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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뜬 거 같지가 않다. 라희는 그대로 망연히 눈을 잠시 깜빡였다. 그가 하는 말들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 라희는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비스듬히 일으켰다. 침대에 허리를 구부려 앉으니,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머리가 약간 어질했다. 핑그르르 한 현기증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눈을 깜빡이다가 아래로 눈을 굴려보니 옷이 바뀌어 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젖은 옷을 벗겼다는 말을 들었다.
방안의 온기를 머금어 따스한 감촉의 뽀송한 옷. 아마도 엘리자베스가 했겠지. 여행 가방에 챙겨 왔던 얇은 흰색 긴 팔 티셔츠다.
라희는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자신의 몸을 훑었다. 소맷자락 너머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이 보인다.
단단하고, 딱딱한 제법 무게가 있는 전자기기의 느낌. 손에 든 휴대폰의 감촉은 진짜다. 이건, 정말로 이유진의 휴대폰.
라희는 다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바흐가 조금 전 말했던 말도, 그럼 사실. 하지만 어쩐지 현실감이 없다. 전혀 사실인 것 같지 않다. 라희는 굳은 듯 멈춰있던 눈동자를 위로 굴려 침대 옆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워 있을 때보다 가까운 거리. 그래서인지 순식간에 눈이 마주쳤다. 라희는 재빨리 눈을 내려 컴컴한 화면의 휴대폰을 응시했다. 지난번, 이 폰을 마주했을 때는 음성 녹음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REC 글씨가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날 받은 1억의 치명적 대가는, 2억.
귀로 듣고, 증거까지 손에 쥐고 있어도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다.
조금 전, 그가 했던 키스의 값이 2억이라고?
꿈인가? 아직 꿈인 건가. 물에 빠진 채로 정신을 잃어 지금도 의식을 못차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아. 작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는 요정이 곁에 서 있는 것도 아닌데 꼬이고 꼬인 일이 이렇게 마법처럼 술술 풀릴 리가 없다. 2천 원, 2만 원도 아닌 자그마치 2억 원인데.
고작, 키스 한 번이라고?
라희는 허망하게 앞으로 보며 눈을 깜빡였다.
좋다. 수줍게 눈감은 왕자에게 선심 쓴 키스 한번으로 눈 녹듯 없던 일처럼 되는 거라면. 그럼,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부터는?
바흐와의 계약도 없고, 유진과의 계약도 그에 의해서 끝났다. 그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건가. 금전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
그럴 리가.
처음 빌렸던 5천만 원도 계약서를 쓰고 계좌 거래를 마쳤다. 두 번째 유진에게 받았던 1억도 녹취를 하고 계좌로 실물인 돈을 이체받았다. 그런데, 그 어떤 번거로운 과정이나 절차 없이 그냥 이게 끝이라고?
고작 키스 한 번으로? 자유?
한참 동안이나, 입을 굳게 다물고 손안에 든 휴대폰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라희는 머릿속에서 풀지 못한 복잡한 수학 문제의 답을 묻는 학생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큰돈을 내게? 2억이라는 돈이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장난처럼 쾌척하듯 남에게 건넬 수 있는 돈인가?
그와 계약했던 5천만 원도 변호사 입회하에 계약서를 작성했었다. 5천만 원의 4배에 해당하는 돈인데.
이렇게, 간단히 키스 한 번으로?
아닐 거다. 세상일이 이렇게 쉬울 리 없다.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잔잔한 심연 같은 눈을 마주한 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침묵과 닮았다. 깊이를 알 수 없고 표정도 쉬이 읽히지 않는 사람. 그래서일까, 그가 해준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가 굳이 영국까지 찾아와 2억을 건넨단 말인가.
그때, 불현듯 라희의 뇌리에 깊게 각인된 사실 하나가 빠르게 스쳤다. 뱀처럼 서늘하게 팔목을 휘감았던 가늘고 긴 손가락의 감촉. 비웃는 듯 비틀어져 올라간 붉은 입술.
혹시, 자동차 사고 때문에? 오빠가 충주에서 낸 사고. 이유진의 말로는 바흐가 P사의 외제 차를 지난여름 폐차했다고 했다. 그것도 사고로.
