽지 않았다. 라희는 숨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쉭쉭거리는 검은 개가 쫓아올 것만 같다.

움찔.

라희의 발걸음이 아주 찰나, 흠칫 굳었다. 그걸 알아챈 바흐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안심시키듯 지그시 누르자 묘한 안도가 찾아오면서 날 뛰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라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어제 떨어졌던 그 자리로 걸어가 멈춰 섰다.

고요한 다리 위에 서니 새삼, 끔찍했던 공포와 맞닥뜨렸던 생생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잠시 굳어 머뭇거리던 라희는 뻣뻣하게 경직된 고개를 돌려 다리 난간 너머 강을 들여다보았다. 흐린날씨임에도 에메랄드 빛 강물은 수정처럼 맑아서 강바닥이 훤히 비쳐 보였다.

여기, 빠졌었지.

강물을 내려다보며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래에 잡은 손이 스륵 풀리더니, 이내 라희의 어깨에 그의 손이 내려앉았다.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는 그의 손길에 라희는 가만 몸을 맡겼다. 고개가 비스듬히 그를 향해 기울자, 라희의 정수리 위에 가볍게 머리를 기대온 그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들어 가고 싶어?"

뭐? 순간, 황당함을 느낀 라희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높게 되물었다.

"네?"

이 남자가 대체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곳에서 어떻게 빠졌었는지 잘 알면서. 잔뜩 찌푸려진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를 매섭게 쏘아보자 그가 검은 눈동자를 움직여 비스듬히 내려보았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가 미끄러졌다. 먼저 시선을 피한 사람은, 예상외로 그였다.

그는 그대로 눈을 아래로 비켜 흐르는 강의 수면을 가만 응시했다. 라희가 그를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흐는 자신을 바라 보는 라희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침묵.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라희가 미간을 찡그리고서 대체 무슨 소리였냐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냐며 한소리 하려고 입을 벌리려는 찰나, 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다시 빠진다 해도. 몇 번이고 들어가 꺼내올 거니까."

벌어지려던 작은 입술 끝은 미세히 떨렸다가 이내 천천히 다물렸다. 얼굴에 어쩐지 열기가 차오르는 거 같아서, 라희는 급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때, 머릿속 번잡한 생각들을 이리저리 흐트러뜨리듯, 그의 긴 손가락이 가만 서 있던 라희의 머리 위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하지만 어쩐지 어색한 손놀림이었다. 그는 그걸 내색지 않으려는 듯 조금 더 힘주어 라희의 머리 위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서로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비킨 얼굴 위에서 그의 손끝에 휘감긴 머리카락이 눈썹 위를 부드럽게 스치며 간질였다. 추운 날씨인데도 왜 춥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라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다음에 날씨 좋을 때 다시 올까."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덮인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가볍게 머리를 매만지던 커다란 손은 이내 아래로 내려와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차가운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단단히 마주 잡은 그의 손에서 전해진 따스한 온기에 이끌려 라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벗어난 그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고개를 수그린 라희를 조용한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짧게 물었다.

"Where?(어디로?)"

질문을 받은 라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록 한국어와 영어로 언어는 달랐지만 어딘지 익숙한 질문. 가만 내려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라희는 피식, 입가에 번지려는 웃음을 수습하며 속으로 삼켰다.

처음에 생각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라희는 뭔가를 생각하느라 눈을 위로 굴리는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고 나서 힐끗, 시선을 던져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해하고 있는 그를 향해, 라희는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84회에 마카롱 보면서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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