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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103화 (103/214)

103

키스?

라희는 눈을 깜박였다. 키스해 달라고? 분명히 잘못 들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키스라니? 그것도 느닷없이.

바로 앞에서 생생히 쏘아진 시선에 당황한 라희가 눈동자를 황망히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사이, 그는 곧은 시선을 거두어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아주 천천히, 섬세한 속눈썹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내 그의 눈이 닫혔다. 그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키스를 기다리는 동화 속 수줍은 공주처럼. 아니, 왕자.

라희는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여전히 입술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다. 지척에서 그가 내쉬는 숨결이 미약하게 솜털을 간질인다. 이대로 아주 조금만 움직인다면, 서로가 바로 맞닿을 수 있겠지.

라희는 턱을 옆으로 비틀어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단정한 입술을 향해 아주 미세히 움직여 가다가, 입술 바로 위에 잠시 멈춰 섰다. 그러다가 조금 더 움직였다. 방향은 앞쪽이 아닌, 옆. 라희의 작은 입술은 그의 입술을 스치듯 지나쳐 옆으로 미끄러졌다.

-쪽.

짧고 건조한 입맞춤이 다물린 입매 옆 뺨에 남았다. 그 순간, 그의 감은 눈꺼풀 아래가 조금 움직였다. 미미하게 움찔이던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들리고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눈매가 조금 열렸다. 이윽고 그의 눈이 완전히 뜨였다. 끝이 살짝 휜 섬세한 속눈썹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검은 동공 가득, 라희의 얼굴이 비쳤다.

".........."

그가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라희를 응시했다. 라희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됐죠?"

입술에 해달라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쩐지 실망스러워 보이는 그를 향해 라희는 속으로 변명했다. 바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가만 라희를 응시하며 눈을 느리게 한번 감았다가 똑바로 떴다.

그는 라희를 향해 수그렸던 몸을 바로 일으켰다. 그가 앞에서 사라지자, 침대 위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던 숨 막히는 압박감이 순식간에 걷혔다.

"흐음."

그는 우뚝 선 곧은 자세로 라희가 누워있는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시선을 라희에게 고정한 채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그의 눈빛은 이내 라희의 코 아래, 고집스레 닫힌 입술 틈 사이 정중앙에 머물렀다.

"........실망인걸."

낮은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라희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기대했던 입술 쪽 키스가 아니라서?

그는 라희의 눈에 담긴 의문을 읽기라도 한듯,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그가 다시 침대를 향해 몸을 구부렸다. 시야 가득, 라희의 얼굴을 덮어오는 그의 손바닥이 보였다.

순식간이었다. 그의 긴 손가락 끝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입술선을 따라 가볍게 스치듯 매만지는 손끝이 또렷이 느껴졌다. 손끝이 닿은 부분 부분마다 굉장히 뜨겁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꾹. 그의 곧게 뻗어진 검지 손가락 끝은 라희의 입술 가운데를 힘주어 눌러왔다. 보드라운 입술 정중앙을 지그시 누르던 손끝은 천천히 다물린 입술 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린 살점을 눌러 벌리며 촉촉한 점막 안으로 밀고 들어온 손끝은 이내, 굳게 닫힌 단단한 앞니에 막혀 멈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라희는 눈을 위로 치켜떴다. 라희가 차갑게 그를 노려보는 가운데, 그의 눈매는 살며시 끝이 가늘어졌다.

"뭐, 뭐하는 짓.....흐읍..!"

짜증 섞인 말을 막 내지르려는. 그때, 입을 짓누르고 있던 손끝이 빠져나가면서, 순식간에, 그 자리를 대신해 뜨거운 입술이 가득 덮어왔다. 작은 입술은 아래에 짓눌려 거칠게 부벼졌다. 갑작스러운 집어 삼켜짐에 놀람도 잠시, 촉촉한 속살이 맞대어지면서 쭈뼛, 머리끝까지 치솟는 소름 같은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이내, 커다란 손이 다가와 뒷머리와 목을 감싸 안았다. 턱이 들리면서 그를 향해 힘껏 끌어 당겨졌다. 그는 아래에 깔린 여린 입술을 입안 가득 삼켜버릴 듯이 연신 내리덮었다. 뜨겁다. 말랑하다. 맞대어진 입술 속에서 빠져나온 촉촉하고 미끈한 살덩이가 단단하게 막힌 앞니 위를 더듬어 내렸다. 톡톡 가볍게 두드린다. 열어달라 부드럽게 노크하며, 재차 두드렸다.

"키스."