따지고 보면, 바흐와 계약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그 사고였다. 자동차 보험으로 충당되지 않았고, 집안의 여력으로도 어림없던 그 돈. 무시무시한 사적인 채무 오천만 원.
거기까지 떠올린 라희의 표정은 창백하게 굳었다. 그는 뭔가를 집중해서 생각하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서 라희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죄책감인가? 고의로 자동차 사고를 내서, 금전으로 압박해 계약한 것에 대한? 유진이 흘리듯 말해 버린 것을 바흐가 알아 낸 건가? 뒤늦게 그것에 대한 대한 속죄로?
한동안 생각을 거듭한 라희의 입가에 점점 싸늘한 냉소가 번졌다.
".........차 사고, 때문인가요?"
잔뜩 냉소로 끝이 일그러진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그는 무감한 얼굴에는 잠시 의문이 어렸다가, 곧 사라졌다. 그는 이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라희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그간, 수도 없이 묻고 싶었지만, 그가 부재했었기에 물을 수도 없었고, 영국에서 마주친 이후로는 유진과의 계약 때문에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어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던 물음. 날카로운 가시처럼 심장을 찌르며 옥죄어오던 차 사고에 대한 진실. 이제, 그의 말대로 유진과의 계약이 끝난 거라면, 반드시 그에게 사실을 물어야 했다.
"친절하게도, 이유진씨가 말해주더군요. P사의 자동차, 사고로 폐차했었다고요. 그것도 아주 공교롭더군요. 하필 사고난 시기가 지난 여름이었다죠."
그간 위축되어있던 모습과 달리 당당히 노려보는 도전적인 눈과 마주치자, 그의 깊은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단정한 입술 끝이 의외라는 듯 조금 움직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별안간 몸을 기울여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
순식간에 뜨거운 입술이 다시 와 닿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라희의 뒷덜미를 손으로 감싼 그가 입술을 겹치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턱이 위로 들리고 비스듬히 기운 얼굴이 깊게 키스해왔다. 조금 전 진한 키스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지금은 굳게 닫힌 입술의 맞물린 틈을 힘주어 가르고 물기 어린 말캉한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매끄러운 혀가 일순 입안을 휘젓는다. 사르르 부드럽게 감기고 미끈하게 흘러드는 감촉.
부들부들 녹아 없어 것 같은 감미로운 감촉이 지금은 전혀 달갑지 않다. 다짜고짜 들이미는 혀는 그간 일방적으로 휘둘림당한 소리 없는 폭력같이 불쾌하고 거북했다.
라희는 팔에 힘을 주어 휘둘러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손바닥으로 넓고 단단한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그의 몸이 뒤로 주춤 밀리면서 뜨겁던 입술이 삽시에 떨어졌다.
"하지, 마요!"
신경질적인 날 선 외침이 높게 튀어나왔다. 씩씩거리며 눈을 치켜뜬 라희를 그가 흥미롭다는 듯 이채를 띈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이 가늘게 좁혀진 곧은 눈매가 라희를 향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방안에 말 없는 두 시선이 날카롭게 마주했다. 그 어느 때 보다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오는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에워쌌다. 그때였다.
-딸깍.
침대 왼편의 방문이 빠르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평소의 격식 차린 말투와는 조금 다르게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높게 들려왔다.
"데이빗 오빠, 제임스 오빠가 CCTV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1층으로...."
열린 문틈으로 엘리자베스가 들어서며 호들갑스럽게 말하다가 문득, 방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주춤거리며 방안을 살피다가, 문에서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을 향해 고개를 돌린 라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엘리자베스는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응? 라일라 깼어요? 다행이에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었는데요. 의사가 곧 일어날 거라 일러주긴 했었지만, 혹시나 깨어나지 못할까 봐 내내 마음 졸이며 조마조마했다구요. 1층에 내려가서 햄버튼에게 들었는데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하루종일 굶은 셈이라서 정말 배고플 텐데. 같이 먹을래요? 우리도 막 저녁 식사를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지금 밑에다가 라일라 것을 준비하라....."
"엘리자베스."
바흐는 엘리자베스의 빠르게 이어지는 말을 단숨에 이름을 불러 끊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놀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엘리자베스 쪽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서, 눈앞의 라희를 줄곧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자리를 피해 주었으면 하는데."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라희와 바흐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기류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으, 응.. 알았어. 오빠."
