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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라희 방문을 두드렸다. 라희는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다가, 노크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문가로 가까이 다가가며 물으니 방문 저편에서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햄버튼."
총관리인이 내방에는 무슨 일이지? 라희는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햄버튼은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로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라희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묻자, 햄버튼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미스 람퍼트께서 윌버리 하우스를 떠나신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배웅하시겠다고 혹시 미스 송께서도 생각이 있으시다면 1층 현관 앞으로 내려오십사 전해드리라더군요."
"아...."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피. 오전에 떠난다고 했지. 아까 방에서 마주치고 짐을 가지러 가서 시간이 꽤 흘렀으니 얼추 현관에서 떠날 시간이었다.
배웅.....
그래도 해야겠지? 라희는 눈을 반쯤 내려뜨고 생각에 잠겼다. 소피의 오해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바흐에게 고백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더라면 혹시 말할 기회가.....
라희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코 말할 수 없다. 소피가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낳아주신 부모님이나 같이 자란 가족에게조차 쉬쉬하며 말하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일인데. 하물며 남에게 어찌.
저녁에 사라네 집에서 다시 마주하겠지만 어쨌든, 윌버리 하우스를 먼저 떠난다니 일단 내려가서 얼굴은 비쳐야 할 것 같았다. 라희가 몸을 움직이려 하자, 햄버튼이 라희를 향해 시선을 살짝 내리고서 정중하게 말했다.
"바깥은 상당히 춥습니다."
라희는 고개를 숙여 현재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편안한 긴 팔 티셔츠에 캐주얼한 청바지. 사라네 집이었다면 서늘한 외풍 때문에 얇은 후드 집업이라도 걸치고 있었을 텐데, 윌버리 하우스의 게스트 룸은 굉장히 훈훈해서 따로 걸칠 옷이 필요 없었다. 때문에 옷차림은 얇고 간편했다.
라희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확실히 밖에 그냥 나가기에는 너무 추워 보이긴 했다. 현관이라면 집 밖이니 한겨울 기온이라 이대로는 쌀쌀할 거였다.
햄버튼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 라희는 몸을 돌려 침대 옆 협탁에 걸어둔 검정색 외투를 가지고 왔다.
"소피가 현관으로 벌써 나갔나요?"
계단을 내려가며, 서둘러 모직 코트의 한쪽 팔을 끼워입은 라희가 물었다.
"짐은 트렁크에 실어둔 상태이고, 아가씨와 람퍼트 양은 현관 대기실(anteroom)에서 간단히 말씀 나누고 계십니다."
햄버튼이 발걸음을 단정하게 옮기며 대답했다. 저 앞에 현관문 옆 대기실의 유리문이 보였다. 자동차가 현관 앞으로 당도하기 전에 간단히 쉬는 곳으로 마치 특급호텔의 주차 라운지 같은 공간이었다.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형식적인 이별의 포옹을 마친 두 사람은 이내, 유리문 앞에 서 있는 라희를 발견했다. 소피를 배웅하기 위해서 인듯, 고급스러운 외투를 걸쳐입은 엘리자베스는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며 반가워했고 빵빵한 패딩을 입고 있던 소피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럼, 이만 갈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팔머 양."
"윌버리 하우스에서의 기억이 즐겁고 유쾌하길 바랐는데. 아쉽네요. 람퍼트 양."
두 사람은 서로 눈인사를 나눴다. 라희가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소피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현관 앞 대기 중인 크고 긴 차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라희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라희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현관으로 나갔다. 추운 겨울 공기가 전신을 휘감아왔다. 새삼, 햄버튼의 자상한 조언이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게 한 명의 손님이 윌버리 하우스를 떠나네요. 대상이 누구였던지 간에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워요. 그렇지 않나요?"
현관에서 멀어져가는 롤스로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라희 역시 정문 쪽으로 커브를 틀어 빠져나가는 차량의 뒷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전, 소피의 태도로 보아 사라의 집에서 저녁에 다시 마주치면 상당히 어색하고 껄끄러울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라희가 짧은 한숨을 내쉬자 엘리자베스가 라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산책할까요?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걷기에 좋은 날 같아요. 우리 둘 다 윌버리 하우스의 자랑인 미로정원을 잠시 걷다 보면 초목에 둘러싸여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건강에도 좋구요. 겨울철이라 실내에만 있으면 호흡기 건강에 좋지 않다고 지난번 정기점진 때 주치의가 조언해주었죠."
그녀는 잠시 깊은 푸른 눈으로 라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미로 정원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네더 강이 흘러요. 혹시 보셨나요? 1736년에 축조된 팔라디오 풍의 멋진 다리가 놓여있죠. 오늘 같은 날씨면, 강물 빛과 어우러져 아주 근사한 분위기일 거에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군요. 윌버리 하우스의 명물로 유명하지요. 브리티시 매거진에도 몇 번이나 소개가 되었답니다."
라희의 겉옷을 본 엘리자베스가 빙긋 웃었다.
"다행히 겉옷을 입고 내려오셔서 잠시 산책하기에는 무리가 없겠군요. 자 갈까요?"
방금 떠난 롤스로이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시간은 넉넉했으므로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기쁜 표정으로 라희의 손을 잡고 멋지게 다듬어진 정원을 향해 걸어나갔다.
***
"새는 꿩(Pheasant), 회색 자고새(Grey Partridge), 빨간 다리 자고새(Red-legged Partridge), 들오리하고 들거위 (Duck & Goose), 도요새(Snipe), 멧도요새(Woodcock), 황금 물떼새(Golden Plover) 물닭(Coot/Moorhen) 등은 BASC(British Association for Shooting and Conservation: 영국 사냥협회)에서1월에서 2월까지 허용한 오픈시즌(수렵기간)이라구. 일단 조류는 그렇다네."
