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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끈 감은 두 눈. 차갑게 심장을 옥죄어오는 냉기로 잔뜩 주름진 미간은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이제 곧....
라희는 이를 악물었다. 턱에 잔뜩 힘을 주니, 추위로 굳어 감각 없는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타앙!
공포로 숨 막히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간격도 없이 다시, -타앙!
연속해서 귓속을 가득 메운 총소리가 가슴 떨리도록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첨버어엉,
무언가 거대한 것이 수면으로 떨어져 내려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촤아악.
라희의 질끈 감은 두 눈 위로 세찬 물줄기가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얼굴과 몸 전체에 끼얹어진, 분수 같은 물 폭탄이었다. 차가운 수면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출렁이면서 어깨 부근의 수고가 턱까지 차올라 너울졌다.
냉기로 딱딱하게 굳은 뺨 위로 여진 같은 차가운 물줄기가 작게 튀어 올랐다. 얼음장 같은 물방울들이 얼굴 위로 튕겨져 올라와 잘게 부딪치자, 마치 우박 덩이를 때려 맞은 것처럼 피부가 얼얼했다. 그리고 찾아온 쥐 죽은 듯한 정적.
......움직임이 없다?
주위가 숨 멎은 것처럼 조용하다.
뭐지? 방금 총소리. 그리고 강물이 크게 출렁였는데.
난 이미 죽은 걸까?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득한 어둠 속에서, 라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얼어붙은 사지는 이제 감각조차 없었다. 그때, 절망스러운 질문에 한 줄기 빛 같은 계시라도 내려 주려는 것 같은, 커다랗고 날카로운 외침이 정적을 갈랐다.
"라일라!"
엘리자베스의 다급한 외침.
살아있구나. 살아있어. 라희는 힘주어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풀었다. 이내, 굳게 힘준 미간이 스르르 풀려 갑자기 띵하고 얼얼했다. 라희는 어질한 기운을 털어내느라 고개를 잘게 저으며 눈을 떴다. 눈을 재차 깜빡이자, 시야가 트였다.
바로 앞 온갖 부유물이 일어나 거세게 뒤집힌 수면 위로 탁한 공기 방울이 쉼 없이 위로 보글보글 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보니, 물속이 잔뜩 일어나 흐려진 아래, 크고 시커먼 것이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모습이 어울어울 보였다.
뽀글뽀글거리며 올라오는 황촛빛 더러운 기포와 함께 촉수처럼 위로 퍼져 올라오는 시뻘건 핏줄기의 길게 뻗친 가닥가닥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순간, 라희는 크게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라일라!"
귓가를 쨍히 울리며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가의 경계에 서서 애끓게 계속 라희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초조한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뭐지?
라희는 멀리 초점을 맞추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며 눈매를 좁혔다. 비로소 엘리자베스 어깨너머, 맹렬히 뛰어오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체고와 몸집이 비슷한 두 남자 중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이의 속도가 더 빨랐다.
라희의 좁혀진 창백한 두 눈 가득, 강에 도착해 차가운 강물을 거침없이 헤치고 들어오는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그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 흐트러진 눈매.
이내, 불안하게 흔들리며 앞을 바라보는 짙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괜찮아?"
낮은 울림의 목소리가 다가와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그는 순식간에 물살을 가르고 와 팔을 뻗어 차갑게 굳은 팔뚝을 붙잡았다. 얼어붙어 둔한 감각 속에서도 아프다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힘주어 잡은 악력. 커다란 손을 펼쳐 손아귀로 꽉 붙드는 강한 손길. 그다.
이상하지. 그저, 양 팔뚝이 그에게 붙잡혔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다리가 먼저 풀리고 서서히 잔뜩 굳은 몸의 힘이 빠진다. 손끝 발끝이 나른히 풀리는 느낌에 라희는 힘없이 고개를 들고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렸다. 멍한 시선으로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은 거야?"
다급한 목소리. 이상하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흐의 얼굴이 안개속처럼 흐리게만 보인다. 불투명한 시야 가득, 쉼 없이 달려오느라 가뿐 숨을 내뱉는 단정한 입매가 흐릿하게 보였다. 뿌연 시야 너머 매끈한 턱선이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다.
감각 없는 뺨 위로 무언가 감촉이 느껴졌다. 얼얼한 뺨을 재차 매만지며 누르는 느낌. 온기? 조금 따스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느낀 것도 잠시, 갑자기 사위가 아득해졌다. 주변을 둘러싼 세상에 어지럽게 핑그르르 돌았다. 사물의 윤곽이 온통 흐려지면서 의식이 멀어진다. 감각의 경계가 가물가물 섞여 주위가 아스라해졌다.
"라희야.........!"
바흐의 목소리는 웅웅거리며 머릿속을 울리다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정신이 아득하다. 앞은 온통 캄캄했다.