몸을 뒤로 돌려 방문 고리를 잡은 엘리자베스의 등에다 대고, 바흐가 짧게 말했다.
"아침까지."
그 말에 흠칫 놀란 엘리자베스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가, 몸을 움직여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굳게 닫힌 방안에 다시 단둘이 남게 된 라희는 눈을 올려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며 대치 중인 가운데, 그는 짧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팔을 움직였다.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면서, 바흐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한마디 말없이 손가락만을 움직여 화면 위 버튼을 툭툭 눌렀다. 가볍게 화면과 맞닿은 손끝이 조용한 방안에 단조로운 울림을 만들어 냈다.
상당히 긴 번호를 연달아 누른 그는 라희에게 비스듬한 시선을 던지며 손안에 든 휴대폰을 보라는 듯, 그녀를 향해 화면이 보이게 돌렸다.
김만호
화면에는 현재 연결 중인 통화대상이 또렷한 글씨로 선명히 떠 있었다.
누구지?
낯선 이름에 라희의 눈이 의문으로 좁혀졌다. 바흐는 긴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 하단의 스피커폰 전환 버튼을 눌렀다. 바로, 조용한 방안 가득 신호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뚜르르, 뚜르르...
정신을 차리고 나서 시계를 보지 않아 지금 정확한 시간을 확인할 수 없지만, 영국이 저녁이라면, 한국은 한밤중이거나 이른 새벽일 시간일 거였다. 정적을 가르며 한참 뚜르르 울리던 신호음은 띡, 하는 통화 연결음과 함께 뚝 끊겼다.
"으....."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음소리. 막 잠에서 깬 듯 조금 짜증이 배어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기척이 들렸다.
"........김기사입니다. 사장님."
휴대폰 저쪽에서 아직도 잠에 잠겨있는 듯 들리는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대답했다. 바흐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서 라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직이 입을 움직여 말했다.
"한밤중에 미안하군. 긴히 물어볼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
"아, 예. 괜찮습니다. 사장님. 말씀하십시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서울에서 바흐의 차를 탔을 때 종종 마주쳤던 사람. 라희의 머릿속에 그간 잊고 있던 김기사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얼굴과 목소리와 매치되었다. 확실하게 맞다. 김기사의 목소리다.
"지난여름 폐차한 차 말이야."
바흐가 말했다.
"아, Porsche 918 스파이더. 지난해 9월 18일을 기념해 한정발매되어 독일에서 예약주문으로 구입하셨다가 5월 인도된 차 말씀이십니까."
김기사는 조금 지난 자신의 묵은 기억을 떠올리며 동시에 몽롱한 잠도 깨기 위해서인지 생각보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길게 대답했다.
P사 스포츠카. 유진이 말했던 차량이 김기사에게서 언급되자, 두근 두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라희는 긴장으로 손가락 끝에 잡힌 침대 시트를 가득 움켜쥐었다.
"그래. 918. 무슨 색이었지?"
"은색입니다. 사장님."
은색? 라희의 눈동자에 의문이 스쳤다. 오빠가 사고 낸 상대차는 검은색 외제차라 들었는데. 그는 잔뜩 귀를 기울이고 기민하게 집중하고 있는 라희의 눈두덩을 내려보며 말했다.
"사고 처리 자네가 했지."
"예."
사고 처리? 본격적인 차사고 이야기다. 색깔은 잘못 기억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나중에 오빠에게 전화해서 확인해보면 되니까. 두근, 두근. 떨림이 계속되었다. 손끝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확실히 한 거 맞나?"
바흐가 명료하게 묻는 말에 정중한 답이 돌아왔다.
"예. 확실히 했습니다."
바흐는 조금 귀찮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쉬고 나서 라희와 눈을 맞췄다. 그는 김기사에게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어디에서 사고가 났었지?"
라희는 귀를 기울였다. 지난여름, 그 불행하고 끔찍한 차 사고는 라희네 과수원 근처 면사무소를 지나는 국도와 연결된 농로길에서 났었다. 김기사의 대답을 기다리며 라희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천대교 고속도로 송도 IC 부근입니다."
인천? 충주가 아니고? 순간, 예상외의 대답에 놀란 라희가 눈을 크게 깜빡이자 그것을 힐끗 본 바흐가 짧게 물었다.