두 사람이 강가에 도착하자 제임스는 진욱에게 라이플 한 자루를 건넸다. 아주 미끈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최신형의 라이플이었다. 총신의 앞부분(forend)과 개머리판은 자단(rosewood)과 단풍목(maplewood)로 유광처리를 해서 반질거렸다.
"사슴은 어느 종류나 상관없이 겨울부터 3-4월까지 가능하네. 영국은 총기를 사랑하는 나라지. 길거리에만 들고 다니지 않으면 돼. 미국과 달리 수렵 외에는 집밖 총기 소지가 불법이니까."
제임스는 손에 든 매끈한 총신을 손가락 끝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특히 토끼는 보이는 족족 쏴도 된다네. 귀엽고 깜찍한 외모와 다르게 정성 들여 가꾼 정원을 마구마구 파괴하고 다니니 다들 싫어하거든. 자네도 영국인의 가드닝에 대한 집착을 알고 있다면 아마 작은 정원 파괴자에 대한 뿌리 깊은 애증을 이해할걸세."
"흐음."
진욱은 탄창(Magazine)을 열어 총탄을 5개 넣고 철걱, 라이플의 볼트핸들을 들었다가 놓아 장전했다. 어깨에 개머리판을 단단히 견착하고 눈매를 좁혀 둥근 스코프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단지 크리스마스와 일요일만 아니면 되네. 그때 사냥하는 일은 불법이지만, 다른 때는 문제 없지. 하긴, 크리스마스나 일요일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 집에서 내 땅에서 내가 사냥하겠다는데. 주민 신고만 들어가지 않으면 상관없네. 그런데 이 넓은 14,000에이커 내에 다른 거주민은 없다구 하하."
제임스는 유쾌하게 웃다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힘껏 내밀며 말했다.
"윌버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외부에 개방하지 않았지. 고작 돈 몇 푼 벌겠다고 개방하면 사냥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사람들이 들락거려 아주 귀찮거든."
"가볍군."
진욱이 자세를 풀고 손에 든 라이플을 살펴보며 짧게 말하자 제임스가 더 신나하며 떠들었다.
"이 녀석 이름은 Mk.V Ultramark라고 웨더비(weatherby)사의 신형 라이플일세. 웨더비야 원체 경량으로 유명하니 클래식 버전임에도 가볍지. 이번에 런던에서 단골 총기 상의 추천으로 구입 했네. 그동안 커스텀 라이플만 써서 시중 판매 라이플의 성능이 몹시 궁금했거든. 사슴 따윈 한 방에 잡을 수 있다더군. 볼트액션 라이플의 묘미는 한방 아니겠는가. 하하."
그는 턱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조금 껄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위에 사슴이 없다는 거지. 사슴을 잡으려면 윌버리 하우스의 장원을 벗어나 제법 깊은 숲으로 가야 할걸세. 상당히 귀찮은 일이지. 우린 오늘 그냥 장원내 강가에 기웃대는 동물이나 새를 잡아야 하겠군."
제임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겨울 낮의 투명한 햇살이 그의 얼굴에 옅은 그늘을 만들었다.
"손 풀이용 토끼가 있으면 좋을 텐데.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평소에는 잔디밭마다 똥을 한가득 싸 갈기며 돌아다니던 토끼가 오늘따라 단 한 마리도 눈에 띄질 않는군. 영국에서 피터래빗이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연일세."
한동안 수풀과 낮은 관목 근처를 세심히 살피던 제임스는 이내 포기했는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국의 기후로서는 드물게 맑고 화창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루퍼스만 신났군."
제임스가 주인 주위를 어지럽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신나서 뛰노는 자신의 개를 보며 사냥감이 없음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진욱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사격 자세를 잡고 스코프에 눈을 맞춘 채 강가에 늘어선 높은 나뭇가지 사이로 라이플을 겨눴다.
-타앙.
짧은 총성이 고요한 평원의 정적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이내, 푸드득 뭔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잔디밭을 뛰놀던 루퍼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낙하물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맹렬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진욱은 들고 있던 라이플의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나서 제임스를 향해 입매를 살짝 올렸다.
"1:0 일세. 우리 내기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그랬지."
제임스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냥감 한 마리당 1,000파운드로, 최종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모든 돈을 주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3:7로 이겼으면 이긴 사람은 10*1,000파운드 총 10,000파운드를 갖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은 연말 파티 비용에 충당하기로 했다.
-툭.
헥헥. 사냥감을 물고 돌아온 루퍼스가 짧은 꼬리를 흔들면서 칭찬을 기대하는 눈으로 제임스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놓인 것은 황금 물떼새(Golden Plover)로, 강가에 주로 사는 비둘기만 한 크기의 새였다.
길거리에서도 총을 들고 돌아다닐 수 있는 총기의 천국 미국에서 사격을 배운 진욱의 솜씨는 나무랄 데 없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새의 사체는 깔끔하게 몸통을 관통당했다.
흙바닥에 놓인 물떼새를 유심히 살펴본 제임스는 짧은 숨을 들이켜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헥헥거리는 루퍼스의 커다랗고 단단한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우리, 어느새 뒤처져서 분발해야겠구나. 이거, 대영제국의 귀족 체면이 말이 아닌걸. 주인님을 응원해주렴."
그의 옆에 서 있던 진욱은 어느새 강가로 발걸음을 돌려, 뭔가를 발견했는지 다시 스코프에 눈을 가까이 대고 사격 자세를 잡았다. 진욱의 깨끗하고 깔끔한 자세를 눈여겨 본 제임스가 휘익, 낮게 휘파람을 부는 사이, -타앙.
마른하늘에 다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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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