***
몸을 둘러싼 따스한 느낌. 귓가를 맴도는 둔탁한 말소리. 희미하게 주고받는 대화. 라희는 회색빛 흐릿한 정신을 둔탁하게 일깨우는 소리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다행입니다. 찬물에 노출된 시간이 비교적 짧았기에 심부 온도는 정상입니다. 전화로 말씀드린 지침을 잘 따르셨군요. 젖은 옷을 제거하고 따스한 담요로 감싼 뒤 따뜻한 물주머니로 체온을 높인 덕에 체온 손실도 없군요. 적절한 조치를 잘 취하셨습니다. 혈압도, 맥박도, 호흡도 모두 정상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다. 억양도 독특했다. 무언가 몸에 닿는 느낌. 기계적인 짧은 동작으로, 무언가 몸을 이리저리 힘주어 매만진다.
"방 안 온도를 후끈할 정도로 유지해주시고,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일시적인 실신상태로 보입니다. 신체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아가씨가 큰일을 당해서 놀란........."
이어지는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사위가 아득해지면서 다시 의식은 흐려졌다. 고요한 정적이 라희를 감쌌다. 그 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희미한 의식은 여전히 캄캄한 어둠 속.
".....믿을 수가 없네. 오오. 루퍼스."
머릿속을 웅웅거리는 둔탁한 소음. 잔뜩 침울한 남자 목소리가 무겁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루퍼스는 전문 브리더에게 교육된 혈통견이잖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할 리가 없어요."
여자 목소리.
"엘리자베스. 인간을 공격하는 동물은 사살하는 것이 원칙이야. 전 세계적으로 암묵적인 규칙이지. 제임스, 자네의 상실감은 충분히 이해하네."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일깨웠다.
"아아, 정말.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행동했던 루퍼스였네. 내가 보지 못했던 사이 뭔가 잘못 된 걸까?"
제임스다. 침대 주위에 깔린 카펫을 이리저리 밟으며 초조하게 서성이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오빠, CCTV로 집안 내 루퍼스의 행적을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어요. 아침나절 루퍼스를 자극했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엘리자베스. 옆에 있구나.
"그래. 복도와 응접실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모조리 돌려서라도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예술품 도난 방지를 위해 설치해 둔 CCTV를 루퍼스 때문에 돌리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난 정말 루퍼스가 아무 목적 없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얼마나 온순한 녀석인데. 뭔가 이유가 있을거야. 틀림없이."
단정적으로 말한 제임스의 규칙적인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사이 의식은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다.
"데이빗 오빠. 저녁은 어떻게 할 건가요?"
침묵을 깨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데이빗. 바흐. 라희는 몸을 움직여보려 노력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움직이려 집중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고집불통. 곧 있으면 라일라 침대 옆 붙박이 가구가 되겠군요."
엘리자베스가 가벼운 목소리로 놀리듯 말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 특유의 새침하게 핀잔주는 듯한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침묵. 그답게 작은 핀잔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 않았다.
"흐응. 알았어요. 내려가 여기로 식사를 준비하라 이를게요. 먹고 싶은 음식은요?"
답답한 침묵을 깬 엘리자베스가 선심 쓰듯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휴, 짧은 탄식 어린 한숨과 함께 옷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는 차츰 귓가에서 멀어져갔다. 이내 문소리가 들리고 주위는 조용해졌다. 정적. 고요 그리고 침묵.
그가 곁에 있음을 똑똑히 인지할 수 있는 무거운 침묵이 방안 가득 내려앉았다. 그 시간 동안 정신을 온전히 되찾은 라희는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조금 더 힘을 쓰자, 좀전 까지만 해도 미동하지 않던 눈동자가 뜻대로 크게 움직이면서 속눈썹이 위로 번쩍 들렸다. 가늘게 뜬 시야 가득 환한 천장 조명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라희는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이내 얼굴 위로 흐린 음영이 내려앉았다. 그림자? 눈을 가늘게 뜨고 찌푸리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라희의 바로 위에서 바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명을 등지고 선 그의 윤곽이 검게 빛났다. 그는 우뚝 서서 유심히 라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요한 눈동자가 얼굴 위로 내려앉아 세세히 움직이며 잔뜩 찡그린 안색을 살폈다.
라희는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탁 트인 시야 가득, 그의 단정한 얼굴이 또렷이 들어왔다. 그는 아래로 향한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깊고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가 놀란 라희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췄다. 짙게 내려앉은 시야 가득, 자신의 얼굴이 보이자 라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
새하얗게 된 뇌리에 흐릿하게 일그러진 광경이 스쳤다. 그래. 그가 강물에 뛰어들어왔었다. 팔뚝을 단단히 붙잡았었지. 그리고, 그전에....
노란 눈을 번뜩이던 검고 커다란 개. 날카로운 총소리.
라희는 조금 전 귓가에 웅웅거리며 들리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가, 그 무시무시한 짐승을 총으로.
잔뜩 일어난 흙탕물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붉은 피.
거기까지 떠올린 라희는 경악으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생생히 상기되는 차가운 감촉. 신경을 마비케하는 얼음장 같은 강물 속. 순간, 서늘한 오한이 등골을 훑고 지났다. 라희는 심장을 옥죄는 냉기를 떨치려 고개를 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강물 속, 절망적이던 그 시간처럼. 그가 곁에 서 있다.
서로 마주 보는 곧은 시선 속에서 그는 말없이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꾹 다물린 단정한 입술.