"사고경위는?"
김기사는 이제 잠이 완전히 깬듯 바로 대답했다.
"당시 차량이 고속으로 주행하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반동으로 튕겨 가드레일과 부딪쳐 전복되었습니다. 차량이 두 번 구르고 뒤집히면서 전복되어 전창 파손, 양 문짝 모두 파손, 천장 파손, 타이어 분리되고 차축이 휘어 대파되었습니다. 차량은 폐차했습니다. 단독사고로 피해차량이나 대인 피해는 없었고 사고는 자기차량손해로 차량가액만큼 보험처리 했습니다. 다행히 차량 사고 시 6개의 에어백이 모두 팽창했기에 사장님은 경상만 입으시고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하셨습니다."
라희는 숨죽여 스피커폰으로 들려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고속도라고? 농로가 아니고? 거기다 차량 추돌이 아닌 빗길 전복사고.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기사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뾰족하게 날카로웠던 신경이 망연하게 가닥가닥 무너지며 풀어졌다. 손아귀의 힘이 스륵 풀리면서, 낭패감에 휩싸였다.
잔뜩 죄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이지러지면서 허탈감이 엄습했다. 라희는 애먼 아랫입술만 잘근 짓씹었다.
"알겠네. 늦은 시간에 실례했군. 당시 보험 처리한 거, 사고내역 서류 찾아서 내일 날 밝는 대로 EMS, DHL, FEDEX, UPS 중에 아무거나 가장 빠른 국제 특송으로 보내주게. 주소는 문자로 보내지."
"네. 사장님."
"그런데."
바흐는 힘없이 아래로 고개를 내리 떨군 라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번거롭겠지만 다시 한 번, 말해주길 바라네. 사고 장소가 어디였는지."
"인천대교 고속도로 송도 IC 10km 부근 커브 길입니다."
김기사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고맙네. 그럼. 이만 끊지. 단잠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사장님."
바흐는 액정 화면 위 붉게 빛나는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잔뜩 어깨가 아래로 처진 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로써, 궁금한 점이 서로 풀렸기를 바라."
서로? 사고 장소 이후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데 서로라니? 그도 궁금한 점이 있었던가.
"....서로라니요?"
시선을 침대 시트로 내리꽂은 라희가 떨떠름하게 되묻자, 그가 말했다.
"나 역시 궁금했거든. 그녀에게 돈을 받아 계약을 해지한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지만, 나머지는 대충 시늉만 냈어도 될 듯했는데, 정말로 독하게 마음먹고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종적을 감췄는지 말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이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자, 라희는 침대 시트를 힘없이 움켜쥔 손을 꼼지락 폈다가 오므렸다가 폈다가 하면서 어색한 시간을 견뎠다.
"송라희."
그가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라희는 흠짓 놀랐다. 놀라 굳은 어깨를 내려다본 그가 말을 이었다.
"마음속으로 품었던 의문이 무엇이던 간에, 나에게 씌워진 혐의가 조금이라도 벗겨졌다면. 고개를 끄덕여주겠어?"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자 라희는 긴 한숨을 들이켰다. 서서히, 잔뜩 숙인 고개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동안 잔뜩 의심했던 것과 달리, 정말로 허탈하게도 그는 오빠의 차 사고와 관련 없었다. 어쩔 수 없다. 택배로 서류들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김기사의 자다 깬 몽롱한 목소리가 한치의 틀림도 없고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갑작스레, 혹은 주도면밀하게 꾸민 것도 아닌, 그저 단순한 사실일 테니까. 이렇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바흐는 라희의 잔뜩 주늑이 든 의기소침한 끄덕임에 입가를 옅게 올렸다.
"........?"
갑자기 뻗어나온 큰 손이 라희의 축 처진 턱을 세워 위로 들어 올렸다. 들린 시선의 끝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그가 보였다. 비스듬히 내리뜬 검은 눈동자 위의 미간이 약간 몰려서 언뜻 찡그린 것 같은 표정으로도 보였다.
"그럼, 이제 해도 될까?"
그가 나직이 물었다.
"뭐, 뭐를요..."
라희가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해 더듬거리며 묻자, 그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다가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낯설지 않은 타인들끼리, 예전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서 하는 육체적으로 친밀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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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