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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06화 (106/214)

106

커튼 사이로 환히 밝은 아침. 하지만 빛은 평소보다 약하다. 피부 위에 느껴지는 습습하고 눅눅한 공기. 어쩌면 밤새 비가 왔을지도 모르는 흐린 날. 하지만 몸을 둘러싼 따스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코끝에 가득 스미는 은은한 향기. 좋다.

잠결에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라희는 몸을 감싼 온기와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의 이유를 알았다. 눈을 뜬 곳은 그의 품 안. 라희는 나른하게 위로 들린 속눈썹을 몇 번 깜빡였다. 어깨를 감싼 묵직한 느낌. 침대에 누운 라희의 어깨와 등을 그가 감싸 안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가 기척을 느끼겠지? 라희는 곤히 잠든 바흐가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턱을 위로 비틀었다.

잔뜩 눈을 올려 위를 바라보니 투명한 갈색 눈동자 안에 그의 얼굴이 가득 비쳤다. 라희는 조용히 눈을 굴려 그를 찬찬히 살폈다.

짙고 고른 눈썹. 그 아래 가지런히 내려앉은 섬세한 속눈썹. 양미간 사이로 뻗어내린 높고 곧은 콧날. 약간 고집스럽게 다물린 차분한 입술. 그리고 남자답게 적당히 각진 날렵한 턱선. 매끄러운 뺨은 아침이라서인지 수염이 살짝이 돋아났다. 조금 오돌토돌하겠지? 만져보고 싶다.

라희는 손끝을 움직이려다 그만두었다. 참아야 했다. 그의 뺨에 손을 뻗어 만지면, 그가 곧장 잠에서 깰 테니까. 가만 올려다보고만 있어도 어느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이 순간을, 마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보는 일은, 지난번 알 마하 리조트에서 그가 아파 누워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다. 그땐 침대에 턱을 괴고 앉아 고열에 시달리는 그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그의 품 안.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커다란 몸이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얕은 호흡 소리가 들려온다. 흐린 아침, 길게 내린 하얀 커튼 사이로 비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그의 숨소리는 어쩐지, 나직이 읊조리는 자장가 같다.

라희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눈을 내리고 따스한 그의 품에 몸을 웅크려 조금 더 파고들었다. 탄탄한 가슴팍이 뺨에 닿자, 얇은 셔츠 너머 체온이 담긴 온기가 전해진다. 피부에 스며드는 그의 은은한 체향.

오르락내리락, 호흡하는 작은 움직임에 기분이 좋아져 눈이 절로 감긴다. 살며시 눈을 감고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다시 나른한 잠결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라희는 잠결에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는 섬세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 앞은 온통 하얀 셔츠. 여전히 그의 품 안이다. 눈을 재차 깜빡이자, 속눈썹이 셔츠에 닿아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를 냈다. 그러자 흐트러진 뒷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섬세히 만지던 손길이 서서히 멈췄다.

"깼어?"

머리 위에서 그가 물었다. 그의 품 안에 밀착해있으니 나직한 그의 음성이 귀가 아닌, 가슴과 마주 댄 머릿속으로 울려 전해져왔다.

"네."

라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음."

그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낮은 신음을 작게 삼켰다. 그리고 찾아온 익숙한 침묵. 하지만, 예전처럼 숨이 막힌다거나 가슴이 답답하지 않다. 그저 주위를 감싼 공기처럼 그와 함께 있으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단순한 침묵이었다.

바흐는 품에 안긴 라희의 어깨를 감싸 깊이 끌어당겼다. 라희가 놀라 고개를 들자, 이내 아래로 내리깐 비스듬한 시선과 마주쳤다. 라희를 내려다보는 깊고 검은 눈매 끝이 살짝 가늘어졌다.

"......런던."

그가 입을 열었다. 런던? 무슨 소리지? 라희는 눈을 올려 뜨고 단정한 그의 입매를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같이 갈래?"

갑작스러운 물음에 라희는 대답 없이 눈을 크게뜨고 있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바보.

라희는 스스로에게 야유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유진과의 계약은 끝났다. 이제 그의 앞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입을 굳게 다물고 있거나 잔뜩 위축되어 웅크리고 있지 않아도 되는데.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대하듯, 그리 대하면 될까.

그래도, 어색한걸. 누구처럼 대해야 할까. 주변에 바흐를 제외한 남자라고는 오빠 그리고 뿔테. 이 둘 뿐인데, 둘 다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누구.

찰스? 찰스라면, 혹여 다가올까 싶어 일부러 쌀쌀 맞게 대했어도 그나마 마주했을 때 심적으로는 부담감 없이 편했으니까. 그럼 찰스에게 하듯이 그를 대하면 되는 걸까.

라희는 망설이며 미간을 좁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조금 목이 잠긴 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왜요?"

질문. 그래, 궁금하니까. 왜 런던에 가자고 하는지. 라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그를 상대로 어렵사리 입을 뗀 스스로를 칭찬했다.