그가 입술을 잠시 떼고 낮게 속삭였다. 조금 전 잘라먹은 말의 답인듯 했다. 그의 음성이 내려앉은 입술 위가 어릿하다. 아주 미세한틈을 두고, 겨우 아랫입술만 뗐을 뿐이다. 타액으로 젖은 윗입술 끝은 맞닿아있었다. 거친 호흡 속 뿜어져 나오는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

찡그린 미간 아래 눈을 크게 치켜뜬 라희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이는 순간, 다시 뜨거운 혀가 입안 가득 들어왔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입안을 휘젓는다.

입안으로 뾰족하게 파고들어 온 혀끝이 웅크린 작은 혀를 건드렸다. 움찔, 도망가려는 라희를 그가 부드럽게 감아왔다. 혀와 혀가 마주 닿자, 짜릿한 감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몸이 떨렸다. 작은 떨림을 음미하듯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이 밀고 들어온 말캉한 혀가 마침내 도망갈 데 없는 혀를 단단하게 옭아맸다. 끈적하게 질척거리며 단단하게 감겨왔다.

"읍...!"

맞닿아진 혀와 깊게 맞물린 입술을 타고 체온보다 뜨거운 타액이 입안으로 가득 흘러든다. 미끌거리는 진득한 타액과 함께 그의 그윽한 체향이 입안을 채웠다. 은은하고 익숙한 베르가못향. 영국에서 내내 마셨던 얼 그레이 향이다. 그의 향기. 냄새.

그가 혀끝을 세워 입안을 간질인다. 작고 여린 혀를 살짝살짝 약하게 빨아들였다가 혀끝으로 건드려 찍어 눌러 천천히 쓸어올렸다가, 쓸어내렸다. 아득하다. 머릿속이 빙빙 도는 느낌. 숨을 쉴 수가 없다.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라희는 가늘게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히 내려 뜨인 눈동자 역시 열기로 낮게 타오르고 있었다. 덥다. 견딜 수 없이 덥다. 그의 혀가 가득 들어온 입안이. 점점 그를 향해 기울어지는 몸이. 빈틈없이 맞댄 공기가.

뜨거운 숨결이 입술 표면에 미세한 입자처럼 내려앉아 스민다.

그의 입술은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려 붉어진 입술 끝과 끝이 깃털처럼 가볍게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면서 맞닿아졌다.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여린 꽃잎처럼 부들부들한 작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꽃물이 든 것처럼 붉디붉은 입술 안쪽으로, 끝을 뾰족하게 세운 촉촉한 혀끝이 타액을 흠뻑 적시며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으응..."

도톰한 속살이 지그시 눌려 쓸리며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이내, 혀끝과 혀끝이 마주 닿았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 뜨거운 열기에 속절없이 스스르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들부들해진 혀가 그에게 잔뜩 휘감겼다. 진뜩하고 부드러운 크림 속을 휘젓는 감촉. 숨이 막힌다. 뜨겁다. 달아오른 열기를 이기지 못한 눈이 감겼다. 혀와 혀가 더운 열기 속에 맞부벼져 깊게 엉켜 들었다.

맞물린 숨결이 한데 섞여 이제는 입안 가득 그의 향만 느껴진다. 달다. 라희의 감은 속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윽한 향을 머금은 그의 키스는 달디달았다. 입안 가득 고인 그의 맛이 좋아서 라희는 애타게 그를 빨아들였다. 자욱한 체향에 취해 머리끝까지 아득해지는 느낌. 감은 눈동자가 한데 몰릴 정도로 아찔했다.

부드러운 혀가 미끈하게 젖은 혀를 감아 들었다가, 길게 핥아 내렸다가 다시 휘감아 입술을 흡착해 깊이 빨아들인다. 그에게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혀끝이 짜릿하게 조여든다. 찌릿거리며 몸도, 정신도 함께 조여드는 것 같다.

이내 다시 놓여서 풀려난 말캉한 혀는 빙글 옥죄어 휘감아졌다. 단단하게 연결된 살덩이가 농밀하게 부대끼며 비벼진다. 연신 뜨거운 열기를 피워올리며 빨고, 빨리고, 간질이듯 건드리고 농밀하게 건드려졌다.

"으, 응. 하, 음.."

찰박이며 질척이는 혀는 핥고 핥아지며 감각의 한계를 시험하듯 눌러 비벼지며 흠뻑 젖어 얽히고설켰다. 깊숙이 맞닿은 혀끝을 타고 야릇한 감각이 피어나, 몸의 신경이 가닥가닥 나른하게 풀린다. 촉촉한 혀끝이 마주 뒤엉킬 때마다, 뜨겁게 달궈진 몸도 촉촉이 젖어들었다.

"하아, 하아..하..."

마음껏 농밀한 감각의 향취를 만끽한 입술이 마침내 떼이자, 참고 참았던 격한 숨이 토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호흡이 쉴 새 없이 내뿜어졌다.

"후우...."

그 역시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억누르듯 내리 쉬어 거친 호흡을 골랐다.