그러고 보면, 뼛속까지 시린 추위와 공포로 정신없이 몸을 떨던 그때, 잔뜩 흐려진 시야 속에 저 입술은 다급하게 열렸었는데.
위를 올려다보는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새카만 눈동자와 만나 가늘게 좁혀졌다가 머릿속 떠오른 두 음절 때문에 덜컥, 무겁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2억.
그 무엇보다도 육중하고 둔중하게 마음을 짓눌러 내리는 단어. 라희는 시선을 내리 비끼며 잇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변한건 없다.
이유진과 한진욱이 이미 파혼했다고 해도, 이유진과 송라희가 한 계약은 만료되거나 소멸로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연하게, 계약은 실재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무시무시한 위약금도 역시.
내리깐 시선에 그의 손이 들어왔다.
길고 커다란 손.
저 손이, 죽음을 목전에 둔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크고 광포한 짐승.
시커멓고 무서운 짐승이 다리 위로 도약해 허공에 뜬 순간, 역겨운 침 가득 고인 주둥이 속 날카롭게 삐죽 돋아난 이빨에 잘근잘근 씹혀 으스러지고 피떡이 되어 뭉개질 줄로만 알았는데.
......2억?
라희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목숨보다 소중한가?
죽으면 어차피 의미 없어지는 금액일 텐데.
라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손끝에 닿는 선명한 시트의 감촉. 빳빳하면서도 부드럽게 구겨진 새하얀 면시트. 손아귀 사이로 생생한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살아있다는 온전한 느낌.
아무리 무시무시한 금액이라도.
결코, 목숨과 견줄 수는 없다.
........적어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갚을 수는 있지 않을까?
후. 라희는 긴 한숨을 억눌러 내쉬고서 다시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아래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낱말의 무게에 옥죄인 심장은 먹먹했다.
위로 들린 시야 가득히 그가 보였다. 아까부터 줄곧, 그는 라희를 유심히 살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동 없는 깊고 검은 눈. 흐릿한 기억 속에서는, 저 눈동자가 당황으로 미세히 떨렸었다.
그래. 말하자. 말을 해야 한다.
라희는 무거운 속눈썹을 아래로 내려, 눈을 가만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그를 향해 줄곧 닫혀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고마워요."
꽉 잠긴 목소리. 음, 음. 라희는 작은 헛기침을 했다. 그의 숨 막힐 듯 집요한 시선 속에서, 목을 다시 가다듬고서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깐 고마웠어요. 정말로."
겨우, 마음속 하고자 했던 말을 뱉었다. 라희는 잔뜩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길게 쓸어내렸다.
고작, 몇 마디.
저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 정말, 엄청난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다. 드디어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 선히 떠오른 숫자로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라희는 눈동자를 내려 바닥으로 힘없이 떨궜다.
위에서 내리 바라보던 검은 눈매 끝이, 라희의 말을 듣고 조금 가늘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깊은 검은 눈동자 아래, 굳게 닫혀있던 단정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그가 말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위에서 쏟아지는 곧은 시선은 눈길을 피한 라희를 가만 응시했다.
"못 믿겠는걸."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라희는 순간 놀라, 눈을 크게 위로 올려 떴다.
"네?"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반문하는 라희에게, 그가 위에서부터 눈길을 맞추며 담담히 말했다.
"말로만 하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야."
생각지 못한 반응. 낯선 의미. 대체 무슨 뜻이지? 라희는 순간 멍했다. 머릿속이 띵하고 혼란스럽다. 방금, 그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어리둥절한 눈빛이 위를 망연히 올려다보는 사이,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누워있는 라희의 얼굴 위로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이 내려왔다. 서서히 다가온 그는 라희의 크게 뜨인 눈동자 바로 앞에서 뚝 멈췄다.
라희는 너무 놀라 눈을 한번, 크게 깜빡였다. 눈동자 바로 위, 닿을 듯, 말 듯한 사이를 두고 그가 새카만 눈빛을 맞춰왔다. 얕게 뿜어진 따스한 숨결이 뺨에 와 닿았다.
스칠 듯 마주한 살갗 위로 호흡이 오갔다. 아주 작은 틈을 사이에 둔 비좁은 공간으로 서로의 체온이 미약하게 전해진다. 코끝의 솜털이 닿을락 말락. 미미한 간격. 가깝다. 너무나.
잔뜩 굳은 눈동자가 마주한 것은 깊고 새카만 심연. 그의 은은한 체향이 피부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깊숙이 스민다. 자연스레 천천히 억눌렀던 호흡이 마저 멈춰진다.
부딪치는 시선 속에서 그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잠시 아래를 향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가 미끄러지더니 이내 한 곳에 멈춰 섰다. 흑요석 같은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다름 아닌.
꿀꺽,
라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온몸의 혈관이 바싹 죄어왔다.
스칠락 말락, 닿을락 말락 한 지척을 사이에 두고, 단정한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치듯 희미하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지워졌다.
"키스."
아래를 바라보던 그가 눈을 다시 위로 들어 올렸다. 가지런한 곧은 시선으로 집요하게 라희를 바라보면서, 그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정말로 고맙다면, 키스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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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