"........"

그는 잠시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피식,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그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드문데.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라희를 향해, 그는 손바닥으로 품 안에 안긴 가녀린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데이트 신청."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 했다.

***

"좋은 아침이에요. 라일라."

식탁에 앉은 엘리자베스가 토스트 조각을 손에 들고 버터를 바르다가 라희를 발견하고선 밝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군요. 팔머 양."

라일라가 인사하자 엘리자베스는 입가를 가늘게 끌어올리며 우아하게 지적했다.

"이런, 가슴 아픈데요? 난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렇게 거리를 두고 성으로 답하다니요. 부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라일라."

"좋은 아침이에요. 엘리자베스."

"고마워요."

그녀는 이내 눈을 좀 더 들어 라희 뒤에 서 있는 바흐를 향해서도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데이빗 오빠. 평소 무뚝뚝한 얼굴이 조금 풀어진 걸 보니 뭔가 즐거운 일이 있나 보군요?"

엘리자베스가 호기심을 담고 묻자, 그는 말없이 식탁으로 다가가 라희에게 의자를 빼내 주고 자리에 앉아서 엘리자베스를 향해 물었다.

"으음. 제임스는?"

"오빤, 지금 바쁘다구요. 아침부터 위층 방에서 바스 시장과 통화 중이거든요. 대화 주제는 바스 로얄 하스피탈에 시설 개선 기부금을 얼마하면 적당한가지만, 실상, 내용이야 아시잖아요. 그런데 기부금은 제임스 오빠 명의로 하고 실지 돈은 오빠가 건네기로 했다면서요? 역시 용서가 되지 않았나 보죠?"

엘리자베스는 미묘한 미소로 은근히 말꼬리를 올렸다.

"음."

바흐는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준비된 아침 식사가 식탁 위에 놓였다. 아침 메뉴는 영국의 정통 메뉴로 금테 두른 접시에 담은 바삭구운 베이컨과 본리스 햄, 스크럼블드 에그, 베이크드 빈스와 갈색 그릴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통통한 소세지와 신선한 토마토였다.

맛은 훌륭했다. 시중에 파는 것들로 대충 준비하지 않고 모든 품목을 팬든 백작가의 요리사가 정성 들여 준비한 것으로, 가내에서 직접 만든 수제 베이컨에, 수제 햄, 수제 소시지였다. 특히 베이크드 빈스는 직접 토마토 소스에 오랜 시간 졸여 맛이 아주 풍부하고 진했다. 어제 거의 굶다시피 해서 식욕이 더 좋은 건지도 몰랐다. 라희는 맛있게 요리들을 먹기 시작했다.

고소한 버터와 생크림 향이 가득 풍기는 부드러운 스크램블드 에그를 포크로 떠먹던 라희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들었다. 이내 눈길을 마주한 엘리자베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잘 쉬었어요? 몸은 어때요? 차가운 물에 빠져서 걱정이었는데 혹시 감기나 몸살 기운이 있나요?"

"괜찮아요. 몸 상태는 정상인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엘리자베스는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라일라."

"네에?"

라희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엘리자베스가 라희 옆에 앉은 바흐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 말씀드린 것과 달리, 이번 일 때문에 일정이 조금 당겨지게 되었어요. 원래는 내일 아침에 여기를 떠나 런던으로 가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어제 사고 처리를 위해 오빠가 긴히 만날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오늘 런던으로 떠날까 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엘리자베스는 약간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어제 라일라가 거절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묻고 싶어서요. 혹시 연말에 정해진 일정이 별달리 없다면..."

"어. 갈 거야."

엘리자베스 말을 도중에 끊는 바흐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네? 뭐라구요? 오빠?"

"갈 거라고. 같이."

바흐가 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런던으로."

라희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기로 했었다. 아침에 그가 이마에 키스하며 다시 한 번 같이 가 주지 않겠느냐고 정중히 부탁했으니까.

"정말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축하해요. 오빠."

엘리자베스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라희의 왼손에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정말 첫날 라일라의 손에 걸린 하늘색 반지를 보고서,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새해 첫날을 이 우중충한 두 남자와 함께 맞이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턱 막히더라구요."

라희는 엘리자베스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반지. 반지를 어디다 뒀지? 가방? 아니다. 윌버리 하우스에서 내내 끼고 다녔었다. 어제 소피를 배웅했을 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안에 두었던가? 라희는 의문을 멈췄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버리지 않았으니 어딘가에 있겠지.

"음. 그런데."

바흐가 불쑥 입을 말을 꺼냈다.

"움직이기는 따로 움직일거야."

엘리자베스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리며 궁금한 기색을 표했다.

"네? 따로라뇨? 오늘 함께 런던으로 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 짐만 먼저 부탁할게. 들고 다니기는 번거로우니까."

"??"

엘리자베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자, 그는 라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서 말했다.

"충실히 요청 받은 대로 하려고."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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