"........."

입술 위를 지그시 눌러오는 감촉. 라희는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렸다. 바로 앞, 깊고 짙은 검은 눈동자가 라희를 찬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한 키스로 예민해진 붉은 입술을, 섬세한 손길이 매만지듯 따라 그렸다.

"오십이었지."

정적을 가른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들었다. 오십? 라희의 두 눈 가득 의아함이 어렸다. 무슨 뜻일까. 오십이라고? 위로 올려 뜬 호기심을 담은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뭐가요?"

라희가 뾰족하게 물었다.

"가격."

짧은 대답.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가 의미한 답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머릿속을 스친 예전 기억. 오피스텔에서 그가 물었던 유혹의 가격. 그때 라희가 말했던 답. 키스는 오십. 키스 마크는 십....

대체 왜? 갑자기 지금 그걸 말하는 걸까. 뇌리에 의문을 떠올리자, 열기로 달아올라 뜨거웠던 머리가 갑자기 얼음물에 처박힌 것처럼 차게 식었다.

"400배로군."

400배? 400이면 숫자인데. 무슨 뜻이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라희의 미간은 잔뜩 찡그려졌다.

그는 고민하고 있는 라희를 가만 보고 있다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 뻗어진 그의 팔이 향한 곳은 침대 옆 협탁. 협탁 위에는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사각으로 네모난 손바닥만 한 물건. 딱딱하고 단단하다.

"자."

그의 손에 들린 네모난 물건은, 이내 라희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뭐지? 라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손안에 쥔 것은 낯선 모델의 휴대폰. 한국에서 몇 개월 전 출시되었던 신형 휴대폰이다.

휴대폰? 대체 왜?

"이게 뭐에요?"

라희가 물었다.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그가 간단히 답했다. 아까, 낮에 물에 빠졌을 때 휴대폰도 침수되었기에 쓰라고 주는 건가? 라희는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기에는 앞에 그가 한 말들이 죄다 뜬금없었다.

라희는 손에든 휴대폰을 찬찬히 살폈다. 전원은 꺼져있었다. 시커먼 액정화면, 그리고 하얀색 뒷커버. 평범했다. 뭔가 특별하거나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라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올려 바로 곁에 서 있는 바흐를 쳐다보았다. 라희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마치 스핑크스 같다. 자신이 고심해서 낸 수수께끼를 누군가 기꺼이 풀어주기를 고대하는.

뭘까. 과연. 라희는 휴대폰을 보면서 골똘히 의문에 잠겼다. 손안에 든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휴대폰은 비록 신형이긴 했으나, 완전한 새 폰은 아니었다. 곳곳에 미세하게 사용흔적이 있었다.

라희는 휴대폰의 꺼진 액정 테두리에 남겨진 작은 흠집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서, 휴대폰을 뒤집어 뒷면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던 도중, 하얀색 뒷커버 아랫부분에 조그맣게 쓰인 뭔가가 눈에 띄었다.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 라희는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눈매를 잔뜩 좁혔다.

YJL.

영어. 세 글자라면, 아마도 이니셜.

Y는... 보통 이 씨 성. 이순신 장군도 Yi를 쓴다.

Yi는 이.. 그럼, 나머지 JL은? 당장 떠오르는 이름은 주리.

그럼 이주리?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다. 대체 누구지? 무슨 이름일까.

도무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불현듯 앞서 바흐가 말한 숫자의 조합이 뇌리를 스쳤다.

50*400=20,000

오십 곱하기 사백은 이만.

하지만, 여기서 50은 단순한 50이 아닌, 50만 원.

500,000*400= 200,000,000

오십만 원 곱하기 사백은.

2억.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라희는 당황으로 눈을 잠시 깜빡였다. 설마. 설마. 고개를 재빨리 숙여서 다시 손에 든 휴대폰의 이니셜을 살폈다.

YJL.

만약, 이니셜이 영어식이라면.

Yu Jin Lee. 유진리.

한국식으로 바꾸면, 이유진.

이건, 이유진의 휴대폰.

한국을 떠나기 전, 유진은 자신의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녹취를 했었다.

놀람으로 크게 뜨인 라희의 눈이 그를 향하자, 그가 단정한 입매를 희미하게 올리며 말했다.

"맞아."

"그럼...."

라희는 말꼬리를 흐렸다. 혼란스러웠다. 그럼, 바흐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유진과 거래한 내용을 모두. 영국에 오기 전부터?

"방금 키스의 값이야."

놀라 멍하니 바라보는 라희를 향해, 그가 나직이 말했다.

"줄곧, 기다렸거든. 이미 예정했던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새해가 남아 있으니까."

그가 덧붙이며 말했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흐의 크리스마스 선물 언급 91편

유진 녹취 77편

키스가격 책정은 24편에 언급되어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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